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 앞에 차곡차곡 책이 잘도 쌓여있다. 그날 이후 집 밖에 전시된 우리의 책들 춥겠다. 남편에게 부동산 공부고 뭐고 다 그만두라고 으름장을 놓고 내던진 책이었는데 내가 아쉽다. 몰래 책 한 권을 꺼내 가방에 숨겨 넣었다. 내가 책을 이토록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휘몰아치는 격정적인 감정과 나를 향해 끝없이 쏟아지는 질문, 그 와중에 힘이 된 것은 책이라니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각을 다른 곳에 집중하니 지낼 만했다. 감정을 전환시킨 첫 경험이었는데 오, 좋았다. 자기계발 폼좀 잡았다 하면 읽어야 하는 팀패리스의 <타이탄의 도구들>. 대단한 사람들의 대단한 이야기가 아닌 당신도 타이탄이 될 수 있다는 응원과 격려가 담겨 있을 줄이야. 우리는 생각보다 뛰어난 사람들이며 무엇보다 혼자가 아니라니. 팀패리스가 우리 남편보다 나았다.
분노를 따라가라는 챕터에 눈길이 머문다. 내가 타이탄이 될 상인가. 분노라면 자신 있지. 나 자신을 위해 적당히 웃어 넘기는 여유나 의식적으로 잊어버리는 지혜는 없지만 원인을 분석하고 파헤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나 자신도 설득하고 상대방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나의 이유를 끝까지 추적하는 것, 내 못난 감정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이자 감정을 처리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사팔팔오, 너지. 그렇게 나에게 계속 따져 묻는다. 그래야 끝난다. 이유를 알아야 끝낼 수 있다. 분노의 끝에는 보통 내가 있고, 그 중심에 엄마와 비어있는 구멍 몇 개 그리고 그걸 건드린 남편. 이미 잘 알고 있는 뻔하고 흔한 그 얘기. 이번에도 정해진 경로를 잘 따라왔지만 왜인지 개운하지가 않다.
매일 집을 나가고 있다. 오후 4시쯤 짐을 챙겨 근처 카페로 가서 저녁 9시까지 책을 읽고 글도 쓰며 알차게 보냈다. 오후에 집을 나가기 전까지는 구석구석 눈에 띄지 않는 집안일을 했다. 찬장에 있는 그릇이나 주방 식기들의 위치를 옮기거나, 옷걸이를 교체하고, 걸려있는 옷들의 순서를 달리하고. 나에 대한, 남편에 대한 불만을 그렇게 해소하려고 했던 걸까. 시간만 나면 뭔가를 계속 바꾸고 있었다.
중요한 건 집에 돌아온 후인데 내 물건을 최대한 이곳저곳에 어질러 놓는다. 옷은 절대 옷걸이에 걸지 않는다. 양말, 노트북 가방 기타 등등의 소지품. 씻으러 들어가면서 화장실 앞에 허물은 필수. 남편이 싫어하는 행동을 골라할 때 올라오는 쾌감이 참 좋다.
아이를 하원시켜 먹이고 씻기고 놀아주는 강제 독박 육아의 시간보다 깨끗이 치워진 집이 다시 망가져 가는 그것을 보기가 더 힘든 사람. 티 내지 않지만 이 남자가 얼마나 짜증이 나는지 나는 다 안다. 그게 나의 위로다.
화는 지나갔다. 미쳐 날뛰던 그것들은 이제 잠잠하다. 내가 너무한가라는 생각도 한 번씩. 하지만 여기에서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물꼬가 트이질 않는다. 내키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