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서의 클래식 <에밀>이 말하는 우리 아이 교육법
마냥 아기인 줄만 알았던 30개월 조카가 두런두런 문장을 꾸미는 걸 보면서 나름 고민이 생겼다. 나는 조카에게 어떤 삼촌이어야 할까. 미혼인 데다 양육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기에, 교육철학이라곤 1도 없었다. 그나마 우리 집안에서 독서를 좋아하는 축에 속하니 책 읽는 모습이나 자주 보여줘야겠다 싶었다. 그러니 하루에 한 번은 내게 와서 내가 읽는 책을 읽겠다고 고집이다. 어려운 문장 일색이니 의미 없는 문장을 따라 읽는 것에 불과하지만, 한 가지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아이가 주변인의 영향을 받는구나라고. 내 영향력 역시 한없이 귀여운 조카의 성장에 밑거름이 된다고 생각을 하니, 급작스러웠던 고민은 한껏 부풀고야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읽은 루소의 <에밀>은 내 고민을 구체화해줬다는 점에서 의미 있었다. 본격적으로 그것을 드러내기에 앞서 루소의 앞선 저작인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슬쩍 언급해야겠다. 교육과 관련 있는 책은 아니지만, <에밀>에서 보여준 논리가 군데군데 묻어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선행학습이 필요하다. 그것은 인간이 사회 혹은 집단을 이루면서 잘생긴 사람, 힘 센 사람 등의 구별이 피어나 인간 사이에 불평등이 생겼으며, 원시 미개인의 상황이 인간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이라 주장한다. 쉽게 말해 선하고 자유로운 자연으로의 회귀랄까. <에밀> 곳곳에 이처럼 인간이 불평등하게 처해지는 상황을 비판하고, 이른 사회화에 거리두기를 실시한다. 프랑스혁명의 터를 닦았다고 평가받는 루소 향이 은은히 느껴진다. 투머치는 고통이니 이 정도만 하고 <에밀>에서 보여준 루소의 교육st로 넘어가자.
자신의 의도를 남의 도움 없이 행동으로 옮겼을 때만이, 진정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한 것이 된다. 그런 점에서 최고의 행복은 권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에 있다.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만 하되, 하고 싶은 일만 하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나의 원칙이며 교육에 접목시켜야 할 핵심이다. (p. 68)
<에밀>에서 루소는 인간이란 정념에 지배당하지 않고, 진정한 자유인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정념은 자연 상태의 본질이 왜곡된 상태다. 앞서 언급한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처럼 원시 자연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현재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고 남에게 의존하도록 존재하게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정념에 지배당하지 않고'란, 한 이슈가 있다면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이 바로 자유인이다. 정념에 휘둘리는 사람은 엄밀히 말하면 이성이 없는 상태다.
이러한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루소는 '에밀'이라는 가상의 학생을 설정한다. 에밀은 부유함 + 높은 신분을 자랑하는데, 현재의 우리로선 그것에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는 가정교사로서 유아기-아동기-소년기-청년기-성년기에 있어 에밀의 성장을 도맡는다. 책은 시간 순으로 그것을 보여주지만, 나는 몇몇 내용을 추리고 짬뽕시켜 소개하겠다.
아이의 어린 시절을 낭비하도록 하라. 장차 그것으로 아이는 더 많은 시간을 벌게 될 것이다. (p. 85)
아이의 시간을 낭비하라. 흐느적흐느적 시간을 흘려보내란 말은 아니다. 천천히 제대로 교육을 시키란 뜻이다. 빨리빨리 가르치는 것보다, 하나하나 아이가 직접 경험하게 하고, 시행착오를 겪게 해야 한다. 아이가 가끔씩 천재적인 행위를 하는 것, 한심하게 보이는 행위를 하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저 우연일 가능성이 높다. 루소에게 있어 성장기는 '이성이 잠자고 있는 시기'이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 넉넉한 시간과 함께 아이의 고유한 정신적 성향을 발견하고 이를 발전시켜야 한다. 같은 이유에서 아이가 잘못했을 때, 벌을 주는 것은 옳지 못한 처사다. 이성이 잠자고 있는, 한정된 시야를 가진 아이를 나무라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기에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그 행동이 잘못된 이유를 설명하고, 그를 설득해내야 한다. 아이가 스스로 터득한 것이 명료한 지식이 된다.
인간은 스스로 터득했을 때 가장 명료한 관념을 갖는다. 그래야 그의 이성이 타인의 권위에 종속되지 않는다. 관념을 실질적으로 확장하거나 어떤 기구를 발명하는 데도 그 점이 훨씬 유리하다. 주는 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정신은 무기력에 빠지기 쉽다. 남의 시중을 받기만 하는 사람의 몸이 빨리 쇠약해지는 것처럼. (p.180)
스스로 경험하게 하라. 말보다는 행동으로 가르쳐라. 체험을 통해 얻은 교훈은 잊지 않는다. 딱히 설명은 필요 없을 것 같다.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다면,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보단 친숙한 경험이 되도록 만들라는 것이다. 일례로, 어두움은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인식하기 어렵기 때문에 두렵게 느껴지곤 한다. 나 역시 어렸을 때 자려고 하면 베개솜이 부닥치는 소리에도 놀라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책상 밑에 귀신이 있다는 상상을 곧잘 하곤 했다. 그러나 루소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밤과 관련된 좋은 추억이 있다면 어둠 속에서 들리는 웃음소리도 귀신의 웃음소리가 아니라 그리운 친구들의 웃음소리로 들려(p. 136) 아이가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다. 아이들의 섣부른 불안을 친밀감으로써 잠재우는 것이다.
아이는 고통을 알아야 하고 위험이 무엇인지 겪어봐야 한다. 그런 경험이 아이를 강하게 한다. 작은 경험이 장래의 보다 큰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그럴 때 아이는 같은 위험이라도 좀 더 잘 대응한다. (p. 59)
고통의 역치를 높여라. 인간은 누구나 실패를 겪는다. 누구나 고통을 미리 경험하지 않으면 그때의 충격과 감정적 동요는 한 인간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다. 따라서, 세상에는 풍파가 있다는 것을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이때, 과잉은 경계해야 한다. 조그만 상처에도 혹시 하는 생각이 스치는 게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지나친 호들갑은 아이가 적절히 고통에 대응하기 어렵게 만든다. 어쩌다 엎어져 무릎 까진 것에 지나친 반응으로 두려움을 준다면, 아이는 다음에도 어마어마한 울음보를 터뜨릴 것이다. 그만큼 교육자의 태도가 고통을 가르치는 데 있어 중요하다. 한 번은 누나에게 사슴벌레 키우기 세트를 사주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조카가 벌레를 키우면서 생태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이에 평소 애완용으로 무언가를 들이는 거에 거부감을 자주 느끼던 누나는 키우던 벌레가 죽어 트라우마가 생긴 아이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고 반박했다. 당시엔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지만, 루소에 따르면 교육자의 잘못이다. 이별에 대한 개념을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해 아이에게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다. 유일무이의 진리 중 하나인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적당히 밑밥을 까는 것도 중요하다.
인간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결핍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결핍을 느끼게 하는 욕망 때문이다. (p. 64)
루소는 고통을 행복의 총량을 갉아먹는 범인으로 지목한다. 욕망과 능력 사이에 불균형이 생기면 고통받는다랄까. 이 논리를 우리나라에서 교육에 열 올리는 사람들에게 들이 내밀면 온통 스트레스일 것이다. 잘 키우고 싶은데, 욕망만큼 이뤄지는 게 그리 쉬운가. 그 욕망을 해결하긴 어렵겠지만, 어느 정도 해소해 주는 게 루소의 <에밀>이지 않을까 싶다. 조카에게 어떤 삼촌이 되어야 할까에 대한 정답은 얻지 못했지만, 조카에게 어떤 식으로 대화를 하고, 어떤 행동을 보여줘야 할지에 대한 갈피가 잡히는 느낌이다. 평소라면 생각도 못했을, 예기치 못한 질문이나 상황이 들이닥쳤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할 지점을 남기기도 한다.
한편, <에밀>은 클대로 커버린 나에게도 여러 시사점을 준다. 루소가 말한 이상적인 인간상, 정념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인에 나는 걸맞은 어른일까. 내가 어떤 판단을 내릴 때 나만의 철학 혹은 기준은 있었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줏대 없이 남의 시선에 오락가락하거나 어디서 주워들은 걸 젠체하며 내 것인 양 굴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이를 고려하면, 나는 더 단단해야겠다. 이 책 한 권에도 은근히 휘둘리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에밀>이 18세기에 쓰인 글인 만큼,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나 논란이 될만한 여지도 있다. 지나친 성 역할 고정은 오늘날 기피해야 할 가치다. 관념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 종교를 받아들이냐 마느냐는, 루소만의 논리가 있지만 독자의 판단에 맡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루소가 말했듯이 정념에 지배당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