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선 다리미의 역사에서 관찰의 힘을 배우다
안녕하세요! 공간에서 웹서비스까지, 어쩌다보니 5년차 기획자가 된 TND입니다.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한 교훈을 얻고자, 제가 사용하면서 감동을 받은 제품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분석하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첫 번째 글에서 살펴볼 제품은 무선 다리미, 그 중에서도 Tefal 사의 Freemove Air 입니다.
TL;DR
사용자가 제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잘 관찰하면, 제품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Rowenta 사는 다림질 행위를 관찰하여 사람들이 대개 7 ~ 15초 정도만 다리미를 사용하며, 다리미를 세워서 두기 어려워한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발견으로부터 사용자가 다리미를 내려놓은 사이에 잠깐 사용할 만큼의 고온으로 가열하는, 내려놓기 편한 고전압의 거치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자연스러운 다림질 행위를 유지하면서 무선으로 고온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 가볍고도 다림질이 잘되는 무선 다리미를 만들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저의 다림질 경력은 사실 길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팀 다리미, 핸디형 스티머, 스타일러를 모두 사용해보았고, 의류 매장에서는 스탠드형 스티머를 사용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선인 다리미가 있다는 사실은 최근에야 한 가전 할인 행사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무선 다리미를 처음 사용하면서 가장 놀란 건, 매우 가볍다는 점이었습니다. 배터리 성능이 아무리 많이 좋아졌다고 해도, 무선으로 열을 내는 제품이 이렇게 가벼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주름을 펴는 성능도 제 기준에서는 충분히 만족스러웠습니다. 린넨 제품도 다릴 수 있고, 바지에 주름도 잡을 수 있는 정도니까요. 전선이 없으니 방향, 거리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 편하고, 이미 다린 부분이 선에 걸려 구겨질 일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다림질할 옷을 정리하는 동안의 잠깐 사이에 다리미가 충전되어, 오래 기다릴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다림질을 계속할 수 있다는 점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다림질에 매우 익숙한 사람이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무선다리미는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가벼우면서도 무선일 수 있는 것일까요? 파나소닉이 미국에서 신청한 무선다리미 특허에서 원리를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무선다리미는 거치대와 다리미로 구성됩니다. 거치대는 전원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다리미에는 히터가 있습니다. 거치대에 다리미를 올려놓으면, 단자를 통해 다리미의 히터에 전기가 공급되어 가열을 시작합니다. 사용자가 원하는 온도에 다다르면 사용자에게 알림이 가고, 사용자가 사용을 시작합니다.
사용자가 다리미를 사용하는 동안 다리미의 온도는 점점 낮아집니다. 그러나 사용자가 다음에 다림질을 할 부분을 펼치는 동안 다리미를 거치대에 내려놓기 때문에, 그 사이에 다시 다리미가 가열되어 어느정도 일정하게 온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무선 다리미 사용법을 2 단계로 정리한 파나소닉의 영상]
즉, 다리미의 본체는 사용 중에 열을 내기 위해 전기를 저장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무선다리미는 무거운 대용량 배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다림질 행위를 이용하여 가볍고 편리한 무선 다리미를 만든 이 해법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하나는 다리미를 잠시 내려놓는 동안 재가열하는 온도 유지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스럽게 내려놓기 편한 거치대의 형태입니다.
다리미를 잠시 내려놓는 동안 재가열을 한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상대적으로 오래되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전기 다리미의 특허를 낸 Henry. W. Seely는 유선 전기 다리미의 특허를 취득한 1882의 이듬해에 무선 다리미의 특허도 취득했습니다. Seely의 무선 다리미는 전기로 가열한 판 위에 다리미를 올려놓아 가열해 사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관련된 기록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당시의 전기 공급 수준을 생각해보았을 때 이런 방식의 무선다리미는 열과 전력 낭비가 심해 상용화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위험한 것은 물론이고요.
한편, 진공청소기를 만드는 Eureka 사에서 1939년에 특허를 낸 무선 전기 다리미는 좀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다리미는 거치대를 직접 가열하지 않고, 거치대를 통해 다리미에 전기를 공급하여 다리미 내부에서 가열을 합니다. 1940년대는 스팀 다리미가 등장하여 대세를 차지하게 된 시대이기도 합니다.
제가 사용한 무선 다리미와 같이 현대적인 접촉 단자를 사용한 무선 다리미는 1980년대 초, 식품 가공 기계를 주로 생산하는 West Bend 사에서 고안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회사는 단자에 접촉하는 방식으로 다리미 등 사용자가 사용하는 분리된 부분에 전기를 제공하는 방식(전기 주전자와 같은)의 특허를 낸 후, 이어서 현대적인 무선 스팀 다리미의 특허를 냅니다.
이전에 다리미를 만든 적이 없어서 그런지, West Bend는 직접 제품을 디자인하지 않고, Cesaroni 라는 산업 디자인 컨설팅 사와의 협력을 통해 무선 다리미 Freestyle을 출시합니다. Freestyle의 디자인은 세련되긴 했지만, 당시 다른 회사들의 다리미 디자인과 비교했을 때 큰 차이점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단지 세워서 꽂을 수 있는 거치대가 있을 뿐입니다.
세워서 꽂는 형태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자료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당시의 일반적인 다리미의 형태를 따른 것일 것 같습니다. 거치대가 없는 일반적인 다리미들은 다림질을 하지 않는 동안 다리미대에 다리미를 놔두었다가 다리미대가 타지 않도록 세워서 보관하는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여담으로, West Bend 사는 결국 다리미 사업을 철수하고, 팝콘 기계 등 기존에 업계 1위를 유지하던 식품 관련 기계에 집중하게 됩니다)
한편, West Bend 사가 고안한 재가열 방식을 발전시켜 보다 자연스러운 다림질 행위에 녹아드는 거치대를 만든 것은 1912년부터 다리미를 만들어온 Rowenta 사입니다.
Freestyle이 나온지 불과 몇 년 후인 1989년에, Rowenta 사는 무선 다리미 신제품을 출시하며 LA Times에 짧은 인터뷰를 싣습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Rowenta 사는 다림질 행위 ironing habits를 조사하여, 사람들이 대개 7 ~ 15초 정도만 다리미를 사용하고, 그 후에는 다림질을 한 옷을 정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또한 Rowenta 사는 사람들이 다림질을 하지 않는 동안 다리미를 세워서 보관하기를 어려워한다는 점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Rowenta 사는 거치대를 약간 기울어진 받침대 형태로 만들어 손목을 꺾지 않고도 다리미를 내려놓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 기사에서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기울어진 거치대는 세워서 보관하는 거치대에 비해서 대충 올려 놓아도 다리미가 미끄러져 내려가 단자 접촉이 쉽다는 이점도 있습니다.
로벤타 사는 높은 전압으로 빠르게 가열하고, 편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기울어진 거치대를 만들어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무선 다리미의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세워서 보관하는 형태가 나오고 있긴 하지만(사용하지 않을 때 보관하는 부피가 작다는 나름의 이점이 있습니다), 구글 트렌드에서 무선 다리미 키워드 상위권에 나오는 파나소닉, 테팔의 무선 다리미는 모두 로벤타 사의 1989년 모델인 MODE2와 같은 방식입니다.
(여담으로, 로벤타 사는 MODE2를 미국에서 출시하기 1년 전인 1988년에 테팔이 소속한 SEB 그룹에 인수됩니다. 그 후 테팔에서 출시한 스티머, 무선 다리미가 기울어진 거치대 방식인 것은 우연일까요?)
현대식 스팀 무선 다리미를 처음 고안해낸 것은 접촉 단자를 이용해 전기를 공급할 기술력을 가진 West Bend였지만, 잠시 접촉하는 동안 빠르게 재가열하는 방식에 맞는 형태의 제품을 만들어낸 것은 다림질 행위를 관찰해온 Rowenta 였습니다.
어쩌면 기울어진 거치대는 기술적으로 대단한 차별점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주 내려놓아 온도를 유지해야 하는 무선 다리미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는 아주 큰 차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차이를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은 사용자의 행위를 면밀하게 관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모두들 아는 이야기이겠지만, 사용자의 행동을 잘 관찰하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선 다리미는 앞으로 어떤 모습이 되어 갈까요? 조심스럽게 예측해보자면, 무선 다리미는 스팀을 포기하고 가벼운 건식 다리미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간단하게 다리미 세계의 지형을 그려보자면, 먼저 크게 건식 다리미와 스팀 다리미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스팀 다리미는 빳빳한 천도 쉽게 다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1940년대 이후 다리미계의 대세를 확고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한편, 건식 다리미는 스팀 구멍이 없이 매끈한 면을 가지고 있어 셔츠를 다리는데 유리하다는 점과 저가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 여전히 일부 시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능이 단순하기 때문에 디자인이 예쁜(그리고 비싼) 건식 다리미가 나오기도 합니다.
스팀 다리미는 형태에 따라 일반형, 핸디형, 스탠드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일반형은 전통적인 다리미의 강점인 ‘칼주름’을 계승하고 있고, 핸디형과 스탠드형은 ‘간편함’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편, 최근 등장한 ‘스타일러’는 의외로 다리미와 경쟁하는 제품은 아닙니다. 네이버 검색어 트렌드에서 스타일러는 겨울에, 다리미는 봄가을에 검색량이 느는 것에서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스타일러는 애초에 주름을 펴는 용도가 아닌 것이지요.
이런 다리미의 지형에서 무선 다리미의 위치는 사실 아직은 애매합니다. ‘칼주름’에서는 유선 스팀다리미를 이기기 어렵고, ‘간편함’에서는 핸디형 스티머를 이기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스팀을 유지하는 이상, 건식 다리미의 ‘저렴함’을 이기기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선 다리미가 노려볼 만한 시장은 저처럼 핸디형 스티머로는 다릴 수 없는 옷을 다려야 하면서, 어머님들처럼 ‘칼주름’까지는 바라지 않는 초보 주부들, 또 젊은 직장인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볍지만 셔츠는 다릴 수 있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오히려 ‘가벼움’을 더 뾰족한 강점으로 삼기 위해 스팀을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사용하는 테팔 프리무브도 스팀을 쓰기 위해 물을 채우면 너무 무거워져버려서, 저는 물을 빼고 분무기를 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스팀을 쓰면 온도가 떨어져 재가열을 해야 하는데, 분무기를 사용하면 물을 뿌리는 사이에 재가열이 되니,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가격도 좀 더 저렴해질 수 있을 것 같고요.
과연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또 어떤 사람이 훌륭한 관찰을 통해 훌륭한 해법을 찾아낼까요? 매일 사용하는 다리미이지만, 이렇게 원리와 역사를 살펴보니 다리미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흥미진진해집니다.
Simosaka et al., CORDLESS IRON, US 9,157,181 B2, filed Oct. 22, 2010, and issued Oct. 13, 2015
OldandInteresting.com, "Early electric irons - Electrical self-heating flat-irons, electric sad-ir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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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How, "How to Iron"
Minnie Bernardino, "Two New Cordless Irons Offer More Flexibility", Los Angeles Times, NOV. 2,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