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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은 Dec 10. 2018

내 전부를 만들어준 사람

나의 사람

큰 목소리로 말해서 상대방의 목소리는 더 작아지게 만드는 사람.
걸음걸이가 조심스럽지 않아 걸을 때마다 구두굽 소리를 크게 내는 사람.
식당에 가면 말투 때문에 직원과 시비가 붙을까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사람.
두 돌이 안 된 아이가 있는 집에 놀러와 화장실에서 담배를 태우는 사람,
그리고는 화장실 청소를 하고, 냉장고 청소를 하고, 화분의 분갈이를 해주는 사람.
나의 엄마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아빠는 새로 분양받은 아파트의 중도금을 벌기 위해 해외 파견근무를 가셨다. 아빠가 없는 집 화장실에서 처음 엄마의 담배를 발견했다. 선반 위에 빼꼼히 나와있던 담배 한 갑. 몇 개비는 비어있었다. 당황스럽고 겁이 났다. 아빠가 없는 사이 엄마가 바람직하지 않은 길로 들어선 느낌이었다. 며칠을 고민하고 지켜보다가 엄마의 답배 갑을 꺼내 또박또박 글자를 적었다.

'알고 있어요. 담배 피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기다렸지만 변한 건 없었다.
딸이 알고 있고,

원하지 않는 건 중요하지 않았나 보다.
담배와 함께 엄마는 화장품 방문판매도 시작했다.

엄마는 미신을 잘 믿고 점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수능을 보고 대학 원서를 쓰기 전에도 엄마는 점집에 다녀왔다. 수능 점수는 기대보다 낮았고 목표했던 대학에 지원하기엔 턱 없이 부족한 점수였다. 그런데 점을 보고 온 엄마는 생각했던 그 과에 지원하라고 했다. 18년을 살면서 처음으로 인생이 달린 결정을 하는데 겨우 점쟁이에 말에 따르라는 말인가?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이지 않았다.

재수를 하고 싶다는 나에게 엄마는 지금 점수로 갈 수 있는 대학에 가도 '여자는' 괜찮다고 했다. 성장하며 부모님이 나보다 남동생을 더 예뻐하고 동생과 나를 차별한다고 생각해서 상처받은 날들이 많았지만, 엄마가 나를 '여자'로 키우고 있다는 생각은 못 했다. 내가 받은 낮은 점수보다 더 실망스러웠다.

점집에 찾아가고 절에 다니던 엄마가 갑자기 교회에 함께 가자고 했다. 엄마의 변덕이 싫고 종교를 갖고 싶지 않아 거절했다. 한동안 일요일 아침이면 예배에 참석하던 엄마가 어느 날은 또 나에게 평일 6시 새벽 기도에 함께 가자고 했다. 이번에는 엄마 혼자 새벽의 외출이 걱정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탤런트 김혜자 선생님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애연가였는데 딸이 엄마의 금연을 위해 새벽 기도를 시작한 뒤 담배를 끊게 되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지만 엄마와 100일 동안 새벽 기도를 다녔다. 엄마가 금연할 수 있게 해달라고 진심으로 빌었다. 믿음이 부족해서 인지 그 기도는 응답받지 못했다. 물론 엄마는 현재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여전히 점을 보러 가고 절에 가신다.
나와 남편의 부적까지 써오신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엄마가 담배 피우는 게 싫었던 걸까? 범죄도 아니고. 기호식품인데. 아빠가 담배를 피웠어도 이렇게까지 싫어했을까? 나도 여자는, 엄마는 이래야 한다는 구시대적인 생각을 했나 보다 나 스스로에게도 실망스럽다.

아빠가 해외 파견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엄마는 화장품 판매를 계속했고 새롭게 피부 마사지샵도 열었다. 엄마의 귀가 시간이 점점 늦어졌고 부모님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부부싸움과 냉전이 반복되었다. 내 방으로 온 엄마는 아빠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고 했다. 그 여자에게 경고의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싶은데 보내도 될지를 물었다. 보내지 말라고 했다. 아빠에게 여자가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지만, 문자를 보낸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 건 없는 것 같았다. 내 의견과 상관없이 엄마는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고, 상대방이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 엄마는 무섭다고 내게 함께 가달라고 했다. 하교 후 교복을 입은 채로 조사받으러 가는 엄마를 따라나섰다.

IMF 때 아빠는 회사에서 퇴직당하셨고 엄마의 마사지샵도 빚만 늘어나고 있었다. 엄마는 내 신용카드와 아빠의 신용카드로 돌려 막기를 했고 카드값은 늘어만 갔다. 엄마는 빚만 쌓이는  마사지샵을 접을 생각이 없었다. 해결책도 없으면서 막연하게 좋아질 거라고만 했다. 내 신용카드의 빚도 다 갚아줄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회사 업무 시간에 엄마는 전화를 해서 다급한 목소리로 돈을 좀 빌려달라고 했다. 내 카드를 담보로 엄마는 그렇게 자주 돈을 가져갔다. 빚은 노동자와는 다르게 쉬는 시간도 없고 잠자는 시간도 없이 매 순간 무섭게 늘어갔다. 따라잡을 수 없었다.

대출금이 많은 집문서를 들고 엄마는 큰고모를 찾아갔다. 이번에도 나를 데리고.
고모와 고모부 앞에서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엄마는 울면서 집문서를 가지고 계시고 대신 돈을 좀 빌려달라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눈물만 흘렸다. 이 상황이 너무 싫었다. 고모는 최근에 빌딩을 새로 지어서 사촌 오빠, 언니에게 주면서 대출을 많이 받았다고 돈을 빌려줄 여유가 없다고 거절했다. 자존심만 상하고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엄마는 누구는 부모에게 빌딩을 받는데, 어떡하겠냐고 이게 내 팔자라고 했다.

그런 엄마가 미웠다. 미우면서도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엄마를 미워하는 내가 배은망덕한 사람인 것 같아 나 자신도 싫었다. 행복했던 시간은 잊고 힘들고 아픈 시간만 기억하는 나의 문제인 건지 고민도 많이 했다.

결혼 전에 나를 임신해서, 부모님의 반대를 무릎 쓰고 나를 낳기 위해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예비 시댁에 들어가 나를 낳은 엄마. 그때 아빠는 군대에 계셨다. 남편도 없이 입덧을 하면서 일주일에 한번 목욕탕 가는 외출을 핑계로 읍내에 나와 짬뽕을 먹었다고 했다. 그렇게 나를 태어나게 해 준 엄마.
부부싸움을 하다가 아빠에게 맞아 고막이 터져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엄마, 그래서 점점 더 목소리가 커지는 엄마. 그렇게 싸우면서도 나와 아빠만 남겨두고 사라지지 않은 엄마. 작은 일에도 크게 기뻐하고 반대로 크게 슬퍼하는 여린 엄마.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데 빚만 늘어나는 엄마가 밉고 가여워서 울었다.

부모에 대한 부정은 자연스럽게 나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우울 속에서 빠져나가려 하면 아빠는 역풍으로 내게 다가왔고 엄마는 나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나의 의지는 힘이 작아서 전진하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뒷걸음치는 날도 있었다.
자식 된 도리를 외면하고 싶은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오늘까지는 노력하자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 잡았다.

집에서 나가 친구들을 만나고 남자친구를 만나면 행복한 것 같았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와 엄마와 한 집에 있으면 걱정과 불안에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우울했다. 무슨 신데렐라 같았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생각했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두려워서 생각하기도 싫은 걸 마주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동의하지 않은 나의 카드빚. 그래서 절대로 내가 갚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갚기로 결심했다. 엄마에게 내 카드를 돌려달라고 했지만 주지 않았다. 결심이 확고했기에 나는 카드 분실신고를 했다. 인정머리 없고 저 밖에 모르는 년이라는 욕을 들었지만 적금을 해지하고 펀드도 해약하고 대출까지 받아 갚았다.

그렇게 한 뼘 성장을 하고 나서인지 포기하고 있던 결혼도 하게 되었는데 부부싸움을 하니까 나도 모르게 엄마를 찾게 된다. 화를 잘 내고 예민하고 모순적인 딸을 있는 그대로 품어주는 엄마. 나도 부족하면서 왜 엄마에게만 성숙한 사람이기를 바라는 걸까. 부모님의 경제력과 부모님의 불화는 나로 인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내 잘못이 아닌 문제로 움츠려 들면 안 된다. 내가 가족들을 화합시킬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 나아지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의지도 있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게 해준 가정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이 필요한 것 같다.



2008년에 처음으로 제주도 여행을 갔다.

우도에서 혼자 바닷바람을 맞으며 멋진 풍경을 보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엄마였다.

꼭 한번 엄마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내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달았다. 좋은 곳에 가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 항상 엄마 생각이 난다.


완벽하지 않은 엄마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런 엄마 그대로를 많이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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