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책방에서 호사를

손목서가_부산시 영도구 흰여울길 307

by 우바리

2019년 12월 31일,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 부산으로 내려갔다. 바로 집에 가기보다는 바다가 보고 싶어서 조금 부지런히 일찍 내려가 부산역에서 가까운 영도로 향했다.


흰여울문화마을 풍경. Photo: 우승훈
흰여울문화마을 풍경. Photo: 우승훈


바닷가라 바람은 많이 불었지만, 서울의 서늘함에 비하면 마치 훈풍이 부는 듯했다. 오히려 오랜만에 보는 새파란 바다에 눈이 시렸다.


사실 이 짧은 샛길 여행의 행선지는 바다가 아니라 바다 옆 서점. '손목서가'라는, 사연을 모르고 들으면 좀 무서운 이름을 가진 그 서점에는 책과 커피와 글루바인이 있다고 했다. 글루바인이라는 이름은 생소했는데, 검색해봤더니 기본적으로 와인에 과일이나 다른 향신료를 넣어 끓이는 음료로, 영국에서 마셔봤던 뮬드 와인과 비슷한 음료였다. 프랑스에서는 뱅쇼라고 한다는데, 한국에선 뱅쇼란 이름이 가장 많이 알려진 것 같다. 커피는 서울역 KTX 라운지에서 마셨으니 글루바인을 마시고, 나에게 주는 송년 선물로 책을 한 권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정도면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차분하게 마무리하기 아주 좋은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손목서가 앞 야외 좌석. Photo: 우승훈
손목서가 입구. Photo: 우승훈
손목서가 앞서 낮잠을 주무시던 고양이. Photo: 우승훈


서점 앞에서 주무시던 고양이를 좀 보다가 책방에 들어섰다. 공간이 조금은 좁고 사적인 느낌이 들어서 조금 쑥스러웠다. 손목서가가 유진'목' 시인과 '손'문상 화백이 함께 운영하는 서점이라는 설명은 오기 전에 읽고 왔는데, 아마 이날엔 두 분 다 있었던 것 같다. 서점 안에선 끝까지 좀 쑥스러워서 안에 있는 사람들 얼굴은 잘 못 보고 거의 책장이랑 책만 들여다봐서 확신이 들진 않는다.


손목서가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 Photo: 우승훈


가게가 좁을 것 같아서 지하철 남포역 물품보관함에 가방은 넣고 빈손으로 왔는데도 다들 두터운 겨울 외투를 입었다 보니 가게 안에선 아주 조심조심 움직여야 했다. 나란히 책장을 들여다보는 사람들과 조금씩 발을 맞춰가며 각자 하고 싶은 구경을 했다.


손목서가 1층과 2층을 잇는 계단의 쿵 주의 문구. Photo: 우승훈
손목서가 1층과 2층을 잇는 계단. Photo: 우승훈


책장과 음료를 만드는 바가 있는 1층 끝 모서리에 있는 아주 좁고 가파른 계단 통로를 따라가면 앉아서 음료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마침 창가 자리가 나서, 둘 혹은 셋씩 온 사람들에겐 좀 미안했지만 냉큼 자리를 잡고 1층으로 내려가 글루바인을 주문하고 다시 올라와서 창밖 풍경 구경을 했다. 바다가 참 푸르렀고, 이 시간이 아주 호사롭다고 생각했다.


손목서가 2층 창밖 풍경. Photo: 우승훈
손목서가 2층. Photo: 우승훈


몇 분 지나지 않아 흰 장갑을 낀 분이 글루바인을 가지고 올라오셨다. 글루바인뿐 아니라 마치 아마도 글루바인을 끓일 때 넣었던 과일들의 건더기도 같이 예쁘게 담겨 나왔다. 글루바인은 에딘버러의 크리스마스 같은 맛이었다. 무슨 소린지 싶겠지만 글루바인 그러니까 뮬드 와인 하면 맛보다 단 한 번의 겨울을 보냈던 영국의 크리스마스 마켓의 풍경과 분위기가 먼저 떠오른다.


글루바인은 당연히 와인이니까 와인향도 나면서 향신료 향도 나고, 달달하고 따뜻한데, 느낌을 말하자면 에딘버러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면서 뮬드 와인을 홀짝이는 기분처럼 이국적이고 반짝거리면서도 소박하고 따뜻하다.


붉은 글루바인을 마시며 파란 바다 풍경을 보고 있으니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네 싶었다.


손목서가 글루바인. Photo: 우승훈
2015년 영국 에딘버러 크리스마스 마켓. 글루바인은 이런 맛이다. Photo: 우승훈


한해의 마지막 날이라고 막 특별히 2019년을 되돌아보고 그랬던 건 아니지만, 그냥 거기 여유롭게 앉아 글루바인을 홀짝이는 게 좋아서 더 앉아있고 싶었다. 그런데 2층 자리가 다 차서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들을 하나 둘 셋 보고 나니 더 앉아있기가 좀 미안하기도 하고, 이 정도 호사를 누렸음 충분한 선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침 글루바인도 다 마셔서 다시 책들이 있는 1층으로 내려왔다.


이젠 살 책을 한 권 골라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책장을 뜯어봤다. 책이 많지는 않았지만, 식물과 관련된 책도 있었고, 동물과 관련된 책도 있었고, 수학에 관한 책, 문학에 관한 책, 글쓰기에 관한 책, 사진에 대한 책, 그리고 장애나 페미니즘, 진보나 운동에 관한 책들도 있었다. 책뿐 아니라 서점 곳곳에는 이 서점을 만든 사람들의 취향이 뚝뚝 묻어났다. 공간화된, 형상화된 취향을 볼 때면 그저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이렇게 취향을 가지고, 취향으로 내 주변을 채우는 사람이 되어야지. 몇몇 책은 나의 취향에도 딱이라 책 제목을 보면서 감탄했다.


12월 31일의 손목서가. Photo: 우승훈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상 사려고 보니 손에 집히는 책이 없어서 한참 책장을 들여다보다가 매대라고 해야 할지, 책을 세로로 세워서 꽂는 책장이 아니라 눕혀가지고 표지가 보이게 놓는 그 공간에 있던 얇은 책 하나를 골랐다. 가방 없이 빈손으로 왔던 터라 종이가방을 받을까 하다가 외투 주머니가 커서 책이 들어가길래 왼편 허리에 책 한 권 차고 손목서가를 나왔다. 나중에 '아 그 책도 살껄'했던 책이 몇 권 더 있는데, 또 생각나면 그냥 서울에서 사서 볼 생각이다.


흰여울문화마을. Photo: 우승훈
흰여울문화마을. Photo: 우승훈
흰여울문화마을. Photo: 우승훈


서점을 나와 흰여울문화마을을 지나, 영도다리를 건너 남포역으로 돌아와 그 옆 백화점의 옵스 빵집에서 부모님과 나눠먹을 빵을 사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부산역에 도착해서 서점을 다녀온 시간을 따지면 4시간 정도 되는 짧은 여행이었지만, 아주 긴 여행을 갔다 온듯한 만족감과 여운이 느껴졌다.


참 호사로운 2019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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