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로서 인간 그리고 무대로서 세상 - <R&J>, 그리고 <시지프스>
*앞선 글들에서 다뤘던 것처럼 극예술은 관객의 경험, 가치관, 중시하는 요소에 따라 해석을 얼마든지 달리할 수 있으며, 한 역할에 여러 배우가 캐스팅되는 한국 시장의 특성상 실제로 무대에서 본 것이 배우, 회차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 글의 해석에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이는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며, 본인이 느낀 바가 옳다는 전제에서 참고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선정해 다루는 공연들은 그 성공 여부, 완성도와는 별개로 해당 글의 주제와 긴밀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경험과 해석이 매번 바뀔 수 있는 공연예술의 특성상, 집중할 수 있는 좋은 지점이 분명히 있다면 논의의 가치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관람 후 시간이 많이 경과된 작품이 포함되어 있어, 정확하지 않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앞선 글들에서 반복적으로 인용한 바 있는 연극이론가 앙토냉 아르토는 연극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서 완전한 환영이며 현실의 제도와 논리가 무너짐에 따라 발생하는 절대적인 무상성이라 표현한 바 있다. 이런 그의 주장은 다소 극단적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연극에 대한 중요하고도 흔하게 퍼져 있는 인식을 대변한다. 이는 연극이 공연의 종료와 함께 사라지며 이런 일회성과 복제 불가능성이 공연에 본질적이라는 인식이다. 이런 생각이 일반화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생각해 보면, 연극은 하나의 공연이 종료된 후에도 무대와 대본을 남기고, 이를 관람한 관객들을 통해 현실에 영향력을 가질 수 있으며, 출연했던 배우들도 현실을 살아가며 또 다시 무대에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연이 그 어떤 예술과 비교해도 강력한 현장성과 물질성을 가지는 동시에 무상한 것, 즉 각각의 공연은 유일무이하며 고정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큰 이 독특한 매체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연극이 가상적인 세계를 ‘지금 여기’의 현장성을 바탕으로 구현한다는, 어찌 보면 불가능하고 모순적인 것으로 보이는 특성이 이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임을 알 수 있다. 연극의 시공간은 분명 관객과 함께 존재하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완성된 예술작품으로서 존재하기보다는 그 실체를 확실히 할 수 없는 불완전한 환영으로서 상상력을 자극한다. 쉽게 말하자면 연극이라는 활동은 현재에 대한 감각을 크게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관객의 현실과 구분되는 극적 시공간을 구현하는 데 한계를 가지며, 더 나아가 현재는 언제나 과거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현장성이 강조될수록 무상함을 두드러지게 나타낸다.
이처럼 연극이 재현적 목표에 온전히 부합하는 활동으로 설명될 수 없다면, 그것에 고유한 예술적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이번 글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가능한 답변을 찾아보기 위해 연극의 본성으로서 이 ‘무상함’, 그리고 그로 인해 연극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직접적으로 고찰하는 작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작품들은 극중극, 그리고 연기라는 행위를 무대 위에 올림으로써 연극에 특유한 표현 방식들을 조명할 뿐 아니라 연극이 현실에 대해 어떻게 존재함으로써 어떤 효과를 가질 수 있는지를 실험한다. 연극 <R&J>와 뮤지컬 <시지프스>는 각각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을 극중 텍스트로 등장시키고 이를 공연으로 만드는 과정을 주요 행위로 보여준다. 이때 극중 인물들은 ‘배우’로서 정체화된다. <R&J>가 배우로서의 존재를 발전시키고 연기의 재료를 찾는 과정에서 잠재된 성격 및 현실의 억압을 재발견하고 이를 통해 현실의 한계에 가상적으로 저항하는 방법을 찾아가게 된다면, <시지프스>는 처음부터 배우라는 존재를 전제하고 이를 인간 본연의 존재 상태와 관련지을 수 있는 문학적 모티브로 사용한다. 이를 통해 두 작품은 연극이 현실과 가상에 걸쳐 있으며 만들어 내는 무상함을 통해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인간의 존재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조 칼라르코(Joe Calarco)의 연극 <셰익스피어의 R&J>는 엄격한 크리스천 학교의 남학생들이 쉴 틈 없이 진행되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비밀스럽게 <로미오와 줄리엣> 대본을 읽기 시작함에 따라 진행된다. 대본을 읽어 감에 따라 이들의 활동은 낭독과 같은 형태에서 점점 진지한 연기의 모습을 띄며, 예상하지 못했던 감정들의 방출과 함께 학생들을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변화시키게 된다. 이 극에서 두드러지는 특성은 ‘무대 만들기’의 과정이 주된 행동이 되며, 이를 무대에서 보여줌으로써 연기를 하고 연극을 수행한다는 것의 특수성을 관객이 의식적으로 탐구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에서 학생들이 인물들을 연기하는 것은 극중 현실과 일상적 현실의 불일치를 전제하며 시작한다. 학생들은 역할을 하나씩 나누어 가짐으로써 연극을 시작하는데, 한 학생이 여러 인물들을 연기할 뿐 아니라 성별, 나이 등의 설정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으로 인해 배우와 연기하는 인물 사이의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음이 보여진다. 또한 극중 사용되는 소품은 의자와 궤짝, 큰 붉은 천 하나 정도로 한정되기 때문에, 가상적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 연극이 갖는 한계가 분명히 나타난다. 이는 연극적 재현이 유사성이나 현실성, 사실성이 아닌 일종의 제도적 약속을 통해 이루어짐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극중극이 시작됨에 따라 학생들은 천에 손이 베이는 것을 보여주는 등 그것이 칼을 비롯한 다양한 사물로 간주될 수 있음을 합의한다. 이는 무대 위의 사물들이 연극 특유의 완전할 수 없는 환영을 구성하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계기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만들어진 극적 현실은 현실과는 다른 규칙들을 가지며, 이 규칙들에 부합하는지에 따라 현실과는 다른, 말하자면 ‘허구 속 진실’이 성립하게 된다. 학생들이 합의 후 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함에 따라 현실적으로는 어두컴컴할 극중 시공간은 갑자기 밝아지며 이들이 움직일 무대의 전체를 볼 수 있게 한다. 합의에 따라 무대가 구현된 것이다. 그 외에도 극중 상황을 구현하기 위해 앞선 학생이 뭔가를 넘어가는 듯한 행동을 하면 뒤따르는 학생이 따라하는 식으로, 보이지 않는 공간 설정의 약속들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무대를 구성하는 현실로부터 가상적 세계를 구현하는 과정은 임의적인 가정들로만 존재하며 현실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변화된 인식을 발생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 연극을 제작하기 위해 관여된 구체적인 사물들이 환영의 발생을 위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상과 현실의 이중적인 존재를 가지게 되며 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런 특성이 연극이 가질 수 있는 특수한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한다. 학생들이 연기하는 인물 그리고 상황은 외적으로 보았을 때 학생들 자신 그리고 그들의 현실과 일치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연극을 함으로써 대본과 공명하는 구체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은 이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들이 다른 존재를 가장하는 것은 그 존재와의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배우 자신의 존재, 즉 각자의 신체, 경험, 감정을 통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내적 탐구 및 표현을 수반하게 된다. 이런 가능성이 드러남에 따라 대본의 수행은 그들의 일상에 대한 폭로로 변신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약속들을 통해 극중 현실을 구현하는 방식 또한 실재를 보는 새로운, 혹은 일상적으로는 잠재적으로 존재하던 시각을 재발견함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극중 상황과 학생들의 상황이 갖는 유사성에 따라 두 층위가 겹쳐지는 양상은 이런 가능성을 더욱 강조한다. 대표적으로, 학생들이 연극을 진행하는 시간적, 상황적 한계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처해 있는 불안한 상황, 그리고 이들이 짧은 만남 후 헤어져야 한다는 긴박감과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다.
배우 및 현실이 대본의 가상적 세계와 불일치하는 동시에 이와 동질성을 갖고 만나는 지점이 있으며, 이런 이중성으로부터 극중 현실이 구현된다는 것은 현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이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극중 학생들은 스스로 갖고 있던 사상이 그들의 연기에 반영되어 외적으로 드러남에 따라 그것이 얼마나 무비판적이고 폭력적이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예를 들어 연기가 진행됨에 따라 ‘사랑’이라는 소재는 학생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감정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며 진지함을 가지게 된다.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 학생들에게 텍스트 속 사랑은 부끄러운 것 혹은 집단 내에서 자신의 당돌함을 뽐낼 수 있는 소재 정도로 여겨지지만, 점점 감정이 격해짐에 따라 이들은 사랑이 현실의 굴레에 저항할 수 있는 감정임을 발견한다. 각각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기하는 학생들이 결혼식 장면을 연기할 때 다른 학생들은 대본의 역할과 별개로 식의 진행을 방해하고, 처음에는 그저 부끄러움에 따른 장난처럼 시작된 이 행동은 점차 폭력적인 행위로 폭발한다. 이때 동성의 학생들이 사랑의 행위를 표현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극중 로미오와 줄리엣이 처해 있는 상황, 즉 가문의 대립으로 인한 이뤄질 수 없는 관계에 대응되며, 다른 학생들의 폭력은 현실의 억압적 제도 전체로 확장된다. 이때 학생들이 어떻게든 장면을 진행시키려 하며 결국 이를 방해하던 학생들도 이 의지에 감응된다는 점은 가장을 통해 현실을 재인식하고 이로 인한 한계를 가상적으로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장면 외에도 학생들이 무의식적으로 발산하는 폭력성은 반복되는 시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그들의 교육환경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보여짐으로써 현실과의 관계를 명백히 한다. 극은 고통스러울 만큼 정확한 박자와 종소리에 맞춰 발을 구르고 교과서의 내용을 읊는 학생들의 모습으로 시작되며, 극중극에서 인물들이 현실의 벽을 마주할 때 그런 학생들의 활동이 일종의 레퍼런스로 이용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캐퓰릿 경이 자신의 말에 복종하지 않는 줄리엣을 벌하는 장면은 도입 장면에서 학생이 체벌받는 모습을 그대로 따른다. 특히 앞에서는 폭력의 피해자였던 학생이 이후에는 가해자의 위치를 가진다는 점은 현실로부터 습득한 폭력이 어떻게 계승되는지를 보여줄 뿐 아니라, 어떤 존재를 구성하는 경험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반성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 외에도 학생들은 처음 연기를 할 때 여성 인물을 표현할 때 과장되게 골반을 내미는 등 제도적으로 편향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로부터 그들을 구성하는 관습적 한계들이 드러난다. 반면에 이들이 연극을 진행하면서 인물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이에 공명하는 자신의 감정들을 발견함에 따라, 그런 편향된 표현들은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다른 인물, 상황을 연기함으로써 학생들은 그들을 형성하는 관습과 체계를 포함한 존재적 상태를 바라볼 수 있게 되며,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그들을 옭아매며 제한해 온 억압을 극복한다. 이는 연극의 반성적 작용이 사회 변혁적 가치를 가질 가능성을 보여준다. 극이 진행됨에 따라 텍스트 속 행동이 지시하는 금기나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시간적 압박감은 학생들에게 강한 불안을 발생시키고 연극의 진행을 방해한다. 하지만 극을 진행해야 하며 끝까지 가기 전에는 멈출 수 없다는 연극의 엄격함은 현실에 덧씌워진 가상이 가질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불안해하는 학생들을 다시 참여시키기 위해 교과서 앞에 대본을 대는 모습은 현실과 가상의 경쟁관계를 통해 연극이 성립하며 그것이 현실을 비판적으로 넘어서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가리킨다. 이야기가 심화됨에 따라 학생들은 교과서와 교복을 구멍 안으로 던져 넣으며 현실과의 분리를 선언하기도 한다. 한편, 극중극이 비극적 결말로 치달음에 따라 학생들은 비극으로 향하는 대사들을 읊기 주저하는 모습들을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속하는 것은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극단적인 행위와 이를 통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극의 초반에서는 현실 속 편견이나 익숙함이 연기에 방해가 되었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갈등의 구도가 바뀌어 배우들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된다. 익숙함, 규칙들의 보호가 제거된 상태에서 학생들은 더 이상 가짜로 구분될 수 있는 행위를 수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발전된 연극은 거짓된 것이나 현실의 모방으로서 부차적인 위치를 갖는 대신 그 자체로 온전히 믿을 수 있으며 현실을 능가하는 대안적 현실의 성격을 갖게 된다. 이런 발견은 보이는 것 이상의 현실, 즉 비가시적인 요소들이 우리의 이성적이고 일상적인 현실보다 훨씬 거대할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이런 가능성은 분명히 구현되지는 않는다. 이는 연극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며, 그것을 시작하고 진행시킨 전제들이 적용되지 않는 순간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런 연극의 특성은 시계가 울리고 학생들이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에서 확인된다. 아침이 찾아오면 학생들은 지금까지 하던 일들을 버리고 고통스러운 일과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런 연극의 일회성을 전제하는 와중에도 이 작품은 연극의 효과가 그저 무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가능성을 남긴다. 이는 이전처럼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학생 1’ (로미오를 연기한다)의 모습에서 확인된다. 그는 떠나려는 다른 학생들에게 대본을 들이대고 대사를 읊으며 연극을 멈추지 않을 것을 요청하며, 결국 연극이 종료된 후에도 극의 시작에 보여졌던 규칙적인 움직임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한다. 이때 연극이 현실의 습관과 익숙함과 거리를 두는 계기로서 현실 인식에 침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확인된다. 낙오되어 쓰러진 학생 1은 극의 마지막에 다시 무대에 등장해 저항적으로 발을 구르는 친구들을 보며, 자신이 어젯밤 꿈을 꾸었다고 외친다. 이런 결말이 현실에 여전히 남아 있는 연극의 비판적 가능성, 연극을 항상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상성을 의미하는 것일지, 아니면 그 속에서 현실이 무너져 결국 돌아오지 못한 누군가의 환상일지는 공연,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관객에 따라 다양할 것이다. 그리고 비록 공연이 끝나는 순간 사라지는, 헛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의미를 갖는 연극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학생 2의 대사로부터 울림을 남긴다.
“만약 네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이렇게 생각해. 어떤 환상이 보이는 동안 잠들었던 거라고. 그리고 끝을 내지 않았다고 해서 꿈처럼 헛된 일이라고 절망하지는 마.” (<한여름밤의 꿈> 중 퍽의 대사)
이처럼 연극 <R&J>는 연극을 만드는 과정 자체를 연극의 소재로 등장시킴으로써, 그것이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허구를 발생시키고자 할 때에도 오히려 이런 불일치로 인해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 극의 혁명적인 가능성은 연극의 양식, 주제, 혹은 정치적 방향성과 별개로, ‘연기하기’라는 행위 자체에 내재한 것처럼 보인다. 한편, 이 작품은 연극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에 대한 주목을 발생시킴으로써 이런 효과를 강화시킨다. 이는 곧 관객, 관람하는 행위 또한 무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R&J>는 독특한 무대 구조를 가지는데, 이는 무대 위에도 객석 공간이 있어 무대의 4면을 관객이 둘러싸게 될 뿐 아니라 배우들이 객석 사이에 놓인 책상 위에서 움직이는 등 관객의 위치에 따라 다른 관람 경험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구조는 사실적인 환상을 제공하는 전통적인 무대 대신 공연을 하고 이를 지켜보는 행위 자체를 의식하게 하는 특성을 갖는다. 다른 관객의 영향력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객석을 어둡게 만든 전통적 재현 연극과 달리 공연을 보는 관객의 반응이 자기 혹은 서로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무대에 등장하는 학생들도 자신이 연기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주 무대 외곽에서, 관객으로서 이를 지켜보며 반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공연하기와 관련된 다양한 행동과 반응들이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점에서 연극 <R&J>의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한편, 비교적 최근에 연극이 현실에 대해 무상하다는 매체적 특성, 그리고 곧 사라질 인물과 사건을 연기하는 배우의 존재에 대해 논하는 새로운 공연을 보게 되었다. 이는 2024년 초연된 뮤지컬 <시지프스>이다. 이 공연은 모든 것이 무너져 사그라들고,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디스토피아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얼핏 보면 ‘무의미한' 행동의 의미를 찾는 방식으로 연극과 배우라는 개념들을 등장시킨다. 이런 개념들은 대표적인 부조리 철학 작가인 까뮈의 사상과 연결되어, 자신의 이해와 통제를 벗어나는 세계의 부조리에 맞서 살아감으로써 그 자체로 저항성을 가지는 인간 존재와 연결된다. 이에 따라 이 극에서 연극과 배우의 의미를 찾고 그것이 구현되는 방식은 까뮈의 <이방인> 텍스트 및 시지프스 철학을 통한다.
<이방인>의 주인공인 뫼르소는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현실과의 극단적인 괴리감에 처하게 된다. 전쟁, 인종차별이 만연한 시대적 배경, 그리고 산발적인 주변인들의 이야기 사이에서 그저 부유하는 듯한 뫼르소는 분명한 윤리적, 개인적 가치관조차 갖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던 그에게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놀러간 바닷가 별장에서 친구를 위협했던 남자를 총으로 여러 번 쏴 죽인 후 체포된 것이다. 그가 한 번이 아닌 수 차례 총을 발사했다는 점은 그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으며 장례식 다음 날 여자친구와 교류했고, 신을 믿지 않는다는 점과 결합해 그를 반사회적 성향을 가진 인물로 낙인찍으며, 그는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하지만 그는 죽음을 앞둔 뒤에야 자신이 필연적으로 다가올 죽음에 대한 거부로 인해 삶 또한 잃어버렸음을 깨닫고, 자신이 곧 빼앗길 삶을 가장 처절하게 실감하게 된다. 직접적인 사회적 현실에 합리적으로 융합된 인간상과 달리 삶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이를 계기로 삶을 새롭게 바라보는 뫼르소의 모습은 어차피 끝나면 사라질 무대를 위해 불필요한 감정과 존재하지 않는 인물, 사건들의 표현에 자신을 불태우는 배우의 모습과 겹쳐지며, 보다 보편적으로는 부조리한 현실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내재된 가능성을 가리키게 된다. 이런 모습은 어차피 굴러 떨어질 돌을 산 위로 굴러 올리는 ‘시지프스’의 이미지로서 대표되며 극중 구체성을 획득한다. (이런 시지프스의 모습에서 부조리한 현실을 버틸 수 있는 저항성을 찾은 것이 까뮈의 시지프스론이며, 따라서 극중 등장하는 텍스트들은 상당히 일관된다고 볼 수 있다.)
이 극의 방향성을 정리하자면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모티프를 통해 배우의 특성과 가치를 고찰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이 작품은 극중 텍스트인 <이방인>의 재현을 기본으로 하며, 이는 연기를 위한 배우들의 리서치를 연상시키는 장면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런 주제에 어울리게, 극중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언노운, 클라운, 포엣, 그리고 아스트로는 각각 배우의 대표적인 특성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인다. ‘언노운(unknown)’은 극중극에서 주인공 뫼르소를 연기하며, 가상적 인물의 가면을 뒤집어씀으로써 다른 존재로 변모하는 배우의 모습을 대표한다. ‘클라운(clown)’은 ‘진지하지 않음,’ 즉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의 합리적이고 진지한 사유를 벗어날 수 있는 배우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포엣(poet)’과 ‘아스트로(astro)’는 극중 이들의 캐릭터가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아 해석의 한계를 갖긴 하지만, 일상적인 어법을 벗어날 수 있는 연극의 시적 언어나 창조성, 배우의 스타성 등 특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R&J>에서 그랬듯이, 이 배우들은 돌아 가며 서로 다른 인물들을 연기하며 <이방인>의 텍스트를 탐구한다. 특히 인물과 그들 사이의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이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낯선 존재를 이해할 방법을 찾으려 한다. 이를 위해 텍스트 속의 에피소드들을 연기를 통해 경험하고 이에 대한 코멘트를 덧붙이곤 하며, 자기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지며 유형화해보려 하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이를 설명하기 위해 ‘MBTI’를 경유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연기의 과정은 이성적인 이해의 과정 혹은 인물과의 유사성을 벗어날 수 있다. 배우들은 무대를 올릴 때 현실과 가상의 논리적인 유사성에 부합하지 않아도 됨을 직접 말하며, 이는 여성 배우가 남성 캐릭터, 특히 폭력적이고 마초적인 인물을 연기하는 것에서 잘 확인된다. 그 외에도 한 배우가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고, 인간이 아닌 존재를 연기하거나 직접 효과음을 발생시키는 등의 모습들은 연극 속 가상이 지금 여기에서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하도록 한다.
이처럼 뮤지컬 <시지프스>는 삶의 무용함, 그리고 배우와 연극의 무용한 존재라는 주제가 실제로 연기를 하고 무대를 만든다는 테크니컬한 행위로 연결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관객들은 강렬한 태양 이미지, 배우들의 노래와 신체적 리듬을 통해 뫼르소의 감정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그가 대변하는 배우의 존재를 공유하게 된다. 이처럼 공연이 무용함을 형식적 특성으로 갖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는 시각은 상당히 중요하며, 메타적이거나 극중극적 장치를 지니는 작품들 중에서도 이를 직접적으로 다룬 경우는 별로 없다는 점에서 <시지프스>는 상당히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하지만 처음 이런 주제가 상기되었을 때 가지게 되는 기대감이 크다 보니 오히려 아쉬운 점 또한 부각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느낀 가장 큰 문제는 극중 멸망한 세계에 있는 인물, 즉 배우들의 이야기가 극중극 텍스트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R&J>에서 셰익스피어의 텍스트가 학생들의 현실과 직접적으로 중첩되며 그들의 현실을 되돌아보고 저항하는 수단으로서 작용한다면, <시지프스>에서는 배우들이 어떤 역할을 가장한다는 설정만이 보일 뿐, 배우 자신의 전사나 성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는 연극의 존재론을 논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현실과의 관계를 축소시킬 뿐 아니라 배우를 기능적인 수단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주제의식에 반하는 경향을 가진다. 또한 극적인 전달 방식, 즉 배우가 자신과 다른 인물 및 사라질 사건을 체화함으로써 현실에 저항할 가능성을 논하기에 막상 극중극이 구현되는 방식은 비연극적이라는 문제가 두드러진다. 이는 <이방인>이 소설 형식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결과적으로 극중극은 서술적인 측면, 특히 배우가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과정 대신 관객에게 직접 정보 전달을 하는 양상을 갖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극은 그것이 주제로서 내세우는 배우의 존재, 그 무상함과 생명력을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극의 마지막까지 극중극과 극중 상황의 납득 가능한 연결성은 찾기 힘들다. 극중극이 끝난 후 배우들은 무대 위의 모습을 예찬하는, 교훈적인 말을 나열함으로써 극에서 서술적인 수단을 사용했을 때의 한계를 지속시키고 있다. 이처럼 극중극과 극중 현실 사이의 의도적인 주제의식이 있는 것 또한 인물들의 행위를 불분명하게 하며 그 적나라한 의도성으로 인해 불편함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극은 무대 위에서 어떤 세계를 구현하고자 하는 것인지의 ‘행위’가 불분명함에 따라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재현하는 것, 이를 위한 텍스트의 분석, 배우와 무대에 대한 개념적 논의, 그리고 멸망한 세계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투쟁 사이에서 어떤 것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분명히 하지 못하며 이런 표현들 사이의 관계도 유기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관객은 극의 구조가 짜임새 있지 못하다는 인상과, 그것이 어떤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된 대상이라는 불쾌함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부 장면들은 배우에 대한 어떤 내용을 덧붙이기 위한 목적성은 가지지만 극 전체 구조에는 어울리지 않는 위치에 있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Why so serious?”라는 넘버는 도망칠 곳 없는 뫼르소의 상태와 자신들의 유사성을 클라운이 문제제기하는 것으로 시작해 무대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 못할 것은 또 무엇이겠냐는 식의 전개로 흘러간다. 그런데 이 장면은 (그 내용상의 논리는 제쳐 놓고서라도)* 이야기 진행을 한 번 끊은 것 치고는 그 전후에 흐름상 변화가 없이, 이어서 텍스트를 재현하는 것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어색함을 느끼게 한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연극을 ‘진지하지 않음’과 관련짓는 이 표현이, 특히 그 무상함과 저항성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적합하다고 느꼈다. 극이 무용하고 비논리적인 욕망을 대변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실현을 위해 진지함과 엄격함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가능하며, 믿기 어려운 것을 믿게 만드는 연극의 복잡한 관습은 문화적이고 제도적인 역사를 가져 왔고, 그런 점에서 무대는 종교적인 장소, 즉 ‘제단’에도 비유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연극 <R&J>가 현실을 벗어남으로써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활동으로 연극이라는 장치를 등장시키고 있다면, 뮤지컬 <시지프스> 또한 현실에 대한 무상함으로부터 연극의 의의를 찾는다. 하지만 전자가 (그 결말의 해석이 어떻든 간에) 극중극, 그리고 극중 사건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연극의 영향력을 실제로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찾고 있는데 반해 후자에서는 이런 연결성이 보이지 않으며, 배우에 대한 이야기로 극이 시작된 데 반해 막상 <이방인>을 연기하는 방식은 배우의 존재보다는 문학적 텍스트 분석이 주가 된다. 다시 말해, 무대 위의 배우들이 <이방인>을 연기함으로써 그들의 현실과의 관계에서 어떤 변화를 겪게 되는지가 보이지 않으며, 극중극-그리고 그 바깥의 시공간이라는 두 차원이 분명하게 나뉘며 극의 방향성이 모호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극은 배우를 통해 삶을 이야기하는 도입부의 목적의식과 달리 극중극이 진행될수록 텍스트의 재현이라는 목적만이 남아 그 메타적 효과가 상실된다. 텍스트의 재현을 주된 목적으로 가짐에 따라 배우에 대한 주제의식을 관객에게 충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집중력이 떨어짐을 우려해서인지, 작가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방인>의 원작을 변화시키면서까지 배우의 주제를 인위적으로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예를 들어 ‘살라마노 영감’은 원작에서는 배우의 꿈을 가졌다고 언급하긴 하지만 그것을 비중 있게 다루진 않으며, 이 이야기는 그와 개의 관계가 외연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인간 삶의 복잡함을 보여준다는 맥락에서 등장한다. 하지만 이 극에서 살라마노 영감 이야기는 화려했던 배우가 늙어가고 잊히면서 과거를 추억하는 이야기로 변형된다. 배우를 논하기 위해 극중극 텍스트 전체가 철저히 각색한 것도 아닌 상태에서 이런 전개는 오히려 지루함을 느끼게 만들며, 특히 인물과 사건을 입체적이고 시공간적으로 그려내는 무대에서 인위적으로 주제의식이 주입된 장면은 반감을 야기할 뿐이다.
하지만 필자가 느낀 수많은 불만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호의적인 감정을 바탕으로 한다. 극의 무상함을 적극적으로 다룬 작품들로부터 느껴지는 희열이 있다. 누군가는 연극이 어차피 사라질 것, 현실이 아닌 허구이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합리적인 기준에 따른다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렇다면 어차피 죽을 인생, 왜 사냐고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의미에서 <시지프스>를 보면서 내가 느낀 가장 강렬한 순간은 공연의 마지막에서 찾아왔다. 극중극이 끝나고 배우들이 삶과 연극을 찬미하는 장면이 지나며, 세계의 멸망을 알리는 듯한 불길한 효과음이 들려오며 극장은 암전된다. 이 순간이 되어서야 극중 세계와 현실의 연결이 관객에게 체감된다. 다시 말해, 공연의 끝은 극적 세계의 종말을 야기한다. 하지만 관객은 이 공연을 보면서 느낀 모든 것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더불어 무대 위에서 환상을 구현하는 것은 구체적인 현실과 분리할 수 없으면서도 이를 재구성하고 부정함으로써 성립하는 것 같기에 비정상성과 불가능성으로 규정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항상 형언할 수 있는 것 이상이 존재하며 우리는 모두 죽음이라는, 필연적이고도 절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삶과의 궁극적인 모순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연극은 현실과 모순되고 무상한 존재의 실험을 통해 이런 본질적인 갈등을 바라볼 수 있게 하며, 그 비정상성의 도움을 받아 개개인이 갖고 있던 현실의 한계를 마주하거나 심지어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것이 배우와 무대에 대한 매혹, 이로부터 느끼는 생명력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각 무대가 끝날 때마다 관객이 언젠가 끝날 삶에 대한 위로를 받고, 세상이라는 무대의 배우로서 존재를 확고히 해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좀 과한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