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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고 Apr 10. 2020

천하체계, 중국식 사상은 세계에 통할까

<천하체계> 그리고 자오팅양

중국은 세계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세계에 대한 중국의 문화와 사상의 의미를 토론해야만 한다. 중국의 지식체계가 세계적인 지식체계를 세우고 이에 따라서 새로운 세계 보편의 지식을 생산하는데 더 참여하지 못하며 지식생산의 대국이 되지 못한다면, 경제규모가 거대하거나 물질 생산의 대국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소국일 것이다. (...) 분명한 것은 중국이 세계 전체의 문제를 사유해야만 하고 세계를 책임질 때에만 세계에 대해 할 말을 할 수 있으며, 반드시 세계에 관한 사상을 제공할 수 있어야만 중국의 세계관은 첫 번째 공격 대상의 문제가 된다. (p. 11)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다. 1991년 공산주의 수장격이던 소련은 붕괴했고, 중국은 시장경제체제를 받아들인지 오래였다. 더이상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해질 대로 해진 국가간 이념 갈등은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에 고무된 후쿠야마는 그의 책 <역사의 종언>을 통해 이데올로기 갈등의 역사가 종말을 맞이했다고 공표한다. 지긋했던 냉전이 끝난 것이다.


지난했던 이념 갈등이 끝났을지언정, 자유민주주의 대장인 미국에 다시 골칫거리가 생긴다. 시장경제체제를 수용함으로써 자연스레 권위주의체제가 무너질 거라 예견된 중국이 뜻밖에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룬 것이다. 21세기 들어 유럽 국가들과 일본까지 넘어서더니 슬슬 미국을 넘볼 태세에 이르렀다. 미국은 위기감을 느낀다. 2016년 대선 때부터 트럼프는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발언을 입버릇처럼 했고, 집권 후 정부 보고서 곳곳엔 중국을 직접적으로 견제하겠다는 흔적이 묻어났다. 실제로 경쟁은 치열하다. 중국은 일대일로를 통해 제2의 실크로드를 재현하겠다고 나섰고, 미국은 기존의 정책에 인도까지 더한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맞섰다.


지구 곳곳에 뻗은 빨간 돈을 바탕으로 한 중국몽. 그러나 경제만으로 중국이 미국에 맞서는 패권국 지위를 차지하긴 부족하다는 게 정평이다. 만국공통어는 영어고, 보편적 가치로 여겨지는 인권과 그 근간을 이루는 철학은 여전히 서방의 몫이다. 돈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중국 주변에 모여도, 서양식 사고방식과 가치로 무장한 이들이 언제 마음을 돌릴지 예측할 수 없는 법. 돈만이 아니라 사유로도 사람들의 손을 붙들어 놓는 게 중국에 필요했다.




이에 자오팅양은 <천하체계: 21세기 중국의 세계 인식>에서 천하담론으로 중국식 세계질서를 주장하고 나선다. 저자는 오늘날엔 중국식 천하체계가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데 더 적합하다고 말한다. 세계인이 이 아이디어를 수용하려면, 기존의 그것에 대한 비판이 필요한 셈. 그는 국가적 차원에 있어 중국 고유의 넉넉한 마음씨를 내세우고, 무엇이든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서양식 마인드를 비판한다.


원칙적으로 중국 사상은 어떤 '타자'도 거부하려고 하지 않는다. '타자를 거부하지 않는 것'이 중국의 전통 정신이고, 민족주의의 형태야말로 서양의 사유이다. '타산지석'과 같은 부류의 논조가 바로 중국의 사유를 비교적 간단하게 묘사한 것이다. (p.24)


저자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중국의 한족은 굳이 남의 땅을 넘보지 않았다. 둥근 마음씨를 가진 이들은 다른 민족들이 어떤 문화를 갖든지 간에 그것을 존중했고, 교류했다. 한족의 문화를 마냥 강요하지 않고, 타민족들과도 조화를 이룬 것이다.


반면, 서양은 조화보단 약육강식이다. 서양철학의 뿌리 중 하나인 홉스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을 말한다. 자고로 세상사는 싸움의 연속. 이 같은 발상이 태동시킨 세계는 서양으로 하여금 각종 정복을 정당화하고, 전쟁을 합리화하였다. 십자군 전쟁부터 대항해시대, 절대왕정 그리고 두 번의 세계전쟁까지. 적 아니면 친구란 식의 흑백논리를 지금까지 대물림하고 있다. 그리고 서양식 사고방식이 주도하는 오늘날에도 이념 갈등이 사라졌다고 한들, 세계 곳곳엔 물리적 충돌이 여전하다.


자오팅양은 이를 서양식 발상이 국가보다 높은 차원의 시야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서로를 적으로 상정하고 언제든 이익을 위해 돌아설 수도 있다는 대목은 역사적으로 여태까지 국가간에 부실한 신뢰관계를 쌓았을 뿐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견해다.


바로 서양 정치 철학의 시야는 국가라는 사유의 단위를 뛰어넘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세계를 단위로 한 정치 문제를 정확하게 사유할 수 없었고, 세계에서 출발한 정치의 이상을 제공할 수 없었으며, 세계정치에 관한 철학적 근거도 제공할 수 없었다. 서양 철학은 서양의 가치관을 '보편적인 것'으로 믿었지만, 이것도 단지 서양의 지방적인 관념을 세계에 강요하려고 한 것이지 결코 '세계를 세계로 보는' 어떤 이론이 아니었다. (p.34)


법은 사람 사이의 갈등을 중재한다. 이는 법을 세우고, 강제할 수 있는 국가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지만 서양식 세계질서엔 국가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제도나 권력이 부재한다. 혹자는 UN이 그 역할을 하지 않냐고 묻는다. 그러나 저자는 UN은 국가 제도 위에 존재하는 세계 제도와 이를 강제할 수 있는 권력이 존재하지 않기에 협상의 성질을 띤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p. 67). 




그렇다면 중국식 세계질서인 천하체계는 어떠할까.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이 체계는 서양처럼 잠재적 갈등 관계가 아닌 두루두루 잘 지내는 타입이란 점은 앞서 설명했다. 이에 더해 자오팅양은 천하담론이 자신의 가치관을 타인에게 강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발성의 원칙을 따르고, 상대방의 상상력을 존중한다.


이와 같은 질서는 천하체계가 국가적 차원을 다루는 이론이 아니라 세계를 아우르는 이론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서양 중심의 사상들은 한 국가를 중심으로 가지를 뻗쳐 나갔다. 국가는 어떻게 내부를 결속시킬 것인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성벽을 무슨 수로 지켜낼 것인가. 이 같은 개별 국가 중심의 이론은 거시적 차원에서 국가들을 바라보기 어렵게 만들었다. 반면, 천하체계는 국가보다 상위개념인 세계를 말함으로써 이를 가능하게 한다.


사람들은 단지 지리학적 의미에서 세계에 속하고 정치학적 의미에서는 단지 국가에 속할 뿐이다. 따라서 세계는 사람들이 그것을 책임지지 않고 제멋대로 남용하거나 약탈할 수 있는 '공공자원'이 되었다. 어떤 국가에도 속하지 않고 또한 세계에도 속하지 않으며 특히 인민에게도 속하지 않은 세계는 단지 싸워서 빼앗고 손상시킬 수 있는 생존공간일 뿐이다. (p. 156)


국가가 최상위 개념인 철학에선 지구를 두고 국가가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채찍질한다. 그러나 천하담론 하에선 무분별한 오남용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 이유를 개념을 통해 살펴보자. 천하 개념엔 땅, 대중, 제도의 의미가 포함된다. 땅은 모두가 소유하는 공공재산이다. 천하를 헤아릴 땐 구성원들의 마음을 간파해야 한다. 그리고 세계란 규격에 맞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세 가지를 발판으로 한 천하체계 하에 국가는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세계에 발맞춤할 구상을 하고, 불필요한 갈등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해묵은 싸움 논리에 국가를 넘어 천하를 제시함으로써 충돌을 끝낼 해답을 제시한 것이다.




천하이론의 목적은 국가주의가 아닌 세계주의의 어떤 정치를 이해하는 방식을 수립해서 '국제적인 것'으로 잘못 생각되었지만 실제로는 세계적인 문제의 위치를 새롭게 확정하고 게다가 이로부터 세계이론을 핵심으로 삼은 정치이론을 세우는 것이었다. (p. 191)


국가주의가 아닌 세계주의를 외치는 중국의 목소리. 서방이 이론을 다룰 때 '국가'라는 틀 밖으로 나서지 못한다는 지적이 흥미로웠다. 반백년이 넘도록 경찰국가를 자처했던 미국은 서양식 이론을 바탕으로 보편적 가치를 설파하고, 선의의 국가임을 어필해왔다. 그러나 라이벌이던 소련이 무릎을 꿇고, 자유질서를 세계에 구축했음에도 갈등을 종속시키진 못했다. 그새 중국은 몸집을 불렸고, 러시아의 군사력은 탄력을 얻었다. 서양식 질서에 의문을 품는 목소리들이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 위기가 닥쳐다고 한들, 중국의 천하체계가 만인의 설득력을 얻으려면 갈길이 멀어 보인다. 중국이란 이름이 보편적 호감의 축에 들지 못한 게 함정이다. 서구권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을 돌아다닐 때 불쑥 건네지는 니하오란 인사는 중화권에 대한 존경이나 서로가 동등하다는 인식이 담겨있다고 보기엔 미묘한 구석이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이를 잘 보여준다. 중국발 감염병이란 인식이 팽배해지자, 중국인 혹은 비슷하게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표현이 기다렸다는듯 거세졌다. 


한편, 중국의 정치체제가 개인의 투표권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투표하는 날을 위해 수많은 희생을 치른 국가들이 잠자코 비민주주의 국가의 철학을 받아들일지 의문이다. 비싸게 산 옷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법이다. 


이처럼 중국에서 발현된 사상이 세계인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거쳐야 할 험준한 장애물들은 첩첩산중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을 한 번 뒤엎은 중국의 전력이 있기 때문일까.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그것이 무모해보이면서도 종잡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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