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돈 좀 만져볼 수 있겠다는 칭찬을 들었다. 무려 국어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인간적으로 국어 선생님한테 글칭찬 받았으면 끝이라고 봐야겠다. 커다란 눈망울에 잡티 하나 없는 피부를 자랑하는 그녀가 물었다.
"샘. 책을 많이 읽어요?"
아니다. 전혀 아니다. 전래동화, 위인전집을 제외하고 기억 나는 책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홍정욱의 '7막 7장' 이정도 뿐이다.
책이라. 책은 서른살 고시생이 되고서 읽기 시작했다. 활자를 읽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었고, 전공서의 내용을 독파해 내것으로 만드는 것이 끝이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읽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정독이자 진독, 정말 제대로 읽었다. 간절함에 서문 마저 줄치며 읽었다. 책을 읽는 삶은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시작했고 합격과 함께 끝이 났다. 목표와 필요에 의한 책 읽기가 전부였다. 정확히 밝힌다. 나는 책을 안 좋아했다.
글과는 멀었지만 말하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엄마 말로는 돌부터 못하는 말이 없었다는데 그게 인간 발달 측면에서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말이 빨랐고 말하기도 좋아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집에 와서 이야기하면 엄마가 그렇게 재미있어 했다. 만득이 시리즈와 최불암 시리즈가 유행하던 시절에는 그 웃음보 터지는 이야기가 기억에서 잊히는 것이 아쉬워 손바닥에 적어 다녔다.
당연히 발표 수업도 좋았다. 떨리고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의 흐름을 생각하며 해야 할 말을 미리 만들어두는 과정을 재미있다고 느끼는 사람이었다. 임고생 신분의 마침표를 찍어준 것도 수업시연과 면접 덕분이었다. 수업 시연 1등, 면접 만점 그걸로 부족한 점수를 만회해 합격을 했다. 아무래도 말로 밥벌이를 해야하는 운명이었나 보다.
어느날 세상이 변했다. 다들 책을 읽어댔고 온 세상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이유도 모른채, 목적도 없이 일단 시동을 걸었고, 지나영 교수의 '본질 육아'와 자청의 '역행자'가 첫 연료가 되었다. 완벽한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모성 신화는 정을 맞았고, 내가 원하는 정체성을 찾으려고 삶의 반경을 넓혀 나갔다. 그때, 2022년 가을 뇌에 박하향이 피었다. 깨어나는 느낌이 시원했다. 만으로 2년이 되었다. 루틴은 없다. 규칙적이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꾸준하다.
딱 20분. 스탑워치를 맞추는 것이 시작 의식이다. 시간이 얼마나 빨리 흐르는지, 마치 책이 좋아 환장한 사람처럼 시간에 쫓기듯 책을 읽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 20분이 40분으로 때로는 120분이 되기도 한다. 단 20분 만에 '교양인'으로 신분이 상승하는 그 기분에 취한다. 그렇게 독서의 맛을 알아갔다.
"아 스트레스 받아서 책 봐야겠어!"
눈이 동그래져서는 멀뚱멀뚱 쳐다본다. 스트레스를 받는데 왜 책을 읽느냐고 아이들이 묻는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복잡한 생각을 내려 놓고 생각과 감정에 쉼을 주고 싶을 때 세상에, 책이 떠오른다. 회피 또는 도피일지도. 그 잠깐의 이탈과 머무름이 숨통을 틔워준다. 나와 너, 이야기와 나만 남는 그 고요한 시간이 좋다. 더이상 숙제도 의무감도 아닌 것이 되었다. 읽는 것이 아니다. 만나는 것이다.
말과 글이 번번이 나를 살렸다. 서점도 도서관도 다니지 않던 나에게 말과 글은 살 길을 열어 주었다. '읽는 글'이 산소라면 '쓰는 글'은 이산화탄소쯤. 읽으며 쓰고, 쓰며 읽어야 온전히 호흡한다. 깊이, 그러나 할 수 있는 만큼 들이마시면 길게 내뱉을 수 있을 것 같다. 독서와 글쓰기 뗄레야 뗄수 없다. 말로 채우던 삶을 말하듯 써봐야겠다. 말밖에 없던 삶에 읽으며 깊이를 더해봐야 겠다.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개운한 숨이 되길 바라며 읽고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