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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Jun 06. 2021

관계

 우리는 인간人間이다. 인간의 뜻을 한자로 풀어 보자. ‘사람 인’과 ‘사이 간’이다. 한자를 들여다보면 우리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 바로 알 수 있다. ‘사람 사이’ 란 뜻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란 단어 자체에서 우리 인간은 명백히 사회적 존재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조금 더 이야기해 보면 人(사람 인)이란 한자 자체도 두 명의 사람이 서로 기대어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우리를 지칭하는 ‘인간’이라는 단어만 해석을 해 봐도 우리가 왜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는지, 그 속에서 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사회적 존재들의 필연적인 ‘관계’ 맺음에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이러한 사회적 관계 맺음에 있어 긍정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 옛날 현생인류가 출현한 시기를 생각해 보자. 조금만 생각해 봐도 혼자 생활하는 것보다 무리 생활이 나았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혼자 먹고 살 길만 생각해 본다면 무리 생활이 딱히 필요치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양한 위험에 노출됐을 것이고 그러한 위험들 중엔 도저히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위험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생각할 것도 없이 혼자보단 둘 이상의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니 우리는 태고부터 무리를 이룰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모여서 같이 살아가야 조금이나마 더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종을 보존할 수 있다는 사실이 DNA에 각인됐을 것이다.     

 


 의견이 분분하나 짧게 잡아도 근 5만 년 전부터 인간은 그렇게 살아왔다.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에 상응하게 많은 부작용도 발생했다. 크게 본다면 하나 둘 사람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마을이 모여 도시를 이루고, 도시가 모여 국가를 이루고, 서로 다른 국가들이 관계를 맺어 가는 과정 속에 서로 간의 욕망이 꼬이면 몇 천, 몇 만 명 죽이는 전쟁도 불사하는 게 우리 인간이다. 관점을 좁혀 개인들끼리의 다양한 관계 속에서 많은 사회적인 억압과 편견, 선입관 등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부모는 이래야 하고, 자식은 저래야 하며, 친척과는 또 어떻게 지내야 되고, 친구 또는 지인과는 챙겨야 할 것들도 많고, 업무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겐 이러저러한 선을 지켜야 된다는 등…. 한도 끝도 없는 관계 속에 치여 살아간다. 개인으로 살아가기엔 부족한 점과 위험한 부분이 많아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관계를 맺으며 같이 살아가자고 시작한 우리의 삶 속에서 주객이 전도되듯 개인이 관계 속에 함몰되는 경우를 적잖이 접하게 된다.     

 


 부모는 왜 자식에게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삶을 투영하려고 하는 건지, 자식은 왜 스스로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키워주신 은혜를 갚겠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부모에게 자신의 삶 일정 부분을 저당 잡히는 건지, 때론 가까운 친구보다도 못하고 자주 보지도 않아 어색한 친척을 서로 내키지도 않으면서 무슨 책임감에 의한 건지도 모르고 서로를 챙기는 건지, 자기 일이나 열심히 하면 될 것을 뭐 잘난 게 있다고 남의 일에 배 놔라 감 놔라 하는 오지랖을 부리는 건지, 생각해 보면 다 관계 때문이다. 물론 누가 뭐라고 해도 이런 관계 맺음을 통해 인간사회가 굴러간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관계를 맺고 사는 건지 관계에 매여 사는 건지 헷갈릴 때가 많다.     

 


 조금 웃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미의 기준 같은 것도 결국엔 관계에 의해 설명되는 게 아닌가 한다. 세상 잘 생긴 사람이 있다고 하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그가 잘 생긴 거지 이 세상에 혼자 존재한다고 하면 그 누구도 그에게 잘 생겼다고 이야기를 해 줄 수도 없을뿐더러 스스로도 잘 생긴 건지 못 생긴 건지 모를 일이다. 아니 그런 기준 자체를 생각지도 못 할 것이다.     

 


 관계 속에 만들어진 허상을 좇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관계를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인간으로서 존재가치 중에 하나인 관계를 부정할 길은 없다. 다만 관계에 매이지 않고 제대로 된 관계를 맺고 싶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 홀로 서는 개인으로서의 가치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인간은 외로운 존재라는 점을 우린 알고 있다. 다만, 그 외로움이 두렵고 싫어 거부할 뿐이다. 이 역시 관계를 맺고 살아온 부작용 중에 하나다. 평생을 정말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살아가는데 문득 혼자라는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특히 무언 갈 선택하는 순간을 생각해 보자. 주변 많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지만 결국엔 개인이 선택을 해야 하고, 그 결과를 오롯이 짊어 저야 한다. 물론 이때 관계에 의해 주변 사람들이 도와줄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동정 혹은 도움일 뿐이다.     

 


 우리는 너무 관계에 치중한 나머지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정말 무던히도 애를 쓴다. 그러다 보니 누구에게 욕 한 번 먹는 걸 그렇게 두려워하고, 스스로가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배려 또는 관심이라는 관계의 덕목에 지배당한 착한 어린이 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언제나 항상 누군가와 연결되어 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의해 휴대폰을 손에서 놓질 못하고, 필요하다면 먼저 연락하면 될 것을 다른 사람의 연락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면 안타깝기까지 하다.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도체가 아닌 반도체의 삶을 살아갔으면 한다. 전문 분야가 아니기에 정확히는 모르지만 반도체는 필요할 경우에 특정 조건이 충족되면 연결되는 그런 체계일 것이다.     

 


 그렇다. 우리 인간도 도체처럼 항상 연결되어 있으려 하지 말고, 개인으로서 스스로 존재 가치를 먼저 바라보며, 필연적으로 외로운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필요할 경우에만 주도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반도체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관계에 목을 매지 않고 자존감을 바탕으로 혼자 설 수 있는 용기. 혼자 독불장군처럼 살아가라는 게 아니라 외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이 필연적인 외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관계에 목을 매고 관계에 엮이고 고통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다. 외로움을 받아들이고 자존감을 확인할 때 비로소 그 누구와도 자연스러운 관계를, 진정한 관계 맺음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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