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를 고칠 수 있을까?

by 손사쁨

나는 정말 운이 좋다. 2025년 새로운 학교로 이동해 최상위 J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윤샘은 파워J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슈퍼파워 극악무도한 J이다. 모든 업무가 끝나 있다. 미리, 그리고 언제나. 학교에서 교사가 해야 하는 업무 중 시험 문제 출제는 굉장히 까다롭고도 많은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지만 그녀는 그것 마저 제출일 보다 2주 전에 완성하는 사람이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그런데 내가 그녀를 최상위 J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지 그녀의 신속함, J중에 가장 빠른 J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에게는 마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초상류층 같은,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여느 J와는 다른 그녀만의 품격이 있었다.


"나는 내 불안 때문에 이렇게 하는 거고, 샘은 샘 스타일이 있는거지. 다 장단점이 있는겨. 그렇다고 샘이 뭐 빵구내진 않잖아. 제 때 하잖아. 그럼 된거야!"


J로부터 이런 말은 처음이다. 지적하지 않는 J라니. J에게도 단점이 있으며 P 또한 장점이 있다고 말하는 J는 처음이었다. 은근히 위로도 되었다. '그래 나만의 스타일이 있는거지' 하며 어깨가 스윽하고 펴지는 기분이었다. '미리'의 끝을 보여주는 J였지만 함께 교과를 운영하는 것이 편안했다. 그런데 함께 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굉장한 이질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같은 학교에서 같은 학년, 같은 학급, 같은 수업 시수 모든 것이 동일한 조건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우리 두 사람의 시간이 너무나 다르게 흐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24시간 중 그 절반쯤을 사는 것 같은데, 그녀는 마흔 여덟 시간을 사는 사람 같았다.


학기말 조차 바쁘지 않은 사람. 방학식 전에 2학기 평가 계획을 제출하라는 안내에도 그녀는 그걸 너끈히 해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처럼 일만 하는 걸까? 다른 건 하고 싶지 않나? 네이버 뉴스, 인스타 릴스 몇 편 보며 쉬지도 않는건가?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않나보다. 초 단위로, 호흡하듯 일만 하는 사람인가 보다. 이렇게 하면 모든 업무를 기한에 맞춰 진행할 수 있는거구나 싶었지만 나에게는 상상만 해도 답답하고 숨 막히는 방식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녀에게는 안정감을 준다니 사람마다 살아가는 모양새가 이렇게나 다르구나 싶으면서도, 부러웠다. 부러우면 지는건데 처음으로 J가 부러웠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호흡이 벅찰 정도로 바쁜, 그야말로 일을 끊임없이 쳐내야 하는 학기말이다. 한 사람은 편안하게 들이쉬고 내쉬며 돌발상황이 발생해도 차분히 대처하는데 나는 숨이 가쁘다 못해 더이상 호흡을 할 수 없어 쓰러질 것만 같은 레이스를 뛰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더 알차고 풍성하게 쓸 수 있다면 좋을텐데 하는 후회가 일었다. 나도 이 정신 없는 시기를 조금만 더 여유롭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샘은 자기에게 편한 자기의 방식대로 한 것이 전부이다. 나를 재촉한 적도 없고, J의 방식을 설득하지도 P의 단점을 지적하지도 않았다. 불편을 내색하지도, 불안을 전가하지도, 다름을 문제 삼지도 않는다. 오히려 내 방식의 의미를 알아주고 자신과는 다른 장점이 있다고,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해준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겨낸 건 매서운 바람이 아닌 따스한 햇살이었던 것처럼, P의 삶에서 경험한 적 없는 J로부터의 낯선 존중과 수용이 바로 그 햇살 같았다.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어온 '미리'와 '진작'에 꿈쩍 않던 내가 'P여도 괜찮다'는 그 한마디에 미리 해 볼 마음을 가져본다.


분명히 그랬다. 평가계획을 제출하겠다고 약속한 날, 딱 한 시간을 남겨두고서야 비로소 두뇌가 풀가동되기 시작했다. 밤 11시에 발휘되는 이 엄청난 집중력과 쉬지 않고 움직이는 손놀림이 경이로울 지경. 그토록 쓰기 싫었던 평가계획이 술술 작성되기 시작했고, 스무페이지 가까이 되는 문서를 2회 가량 검토한 후 0시 20분 드디어 파일을 전송했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고서야 담당선생님이 파일을 확인했다는 걸 알게 된 이 순간 또 생각한다.


'아씨. 더 천천히 해도 됐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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