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비문학, 문학과 지성사, 2010
“더 활동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질 거라는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현시대를 ‘피로사회’로 그려내고 있다. 저자는 ‘면역학적 시대’란 개념을 등장 시켜 지난 세기와 현시기의 근본적 차이를 설명한다. 공격과 방어, 이질성과 타자성을 향한 배격이 면역학적 시대의 본질이다. 이 세계에서 자아는 타자 안에 있는 무언가를 공격으로 인지하고, 타자를 부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메두사는 최고로 극단화된 면역학적 타자, 메두사는 파멸하지 않고는 바라볼 수조차 없는 근원적인 이질성”이다.
그러나 이젠 새로운 시대라 말한다. 이질성은 ‘차이’라는 말로 긍정되며 타자성은 상투적인 소비주의, 돈벌이로 전락했다 주장한다. 즉, 자아를 상벌로 제한하고 행위에 정당성을 요구하던 부정성의 사회가 소멸되고, 이젠 자아의 모든 선택과 취향을 긍정하는 사회로 변모됐다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피로사회를 또한 ‘긍정성의 과잉’이라는 말로 치환한다.
“폭력은 긍정성에서도 가능하다.” 긍정성과 폭력이 이질적인 단어 조합으로 보인다면, 이미 내가 이 세계에 녹아들었기 때문일까. 저자는 “적과 동지,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 등의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은 공간에서 자행되는, 긍정성의 폭력을 설명하고자 한다.
앞서 저자는 부정성이 소멸된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면역학적 시대란 대척점을 제시했다. 마찬가지로 이번엔 긍정성의 폭력을 그려내기 위해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도구를 추가시키고 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 낸다.”
긍정성의 폭력이 잘 설명된 한 문단이 있어 그대로 가져와 봤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긍정성의 폭력에 노출된 자아는 사색을 잃어버리고, 사색을 잃어버린 인간은 체제를 향한 분노를 상실한다. 이 속에서 끊임없이 자아는 팽창된다. 저자는 이를 ‘도핑’되고 있다 말하며 ‘지배 없는 착취’라 말한다. 마무리하며, 저자는 대안으로 ‘근본적 피로(페터 한트케)’를 제시한다. 성과사회 속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시키고 고립시키는 분열적 피로”라면 근본적 피로란 “접근을 허락하는 피로”다. 난 저자가 대안으로 제시한 피로가, 신뢰 가득한 쉴 수 있는 공동체를 의미하는 거라 이해했다. “접근을 허락하는 피로, 만져지고 또 스스로 만질 수 있는 상태를 실현하는 피로, 그런 피로를 통해 자아는 줄어들고 이는 세계의 증대로 나타난다.”
책을 읽으며 무언가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질투와 고집, 실패했다는 마음으로 점철된 검은 새벽의 덩어리들을 언어로 규정하는 것 같았다. 내 안에 찜찜하게 자리해 있던 응집된 그것들을 비로소 호명하고, 밝은 곳으로 끌어냈다. 직면하고 나니 두려움의 실체가 파악됐는데 예상보다 보잘 것 없어서 난 오히려 두려움의 크기가 작아졌다고 느꼈다.
그러나 한편, 책을 읽는 내내 ‘있는 냄새’를 무시할 수 없었다. 잘 배우고, 단정된, 안락한 곳에서 나는 ‘있는 냄새’를. 프레시안의 ‘한병철 철학이 신자유주의 옹호로 귀결되는 이유’란 사설을 봤다. 이 사설에서는 이 세계에 여전히 실재하는 투쟁들이 한병철의 사회에선 삭제돼 있다 주장한다. 저항, 반란, 투쟁의 삶을 여전히 살아내고 있는 개인들이 있음에도 한병철의 책들은 분노가 상실된 특정 집단(어쩌면 계급)을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주장이 있고, 이런저런 주장들에 대한 반박이 있음에도 이 사회에 대안이 필요하다는 건 명백하다. 25살의 여름은, 달리는 기차에 눈과 귀를 막고 그저 몸을 싣고 싶다는 마음과 달리는 기차의 끝을 짐작하고 대안을 찾아보자는 마음의 갈등으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