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는 말
올 해 개별통신문은 말하듯 쓰고 싶었다. '우리 아무개가 이랬습니다, 저랬습니다' 하지 않고 '누구야, 어쩌고 저쨌지?' 이런식으로 말이다. 부모님께 전하는 글을 대신 읽고 건너 보듯이 말고, '너'에게 직접 하는 말을 쓰고 싶었다.
총 스물 여섯명, 처음 일곱명이 쉽게 써졌다. 수학적으로는 하루 반나절이면 끝나야 했건만 쓰면 끝이 아니라 쓰는 것이 시작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죄로, 같은 말도 아 다르고 어 다르며 좋은 마음도 잘못 표현하면 가시와 독이 될 수 있으니 다시 읽고 다듬기를 반복해야 한다는 걸 깜빡한 그 죄로 방학식 전날 저녁까지 붙잡고 있었다.
소통의 여왕 고은이에게는 불편한 감정이나 거절하는 표현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적었고, 까불이 민우에게는 겉모습과 달리 마음이 여려 걱정이 된다고 했다. 성준이에게는 의사표현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고, 호불호가 뚜렷한 지유에게는 불호의 영역을 쉽게 포기하는 아쉬움을, 상인이에게는 공부에 대한 의지만 갖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힘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했다.
옘병. 요청한 적도 없는 충고와 조언을 쏟아내는 어른병이 도진다. 집에 있는 엄마도 툭치면 줄줄 읊어 줄 단점, 돌려말해 아쉬운 면모, 실은 어른의 기준에서 평가된 고쳐야 할 점들 말이다. 이깟 뻔한 소리나 지껄이고 있는 내가 딱했다. 이게 아닌데, 이러려고 쓰는 글이 아닌데. 마냥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은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있는 그대로 존중받고 싶고, 조건 없이 지지받기를 그 누구보다 바라는게 바로 나다. 어른의 말 속에 있는 나는 고칠점 투성이었다. 단점이라고 판단하는 순간 그것은 진짜가 됐고, 아쉽다는 말 덕분에 온전치 못한 존재가 됐다.
고쳐야 한다는 말을 고쳤다. 아쉽다는 말을 속아냈다. 잘하는 것을 잘하고 있다고 알려주고, 노력하고 있는 너를 내가 보고 있고 알고 있다고. 걱정되는 그것을 너는 해낼 거라고 응원했고, 많은 사람들이 고쳐야 한다고 하는 그것이 오히려 너의 강점이 될거라고 해주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에서 내가 듣고 싶은 말로 바꾸기 시작했다.
까불이 민우에게는 여리고 말랑한 마음씨가 거칠고 사나운 남자 아이들 사이에서 관계를 부드럽게 해주는 윤활유가 될 거라고 했다. 호불호가 뚜렷한 지유에게는 불호가 아닌 '호'의 영역에서 발휘되는 장점에 대한 이야기로, 상인이에게는 실천력이 부족하다는 말 대신 공부에 대한 의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반은 성공한 것이라고 해주었다.
쉬지 않고 떠드는 정안이에게는 비록 귀는 아팠지만 이렇게 상냥하고 다정한 남자가 실은 1등 신랑감이라고 해주었고, 교실 청소 당번이 되었을 때 틱틱대던 유찬이에게는 대청소 시간에 보여준 꼼꼼한 물걸레질에 대한 칭찬의 말을 적었다. 준형이에게는 리더의 역할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었지만 내 아들이 준형이처럼 컸으면 좋겠다는 말로 이미 충분하다는 마음을 표현했고, 도움을 받는 것에 익숙한 혜지에게는 자조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말 대신 혜지 또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꼭 기억하라고 해주었다.
물론 아직 내공이 부족한지 모두에게 이렇게 적지는 못했다. 순간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주원이에게는 왜 감정을 조절해야 하는지 설명했고, 서아에게는 잘 씻으라는 당부를 적지 않을 수 없었다. 가정 환경에서 큰 어려움을 겪는 진이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학교 생활에 무기력한 승범이에게는 걱정되는 마음을 그대로 표현했다.
학교생활통지표가 배부되고 아이들이 어느 정도 공유할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그렇게까지 돌려볼 줄은 몰랐다. 개별통신문은 모두의 통신문이 되었고, 쟤는 네 줄인데 왜 자기는 두 줄이냐는 소소한 클레임은 있었지만 받자마자 뚫어져라 읽는 눈동자에서, 자기의 것을 쉽게 내어주는 아이들에게서 만족감이 느껴졌다. 웃고 질문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안 썼으면 어쩔 뻔 했나 싶었다.
닿는 말.
이름 부르며 말하듯 쓴 이유. 하고 싶은 말에서 듣고 싶은 말로 고친 이유. 닿는 말이 되길 바랐다. 전하는 말 말고 닿고 싶었다. '착'하고 붙든 '쏙'하고 들어가든, '툭'하고 건드려지든 닿는 말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가 정한 방학 숙제에 최선을 다 했다.
나도 받아보고 싶은데 나를 위해 나에 대한 글을 써줄 사람이 없다. 나를 꾸준히 지켜보고 개별통신문이든 행동발달 특기사항이든 기록해 줄 사람이 이제는 없다. 그래서 내가 나에게 한 마디 남겨볼까 싶은데 2학기 반장 재성이에게 썼던 글이 계속 떠오른다.
재성아, 반장 해보니 어떠냐. 쉽지 않지? 이 사람 저 사람 이야기도 들어줘야 하고, 내 방식대로 밀고 나가면 여기저기에서 말 나오고, 때로는 손해도 봐야 하고, 애들이 혼날 거 대신 혼나기도 하고 말이야. 재성이가 이런 기회를 통해 뭘 배우고 느꼈을지 모르지만 선생님이 당부하고 싶은 건, 임원 점수 받았으니 끝이다 생각하지 말고 3학년에 올라가서 다시 도전해 보라는 거야. 왜냐하면 분명히 달라지거든. 더 넓게 생각해야 하고 더 많은 걸 느끼는 자리, 나의 부족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경험이 반복될수록 인간은 성장하고 성숙하거든. 재성이가 계속해서 도전하고 부딪치며 성장하길 응원한다!
누군가 그랬다. 교사는 지가 가르친대로 저부터 그리 살면 된다고. 나의 부족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자리에 나도 매일 선다. 내가 부족하다는 걸 알면서, 부끄러운 순간을 수시로 마주하면서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지만 내가 말한대로 나도 그렇게 성장하고 성숙할 거라 믿으며 계속해서 도전하길. 내가 응원한다.
사진출처: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