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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은 Dec 16. 2022

겨울밤

어느 겨울밤이었다. 우리 네 식구는 파주 다락골의 친가로 가는 길이었다. 그 당시 우리에겐 우리 소유의 집도 차량도 없었다. 서울역에서 새마을호를 타고 금촌역에서 내렸을 것이다. 명절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왜 해가 진 후 우리는 할머니 댁으로 향하고 있었던 걸까? 제사가 있었던 걸까? 금촌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할머니 댁과 가까운 정류장에서 내린다. 논과 논 사이의 흙길을 국민학교에 입학했던 내 걸음으로 10분가량 걸으면 할머니 댁에 도착할 수 있다.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과 함께 걸어도 어둡고 인적이 드문 길은 무서울 것이다. 그날의 나는 논길을 걷지 못했다. 엄마와 아빠는 언제부터 싸웠는지 알 수 없지만 금촌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기 전에 마침내 싸움은 절정에 달했다. 높은 언성이 오고 가는 끝에 아빠는 엄마의 뺨을 때렸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엄마의 가방에서 지갑도 빼앗아 갔다. 돈이 없다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아빠를 따라 할머니 댁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나는 엄마를 따라가기로 했다. 당시의 나는 언제나 엄마 편이었다. 소리 지르고 화를 내는 엄마도 무서웠지만 엄마를 때리는 아빠가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나는 동생을 데려가고 싶었다. 아빠 쪽에 서있던 나보다 5살 어린 동생의 손을 꼭 잡고 내 쪽으로 끌었다. 그 순간 차량 한 대가 어디선가 튀어나왔다. 우리 쪽으로 돌진하다가 멈추기 싫다는 바퀴의 비명소리와 함께 동생 앞에서 가까스로 정차했다. 아빠는 얼른 동생을 안았다. 아빠보다 힘이 약했던 나는 동생의 손을 놓쳤다. 엄마와 아빠는 뒤돌아 서로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걸었다.


엄마는 걸으면서 기차역 근처에 아직 문이 열린 상가가 있는지 확인했다. 엄마를 돕고 싶은 마음에 나도 나름 최선을 다해 불빛을 찾았다. 가게 안에 들어갔을 때 난로가 켜져 있었던 것 같다. 가게는 중년의 남성이 지키고 있었다. 엄마는 오른손이었던가 왼손이었던가 약지에 끼고 있던 금 쌍가락지를 빼내어 주인에게 내밀며 도움을 요청했다. 진짜 금이 맞는데 나중에 꼭 찾으러 오겠다며 집으로 돌아갈 차비가 없어 그러니 약간의 현금을 빌려 달라고 했다. 남자는 가게 안에 딸린 방에 있던 여자를 불렀다. 부부 같아 보였다. 엄마는 같은 말을 다시 해야 했다. 여자는 가락지를 어금니로 깨물어보았다. 나는 긴장된 상태로 숨죽이고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다. 어쩌면 중년 부부는 아이를 보며 측은한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따뜻했던 상점을 나와 엄마는 택시를 잡았다. 나는 생각했다. 몸에 금부치 하나 정도는 지니고 살아야겠다고. 그게 삶의 지혜라고. 파주에서 우리가 살고 있던 한남동까지 택시비는 얼마가 나왔을까? 우리가 살던 집은 산동네에 자리 잡고 있었다. 택시가 집 앞까지 올라가 주지 않았다. 아마 나는 택시에서 내려 그 언덕을 걸어 올라왔을 것이다. 집에 도착했을 때 우리 집에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엄마의 남동생, 그러니까 나의 삼촌이 자고 있었다. 여자 친구와 함께. 엄마는 자다 깬 삼촌에게 현금을 꺼내 주며 금반지를 찾아와 달라고 했다. 부탁처럼 보이진 않았다. 삼촌은 왜 우리 집에서 자고 있는 거지?라는 의아함 뒤에는 남동생의 여자 친구 앞에서 엄마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삼촌은 빈 집에서 자다가 이게 뭔 봉변인지. 내가 다 미안했다.


그런데 이 밤이 겨울이 맞을까? 엄마를 따라 밤거리를 헤맸을 때 바람이 차가웠다거나 몸이 떨렸다거나 그런 기억은 나지 않는다.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긴장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겨울이 아니었던 것도 같다. 양말이나 내복을 파는 상점이었다. 난로를 본 것도 같은데 다시 생각해보면 아닌 것도 같다. 금반지를 어금니로 깨물고 난 후 진짜 금이 맞다며 치아 자국을 확인시켜준 사람은 엄마였던 것 같다. 애석하게도 이 글은 오로지 나의 기억만을 의지한 채 적어나가고 있고 나는 나의 기억을 완전히 믿을 수 없다. 어떤 순간순간의 이미지와 대사들만 강렬하게 남아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날 밤 내 마음은 겨울의 한파만큼이나 얼어붙어 있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이런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감성팔이를 하려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니다. 단지 유년시절 나에게 강렬하게 자리 잡은 기억을 꺼내지 않고는 나라는 사람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하겠다. 아직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그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당시의 엄마와 아빠를 이해하고 싶어서 마음속에서 겹겹이 쌓여 썩어가고 있는 기억을 들춰내고 있다.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하고 있다.


한남동 달동네에 살았던 기간은 1년이 조금 넘는다. 국민학교 1학년부터 2학년이 되고 반장선거가 끝난 후 봄이 지나기 전에 나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해야 했다. 1년 동안 살았던 그 집에의 기억이 생각보다 많다. 주로 좋았던 기억보다는 평범하지 않았던 날들에 대한 기억. 당황하거나 불안했던 순간이 많다. 왜 그런 걸까? 자주 생각해본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더 그렇다. 8살 무렵의 아이들은 기억력이 비약적으로 좋아지는 걸까? 오늘은 저녁을 먹으며 다음 달이면 8살이 되는 딸에게 물었다.

“포춘(태명)은 엄마 아빠가 싸웠던 기억이 있어?”

“아니”

“그래? 전에 엄마 아빠가 대화하다가 목소리가 커진 적이 있었거든. 싸운 건 아니었는데 서로 장난으로 내 말이 맞다고 우기다가 목소리가 커졌어. 그때 포춘이가 갑자기 울었어. 그래서 엄마가 놀라서 왜 우는지 물으니까, 엄마 아빠가 싸우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고 했어. 그때 기억 안 나?”

“기억 안 나는데?”


남편은 딸이 엄마를 닮아서 기억력이 좋다고 자주 말하곤 했다. 나도 가끔 딸의 기억력에 놀라는 일들이 있다. 그런 딸의 기억 속에 엄마 아빠가 싸웠던 기억은 없다고 하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아이들 앞에서 남편과 다투지  않으려고 내 나름 애를 썼지만 그 노력이 실패한 경우도 있었는데 말이다. 남편과 아이들을 침실로 보내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지난 주말에도 남편에게 화 나는 일이 있었는데 아직 풀지 못했다. 싸울 수 있는, 아니 대화할 시간이 없다. 아이들 앞에선 싸울 수 없고 아이들을 재우고 나온 남편은 다시 노트북을 켜고 남은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오늘 밤은 눈이 잘 오지 않는 마산에 몇 년 만에 눈이 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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