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교사의 슬기로운 학교생활

by 손사쁨

방학 숙제가 생겼다. 정확히는 방학 중 숙제. 2학기 평가 계획을 방학 중에 제출하라고 한다. 보통은 2학기가 시작되는 개학 당일에, 그런데 이번에는 방학식 전에, 그나마 여러 선생님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늦춰준 것이 7월 말일. 문제는 방학과 동시에 두 번의 가족 여행이 잡혀 있었고 어린이집 마저 방학인 7월 마지막 주라는 점이다. 7월 31일 아침, 널찍한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켜는 순간 알았다.


'기한 내 제출 불가'


파워P로 살아온 지 40년이 넘었는데, 하 이거 각이 안 나온다. 보통 P는 자신의 산만함을 고려하지 않은 비현실적 계획과 왜인지 모르게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근본 없는 희망감으로 인하여 기한을 넘기곤 하는데 이번 만큼은 시작도 전에 명확하고 또렷하게 느껴진다. '오늘 안에 절대 못함!' 심지어 아이도 온종일 함께다. 방법이 없다. 이럴 때 어설픈 P들은 연락두절, 회피와 뭉개기로 대응하겠지만 이래뵈도 품위와 품격을 갖춘 P인 나는 메신저를 열어 업무담당 선생님께 정중히 쪽지를 보낸다.


"선생님. 3학년 00과 평가계획이요~ 00파트는 00선생님이 방학도 하기 전에 완성하셨는데 제가 아직 00파트를 마무리 못했어요~ 늦어도 월요일까지는 꼭 보낼게요! 기한 못 지켜서 죄송해요 ㅠㅠ"


이토록 양심적인 P라니. 이런 내가 참 좋다. 동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명확히 내 잘못임을 밝히고 핑계나 변명을 하지 않는다. 보통은 업무 진행에 방해가 되지 않을 '진짜 최종' 제출 기한을 여쭤보는데 실시간 대화가 어려운 상황이라 최대한 빠른 일자를 내가 지정해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늦어도 월요일까지'의 월요일이 바로 지금, 8월 4일 13시 4분 현재라는 것.

'아 미치겠네.'


분야를 가리지 않고 가 됐든 제출하라고 하면 대체로 꼴찌. J성향(해야 할 일이 남아 있을 때 불안과 불편감을 느끼며 이로 인해 미리 해놓고 해치워 정서적 안정감을 유지하려는 성향으로 내 생각에는 상황에 대한 통제감이 중요한 분들이다.)의 업무 담당자 중에 내가 꼴찌라는 것을 힘주어 강조해 알려주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들은 모른다. 전혀 타격감이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꼴찌예요?"라고 꼬박꼬박 묻는 이유는 P들만의 한심한 리그 같은 것인데 나보다 더 징한(대범하게 느린) 놈이 있는가가 궁금해서 이다. 이 중에 누가 진짜 탑P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있다. 나보다 '더' 심한 분들이.


나를 압박하는 것은 '꼴등'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순위가 아니다. 나 한 사람으로 인하여 누군가가 멈춰 버리는 것,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선생님이 다음 단계로 진행을 못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업무 담당자만 알고 있는 '진짜 최종 기한'을 공손하고 낮은 자세로 여쭙고 그 기한 만큼은 지키려 노력하며, 말미를 조금 더 얻은 대신 셀프 점검에도 신경을 쓴다. (때로 쪼으면 빨리 낼거라는 얄팍한 생각으로 '진짜 최종 기한'을 알려주지 않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럴 땐 비뚤어지기도 함.) 그 덕분인지 "샘, 샘이 제일 늦게 냈는데 체크 된 건 제일 적어요."라는 말을 (매번은 아니고) 종종 듣는 편.


어쨌든 지금도 이 P교사는 뻘짓을 하는 중이다. 나는 오늘 중에 평가계획을 완성할 수 있을까? 당장 해야할 일이 눈 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만 아는 스탑챌린지 스탑하고 뜬금없이 브런치에 들어와 글쓰기 버튼을 누르는 P의 이 변태같은 심리는 뭘까? 각이 나온다는 거지. 해야 하지만 하기 싫은 두 가지 감정 사이에 그래도 오늘 안에 되긴 될거라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인데 그 계산이 맞을지 틀릴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나는 생각한다.


'오늘까지라고 했으니 자정 전에만 제출하면 되잖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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