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에 진심
퇴직연금 DC형이나 IRP에 가입한 뒤 처음으로 금융앱을 켜는 순간, 우리는 묘한 좌절감을 느낀다.
“이 많은 상품중에... 내가 고르라고?”
화면에는 수십 개도 아닌, 수백 개의 펀드와 ETF 상품 리스트가 펼쳐진다. 자산운용사마다 이름도 낯설고, 수익률 그래프는 복잡하며, 상품명은 마치 암호처럼 보인다.
글로벌멀티에셋인컴증권자투자신탁
TDF 2045
S&P500 인덱스
미국 나스닥100 ETF
채권혼합형
원리금보장형 GIC
이 중 무엇을 골라야 하는지, 어떤 기준으로 선택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근로자는 여기서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한다.
1.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2. 가장 익숙한 ‘예금’을 선택하거나
놀랍게도 이 반응은 투자 지식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뇌가 선택을 처리하는 방식 때문에 나타나는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다.
미국의 심리학자 쉬나 아이엔가(Sheena Lyengar)는 한 식료품점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다. 한쪽 매대에는 24가지 종류의 다양한 잼을 진열했고, 다른 쪽에는 단 6가지의 잼만 진열했다.
그 결과 24가지 잼이 놓인 매대에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구매로 이어진 비율은 6가지 잼을 진열한 매대가 무려 10배 이상 높았다.
사람들은 선택지가 많을수록 더 좋은 결정을 내릴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오히려 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뇌는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피로감과 불안이 동시에 증가한다.
혹시 잘못 고르는 건 아닐까?
더 좋은 게 있었는데 놓치는 건 아닐까?
지금 선택하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 가장 안전한 선택은 ‘선택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를 행동경제학에서는 ‘선택의 역설(The Paradox of Choice)’이라고 부른다.
선택의 역설?
선택사항이 많을수록 더 좋은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선택에 대한 부담으로 결정을 못하거나 선택한 후의 만족도가 낮아지는 현상
굳이 퇴직연금을 예를 들지 않아도 우리 일상생활에서 선택의 역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많은 영화가 가득한 넷플리스를 켜 놓고도 영화 한 편 고르기가 참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24개와 6개의 잼 실험은 퇴직연금 투자 환경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퇴직연금 앱 속 수백 개의 상품 리스트는 겉으로 보기에는 투자자의 선택권을 넓혀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게 만든다.
너무 많이 올랐는데 채권형이 더 안전한 걸까?
여전히 주식형이 수익률이 높지 않을까?
S&P500이랑 나스닥100은 뭐가 다른 거지?
잠깐만 고민해 보려던 마음은 어느새 임계점을 넘어 피로감으로 바뀌고, “나중에 바꾸자.”라는 말과 함께 결정을 미루게 된다. 그리고 결국 대부분은 이렇게 허망한 결론을 내린다.
“그래도 퇴직연금인데 원금은 지켜야지.”
그 순간, 연 2% 수준의 정기예금 상품이 선택된다. 24가지 잼 앞에서 구경만 하다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고 돌아가는 손님처럼 말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퇴직연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현금을 보유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물가는 오르고 자산 가격은 상승하며, 우리가 선택한 2%대 예금의 실질 가치는 점점 감소한다.
즉, 우리는 ‘위험한 투자를 피하기 위해 확정적인 손실을 감수하는 선택’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선택이 손실로 이어진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 근로자에게 수백 개의 투자 상품을 직접 비교하고 선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사실상 무책임한 방치에 가깝다.
선택의 역설을 극복하는 방법은 더 많이 공부해서 더 똑똑한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내가 모든 것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줄이는 것이 더욱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흔히들 투자를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금융상품을 더 많이 공부해서 수많은 상품중에 가장 좋은 상품을 골라야 한다.
하지만 그동안 고객과의 상담을 통해 퇴직연금 자산 관리를 잘하는 사람들은 선택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최소화한 사람이 훨씬 많았다. 그들은 매번 호가창을 보면 어떤 상품이 더 나은지에 대해 지나치게 시간을 쏟지 않는다. 대신 상품을 고르는 방식을 먼저 정해버린다. 즉, “무엇을 살 것인가?”를 고민하기 전에 “어떤 시장의 성장에 올라탈 것인가?”를 먼저 결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미국을 대표하는 주가지수인 S&P 500의 지난 100년간 연평균 수익률은 약 7~10%에 달한다. 물론 단기적으로는 금융위기나 팬데믹 같은 충격으로 수익률이 크게 흔들리는 시기가 존재했지만, 15년 이상 장기 투자 구간에서는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한 사례가 극히 드물었다.
즉, 개별 종목을 맞추는 것은 어려울지 몰라도 미국 경제 전체의 성장에 장기적으로 올라타는 전략은 시간이 지날수록 보상받을 확률이 높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퇴직연금 TDF나 디폴트 옵션 상품은 미국을 포함한 글로벌 주식시장, 특히 미국 비중을 핵심 성장 엔진으로 삼는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퇴직연금에 대한 투자를 고려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떤 기업이 성장할지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성장해 온 시장의 흐름 위에 자동으로 올라타는 구조를 선택하는 것에 가깝다.
퇴직연금 상품 리스트를 보며 막막함을 느낀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투자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인간의 뇌는 원래 복잡한 선택 앞에서 결정을 미루도록 설계되어 있다. 문제는 그 미루는 시간이 당신의 노후 자산을 갉아먹고 있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잼의 맛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입맛에 맞는 단 몇 가지의 선택지를 미리 정해두는 것이다. 복잡함을 이기는 유일한 무기는 어쩌면 단순함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