그리고 지구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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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을 한가득 안고 위니펙에서 출발한 우리는, 2박 3일만에 별탈없이 밴프에 다다랐다. 차도 아이들도 다행히 밴프까지의 긴 여정을 잘 버텨줬다. 밴프에서, 우리의 첫번째 목적지는 “당연히” 레이크 루이스였다. 레이크 루이스에 도착한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겨울 태블릿을 통해 사진으로 봤던 레이크 루이스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동화 속 마을이 눈앞에 놓여 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에머랄드 빛 호수와 파란 하늘 그리고 눈 덮인 산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하고 호수만 바라봤다. 2박 3일 동안 차를 타느라 힘들었지만, 주차장에서 차를 대느라 고생은 했지만, 그런 것이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눈 앞에 있는 아름다운 풍경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었다.
한참동안 멍하니 풍경을 바라본 우리는 조금 더 가까이에서 호수를 느끼고 싶었다. 관광객을 위한 카누를, 아이들과 함께 타보기로 했다. 기다리는 줄도 길었고 값도 꽤 비쌌다. 셋이 한 시간동안 타는데 캐나다 달러로 125달러나 들었다. 십만원도 넘는 금액을 지불하는 게 맞나 잠깐 망설이기도 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호수를 그냥 지나쳐 갈 수 없었다. 이런 경험을 언제 하냐 싶어 기꺼이 큰 돈을 지불하고 레이크 루이스 한가운데로 빠져 들었다. 카누를 타니 우리가 그림 속에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마치 동화 속에 요정으로 변신한 기분이었다. 꿈을 꾸고 있는 듯 했다.
카누를 타는 동안 아이들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다른 행복감을 주었다. 사실 카누를 타기 전 걱정되는 게 하나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도 좋지만 혼자 노를 저으면 꽤나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배를 타니 내 걱정이 기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어리바리하던 아이들은 금세 노를 잘 젓고 있었다. 나름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며 아빠를 도왔다. 덕분에 우리는 호수 끝까지 노를 젓고 다녀올 수 있었다. 물론 막판에 아이들 체력이 방전되는 바람에 나 혼자 고생을 해야 하긴 했지만 아이들 덕분에 호수를 제대로 볼 수 있어 고마웠다. 아이들과 노를 젓는 게 재밌기도 했고.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아이들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했다.
밴프는 볼 것도 많았고, 즐길 것도 많았다. 우리는 곤돌라를 타고 설퍼산 정상에 올라 밴프의 전체 모습을 조망하고, 곤돌라 탑승장 바로 옆에 있는 온천에서 장거리 이동의 여독도 풀었다. 밴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동굴에 가서 공부도 했고, 미네왕카 호수에서 유람선을 타며 시원한 바람도 쐬었다. 아침에는 조용한 바우강변을 산책하며 맑은 공기도 마셨다. 밴프의 다양한 자연을 즐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밴프를 너무 만만하게 본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3박 4일의 일정이 너무 순식간에 지나간 느낌이었다.
밴프에서 모든 순간이 다 좋았지만 특히 인상적인 곳이 있었다. 아이들도 그곳을 특별히 좋아했다. 아이스필즈 파크웨이라는 곳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이스필즈 파크웨이는 도로의 이름이었고, 도로를 따라 쭉 가다 보면 설상차 체험장이 있었는데 아이들은 그곳에서 설상차를 타고 빙하 체험한 것을 좋아했다. 아이들은 이곳에 가기 전부터 한 여름에 눈을 만질 수 있다는 아빠의 말을 믿고 기대를 한가득 했었다. 안타깝게도 아이들은 이곳에서 눈을 만지지도 보지도 못했다. 알고보니 우리가 마주한 것은 빙하였지 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빙하 체험장에서 아이들은 신나게 놀았다. 얼음을 만지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눈처럼 뭉쳐서 눈싸움도 했다. 자기들끼리 장난을 치는 바람에 신발이 흠뻑 젖기도 했다. 한 여름에 만난 겨울을 아이들은 특히 좋아했다. 아이들이 혹여나 다칠까봐 쫓아 다니며 주의를 주고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사실 나도 신기하고 좋았다. 숙소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두시간 넘게 운전을 해야 했고, 시간 예약을 하지 않아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만 그렇게 기다려서 그런지 더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이들에게는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나또한 너무 신나게 놀아 신발이 다 젖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한 여름에 겨울 파카를 입고 즐거운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신나는 빙하체험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덜컹거리는 설상차 안에서 빙하의 면적이 점점 줄어들어 걱정이라는 가이드의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누구나 다 아는 그런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동안 빙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사뭇 느낌이 달랐다. 더 아쉬웠다고 해야 할까? 내가 즐기는 지금의 자연이 얼마 후에 없어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안타까웠다.
감명깊게 본 다큐멘터리 <북극곰의 눈물>도 생각났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빙하의 면적이 줄어들어 북극곰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팠고 눈물이 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나의 문제로 와닿지는 않았었다. 내가 북극에 사는 것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밴프에서 빙하를 마주하고 가이드의 이야기를 들으니 비단 곰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라는 생각에 자연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서울로 돌아오고 나서도 이날의 가이드 이야기가 자꾸 생각났다. 그리고 뉴스를 통해 기후 위기 (Climate Crisis)라는 말을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다. 위기라는 말이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구가 따뜻해지고, 빙하가 녹고, 섬이 잠기고, 갑작스런 폭우가 쏟아지는 이런 일련의 변화가 단순한 변화가 아닌 위기라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니 경각심이 일기도 했다. 기후 변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기 충분한 말이었다. 이런 용어는 얼마 전 세계에서 일어난 집회를 통해 더욱 부각되기도 했다.
일련의 기후 위기에 대한 전 세계에서 일어난 집회 기사를 읽다가 스웨덴의 16살 소녀인 그레타 툰베리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매주 금요일마다 기후 변화 대책을 촉구하며 스웨덴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뉴욕에서 진행된 UN 기후 정상 회의에서도 그녀는 기후 변화에 대해 소신을 펼치기도 했다. 어린 소녀였지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2018년 12월, UN 기후협약 당사국총회에서 한 말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당신들은 자녀를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모습으로 아이들의 미래를 훔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게도 유효한 말이었다. 내가 무심하게 했던 행동 하나 하나가 아이들의 미래를 갉아 먹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거웠다.
이번 밴프 여행은 여러모로 아쉬웠다.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기에 시간이 짧았다. 지인이 추천해 준 명소를 다 둘러 보지도 못했다. 덕분에 우리는 밴프에 다시 올 명분을 안고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 다음에는 꼭 아내와 함께 밴프에 올 계획이다. 그때는 레이크 루이스 앞에 있는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호사도 누려보고 싶다. 하지만 다음에 올 때 밴프의 모습은 이번 여행에서의 모습과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 가슴이 아팠다. 언제가 될 지 모르겠지만 다시 올 때에도 밴프가 지금의 상태를 유지했으면 좋겠다. 빙하도 덜 녹았으면 좋겠다. 나의 아이들이, 아이들의 아이들이, 그리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까지 오래도록 밴프의 아름다운 자연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까지 밴프를 위해서라도 뭐라도 하고 싶다. 내가 하는 행동이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