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알 수 없기에 아름다웠던 시기는 20대까지였다. 막 밀레니엄을 통과한 대한민국은 여전히 핑크빛 무드였고 나도 그렇게 안일한 서른 살을 맞았다. 나에게 20대란 서툰 화장과 산더미처럼 쌓이는 싸구려 옷들, 전혀 기억나지 않는 오만가지 스터디와 자꾸 달라지는 신념이었다. 미래가 생각보다 암울할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 건 서른 즈음이었다.
놀랍게도 여성의 평균 결혼 연령이 20대 중반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서른 넘어서까지 결혼하지 않은(못한) 여성이 많지 않았다. 흔하지 않은 소수였던 나는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 10년 내내 엄청난 결혼 행렬을 지켜봐야 했다. 눈만 뜨면 누군가의 결혼식이었다.
소득을 보장받으며 계속 일하는 여성도 너무 적었다. 지금은 남녀 불문 평생 일할 수 있는 직업 자체가 사라졌으니 세대가 바뀌면서 남녀가 평등해질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런 방향으로 평등해지리라곤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때까지 내가 용돈을 받으면서 빈둥거릴 수 있었던 이유도 역설적으로 ‘여자는 결혼하면 그만이니까.’라는 만연한 통념 덕분이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한 뒤 항공사 승무원으로 일하다가 일 년도 채우지 못하고 그만뒀다. 만화잡지 두 군데에서 상을 받고 단편 만화 한두 편을 그리기도 했는데, 어시스트 없이 한 달에 50페이지가 넘는 원화를 그려보겠다는 포부는 미친 발상이었던 것 같다. 결국 만화가의 꿈도 포기하고 카드값이나 갚아볼 요량으로 출판사에 취직했다. 매일 지각하는 바람에 뱃살 사이에 핸드백을 숨기고 몰래 사무실로 기어들어 가던 나날이었다. 자의 반 타의 반 직장을 그만둔 뒤 표지가 너덜너덜해진 데이비드 카슨의 디자인 도록을 들여다보면서 이제 내 경력 같은 건 아무짝에 쓸모없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폐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인생이 한심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동시에 사람이 삼십 년 정도를 살다 보면 그걸 외면하는 방법도 터득하게 된다. 사람의 뇌는 고통을 선택하는 기능이 있어서 가장 심한 고통만 남기고 나머지는 잊는다고 한다.(진짜일까?) 예를 들어 한쪽 손가락이 유리 조각에 베였는데 다른 손가락은 댕강 잘렸다면 유리 조각에 베인 손가락의 고통은 잊을 수 있다는 논리다.
사실 삶이 고통스럽진 않았다. 힘들다고 여겨졌지만, 그건 고통이 아니라 혼란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스스로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고질적인 허리 통증에 시달리도록 야근을 했는데 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의 부모님은 자식의 인간적인 삶에 관심이 없어서 내가 겪고 있던 문제들이 ‘결혼만 하면’ 거짓말처럼 해결될 거라고 했다. 그들은 이기적이었지만 한편 뉴질랜드까지 날아가는 비행기 삯을 내주었다.
그때 왜 뉴질랜드였나 하면, 그곳에 묵을 집이 있었고 당시 영화 <반지의 제왕>이 세계적인 흥행을 거두고 있었다. 나는 인터넷을 뒤져서(뉴질랜드 국립공원 홈페이지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후기도 없었다!) ‘트램핑’이라는 걸 찾아냈다. 트램핑이란 하루 종일 걷다가 산장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이라고 했다. 뉴질랜드에는 아름다운 국립공원이 여럿 있었다. 국립공원 트랙을 걸으려면 사전에 예약해야 하는데 밀포드처럼 유명한 트랙은 최소 6개월에서 1년을 기다려야 했다. 나는 현지에서도 예약이 가능한 아벨태즈먼 트랙을 걷기로 했다. 수려한 해변을 따라 걷다가 적당한 곳에 누워 파도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고 밤에는 별을 보는 여행. 마음이 설렜다. 아무래도 이때가 뉴질랜드 여행을 통틀어 가장 낭만적인 순간이었던 것 같다. 미리 말해두자면 뉴질랜드 트램퍼의 운명은 샌드플라이의 존재를 알기 전과 그 이후로 나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