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02- <풍선 없는 소녀 (Girl without Balloon)>
뱅크시는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지만 자신의 신원과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활동하는 작가로, 그래피티 아티스트이자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이다.
그는 전세계 각지의 공공장소에 스텐실 기법으로 그래피티 아트 작품을 제작한다. 공개된 장소의 벽면에 부착 되어있는 표지판, 창문, 근처에 위치된 소화전, 자전거 등 주위에 있는 조건들을 작품 속 요소로 활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작업 스타일은 항상 일관적이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작품을 만들고 그 이후에 자신의 웹사이트에 작품을 공개한다. 그 후에서야 대중들은 해당 작품이 뱅크시의 것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작업 방식으로 인해 생긴 흥미로운 뉴욕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뱅크시는 뉴욕에서 할아버지 배우 한 명을 고용하여 단 몇시간 동안 센트럴파크에 위치한 좌판에서 자신의 오리지널 작품을 팔게 했다. 그것도 단돈 7-8만원대에. 그러나 그 누구도 작품을 사지 않았다. 모두들 그것이 뱅크시의 오리지널 작품일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백억대에 거래되는 작가의 작품이 뉴욕 시장 좌판 한가운데에 단돈 10만원도 되지 않는 가격으로 팔리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는 작품의 가치와 대중이 감동하는 데에는 시스템과 환경의 영향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꼬집은 인상 깊은 일화이다.
다시 돌아가서, 뱅크시는 자신의 정체를 비밀로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주류 문화를 주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연출하고 출연한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 (Exit Through the Gift Shop, 2010)’로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상 후보에 올랐다. 수수께끼와 같이 알 수 없는 존재의 작가는 대중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이자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이러한 베일에 싸인 작가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 얼마 전 한국 땅을 밟았다는 소식이다. 지난 9월부터 11월 5일까지 인천 파라다이스 아트 스페이스에 뱅크시와 키스 해링의 특별 기획 전시가 열렸다. 파라다이스와 세계적인 경매 회사 소더비(Sotheby’s)가 협력하여 만든 전시로, 모든 작품이 경매가 완료되어 소장자가 있는 진품이었다. 참고로, 이러한 이유로 저작권 관련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모든 작품의 사진 촬영은 가능했지만, 영상 촬영은 금지되어 있었다.
이 전시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바로 뱅크시의 유명 작품 중 하나인 <풍선 없는 소녀(Girl without Balloon)> 이다. 이 작품과 관련해서, 2018년 10월 5일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일어난 일을 빼놓을 수 없다. 이날 뱅크시의 작품 <풍선과 소녀(Girl with Balloon)>가 낙찰되자마자 기계음이 울리면서 액자 안에 내장된 기계가 작동해 작품이 절반 가량 파손되었다. 현장에 있던 관객들은 물론, 소더비 관계자들도 사전에 협의 후 진행된 일이 아니었기에 모두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와 관련해서 소더비의 유럽 현대미술 책임자 알렉스 브랑식(Alex Branczik)은 작품이 파쇄된 직후 "우리는 뱅크시당했다(Banksy-ed)"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이 사건이 뱅크시 본인의 계획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전세계의 이목이 다시 한번 집중되었고, 동시에 작품의 가치는 오히려 상승했다. 이와 관련해서 본래 뱅크시는 작품 전체를 파손시킬 계획이었지만, 기계 문제로 절반가량만 파손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절반이 파쇄된 이 작품은 이후 원작자인 뱅크시로부터 <사랑은 쓰레기통에(Love is in the Bin)>라는 제목을 얻었고, 그 후 2021년 <풍선 없는 소녀(Girl without Balloon)>라는 제목으로 다시 한번 변경되었다. 같은 그림이 총 3번의 걸쳐 제목이 변경되었던 것이다.
미술 비평가와 관객들은 저마다 다르게 이 사건을 바라보았다. 예술 작품에 매겨지는 가격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예술의 정의와 가치 평가 과정에 대한 기존 인식을 타파하려 한 선동적인 장난으로 보는 경우도 있었다. 예술시장의 기능과 미술작품의 가치에 대한 열띤 논쟁을 불러온 이 작품은 뱅크시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고, 2021년에 다시 경매에 나와 2년 전보다 18배 이상 높은 가격인 1870파운드(약 304억원)로 낙찰되면서 뱅크시 작품 중 최고가를 기록했다.
뱅크시의 진짜 의도가 무엇이었던, 이러한 행위는 미술 작품에 주어지는 권위를 무너뜨리는 시도로 보인다. 그러나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작품의 절반만 파쇄된 채 액자에 걸린 이 작품은 하나의 상징처럼 굳어졌다. 이슈와 더불어 작품의 가치와 거래가는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았다. 권위를 타파하기 위한 시도였지만, 그 위에 또 다른 권위가 새롭게 세워졌다. 이것이 정말 뱅크시가 의도하고자 한 바였을까?
자본주의가 들어서고 제도화된 미술 시스템 속에서 대중은 어떠한 자세로 작품을 보아야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작업을 통해 늘 미술계에 논쟁을 일으키고 긴장감을 만드는 뱅크시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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