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서 진실은 어떻게 구현되는가

뮤지컬 <에밀>, 그리고 <시데레우스>

by 현일


*앞선 글들에서 다뤘던 것처럼 극예술은 관객의 경험, 가치관, 중시하는 요소에 따라 해석을 얼마든지 달리할 수 있으며, 한 역할에 여러 배우가 캐스팅되는 한국 시장의 특성상 실제로 무대에서 본 것이 배우, 회차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 글의 해석에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이는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며, 본인이 느낀 바가 옳다는 전제에서 참고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선정해 다루는 공연들은 그 성공 여부, 완성도와는 별개로 공연이라는 매체를 잘 이용하고 있거나 공연과 긴밀히 관련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느낀 경우가 주가 됩니다. 이 기준에 따라 어떤 공연을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그 해석은 절대적일 수 없으며, 일반적인 해석 혹은 알려진 창작진의 의도와 상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험과 해석이 매번 바뀔 수 있는 공연예술의 특성상, 집중할 수 있는 좋은 지점이 분명히 있다면 논의의 가치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모든 분석문에는 스포일러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양한 시각과 맥락, 이해관계가 뒤섞인 현실에서 진실이란 무엇이며,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진실은 당연히 추구해야 할 가치로 생각되며 객관적인 사실과도 흔히 혼동되지만 모든 사람이 특정한 시각과 경험에 한정되어 세계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진실의 존재를 확신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더 긍정적인 사회 및 개인을 위해 추구해야 할 가치로 여겨진다. 오늘 살펴볼 공연들은 진실의 추구, 그리고 이에 대한 공감을 효과적으로 그려내는 두 편의 창작 뮤지컬들이다. 뮤지컬 <에밀>과 <시데레우스>는 공연이 효과적으로 발생시킬 수 있는 감정적인 공명과 현장감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진실의 가치 및 추구에 직접적으로 공감하도록 하며, 특히 극중 가상의 시공간을 관객의 시공간과 만나도록 한다. 공연예술이 무대를 통해 관객과 만남으로써 보이지 않던 현상에 대한 공감과 경험을 촉발시킬 수 있다는 점은 이 경우 ‘진실’이라는 문제에 대한 고찰로서 드러난다.



1. 뮤지컬 <에밀>: 진실은 무엇이며 인식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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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초연된 뮤지컬 <에밀>은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Émile François Zola, 1840-1902)의 생애 마지막 날을 배경으로,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해 목숨을 위협받던 졸라에게 클로드라는 청년이 찾아오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드레퓌스 사건이란 1894년 프랑스군의 유대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군사기밀 유출 혐의로 유죄 선고됨에 따라 촉발된 프랑스의 사회적 분쟁을 가리킨다. 드레퓌스는 자신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주장했으며 실제로 이에 부합하는 증거도 발견되었으나 적절한 처분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에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해 그의 무죄를 주장함에 따라 격렬한 분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특히 드레퓌스에 대한 부당한 처벌은 보불전쟁 패배 이후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나타난 군국주의, 반유대주의, 애국주의의 여파로 인한 편향된 선고로 평가된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사회를 소위 ‘드레퓌스파’와 ‘반 드레퓌스파’로 갈라 놓는 계기가 되었으며, 졸라의 고발은 그가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는 보수주의자들의 살해 위협에 시달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졸라는 결국 영국으로 망명했으며, 1898년, 드레퓌스의 재심 진행이 결정됨에 따라 프랑스로 돌아오지만 얼마 후 자택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하게 된다. 훗날 한 굴뚝 청소부가 누군가의 지시로 굴뚝을 막아 놓았다고 자백함으로써 그의 죽음이 타살일 가능성을 드러낸다. 사망 직전의 밤에서 새벽 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뮤지컬 <에밀>은 이처럼 진실을 주장함으로써 모든 것을 잃을 상황에 처한 한 인물의 인간적인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는 희망적인 시점에서 전개된다.

이에 부합하게 뮤지컬 <에밀>은 진실이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공연은 진실과 관련된 질문 및 논의의 나열로 구성되어 있으며 등장인물의 행위 또한 이런 질문의 반복으로 규정될 수 있다. 본 글에서는 뮤지컬 <에밀>에서 ‘진실’이라는 보이지 않는 개념이 어떻게 감각 가능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춰 이 작품을 살펴보고자 하며, 그것이 관객에게 어떤 의미와 영향을 가지도록 구현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해보고자 한다.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극중에 드레퓌스의 무죄 선고라는, 분명한 진실의 지표 내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극중 주된 행위를 구성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에밀>은 특정한 진실을 드러내려는 졸라의 행위에 주목하는 대신, 클로드라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켜 ‘진실을 추구하는 삶’에 대한 고찰을 전달하며, 극 마지막에 비로소 성취되는 드레퓌스의 무죄 선고는 인물의 목소리로만 표현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진실의 성격, 그리고 그것에 우리가 동참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메시지로서 극을 경험하게 된다.




<에밀>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졸라의 고발을 담은 넘버로 시작되어, 그로부터 4년 후를 주된 배경으로 한다. 늦은 밤, 의자에 앉아 악몽을 꾸듯 뒤척이던 에밀 졸라에게 클로드라는 이름의 청년이 찾아온다. 그는 폴 세잔*의 그림을 배달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 목적을 수행한 후 돌아가는 대신 졸라와 밤을 함께 보내는데, 호의적으로 느껴졌던 초반의 모습과 달리 점차 졸라의 글과 선언, 그리고 정치적인 목적에 대한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한다. 때로는 순수한 질문을, 때로는 유혹과 취조를 연상시키는 이런 과정들은 질문과 논의의 나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유기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클로드의 중심 행위를 ‘질문하기’로 생각한다면 극은 안정적인 구조를 가지게 된다. 극중 밝혀지는 바에 따르면 클로드는 반 드레퓌스파의 영향 하에 있으며 드레퓌스의 재심을 위한 졸라의 원고를 훔치러 찾아온 것이지만, 파리 빈민굴에서의 불우했던 유년기와 작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 그리고 소외된 자들을 바라보는 졸라의 글에 대한 존중 또한 가지고 있다. 따라서 클로드는 현실의 영향으로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을 드레퓌스에 대한 분노로 왜곡시키고 있으며 진실을 의심하고 부정해야 하는 상황에 있으면서도, 졸라가 보여준 진실을 믿고자 하는 마음 또한 가지고 있다. 이런 클로드의 혼란을 꿰뚫어 본 졸라는 극의 후반에서 클로드에게 왜 자신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함께 밤을 보낸 것인지에 대해 묻는다. 이 질문, 즉 진실에 대한 의심 및 그에 대한 응답에 이 극을 이해하는 핵심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관객은 클로드의 질문에 따라 진실의 의미와 가능성에 대해 의심하고, 설득당하고, 최종적으로는 연대하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화가 폴 세잔과 에밀 졸라는 유년기부터 친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들은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드러난 정치적 견해 차이로 갈라지게 된다.


극중 클로드의 질문들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며 발전되는데, 이 연속성의 중심에는 진실에 대한 상이한 이해 사이의 충돌이 존재한다. 도입부의 질문은 졸라의 소설 속 소재들이나 인물들이 그의 직접적인 경험으로부터 오는 것인지를 묻는다. 그는 소설 속, 무관심과 가난에 좌절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화가와 세잔을 동일시하며 이런 삶과의 직접적인 영향관계로부터 작가의 책임감을 찾는다. 이에 대해 졸라는 작가로서 삶을 관찰하고 이로부터 진실을 찾는 것은 맞지만 그것들이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경험 자체는 아니며, 독자의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부분에 대한 책임이 그에게는 없다고 말한다. 다음 질문은 두 인물이 술을 마시며 진실게임을 할 때 나타난다. 이때 클로드는 졸라에게 자신의 평안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신념을 부인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들을 하며, 이에 대해 졸라가 대답을 거부하는 것은 오히려 그에게 그런 충동이 존재함을 증명한다. 이어지는 넘버인 “빠담빠담”에서 클로드는 졸라가 술에 취한 것을 기회로 쾌적하고 즐거운 삶에 대한 그의 욕구를 불러내며, 이는 졸라 자신의 도덕적인 혐의, 즉 불륜의 혐의를 제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런 질문들이 갖는 공통적인 특성은 개인의 삶, 윤리적 상태, 혹은 이해관계와 별도로 존재할 수 있는 진실은 없으며 졸라의 주장들은 그의 존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때 인간으로서 졸라가 갖는 흠결들은 드레퓌스에 대한 그의 주장이 갖는 견고함을 깎아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질문들 및 그것이 나타내는 진실에 대한 이해에 맞서 졸라는 자신만의 변론을 제기한다. 그는 세잔의 그림에 담긴 진실성을 설명하며 그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친분과 분리시키고, 추구하는 진실에 반하는 충동이 존재할지라도 그것을 발언하기를 거부하는 것도 진실을 추구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자신의 도덕적 혐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작가의 역할은 이와 별개로 존재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작가는 세계의 부조리를 그 누구보다 직접적으로 느끼면서도 이로부터 거리를 두고 냉철히 기록할 수 있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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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이런 졸라의 주장들이 무대에서 보여지는 감각적인 연출과 결부되어 관객에게 지각됨으로써 말이나 표면적인 사실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관객을 설득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인물들의 대화와 더불어 감각적으로 구현되는 진실의 주제는 이 공연이 ‘빛’을 사용하고 있는 방식을 통해 관객에게 다가온다. 단순하게 보았을 때 진실에 대한 추구는 빛, 그것을 저지하려는 심리적 기제는 어둠을 통해 그려진다. 대표적으로 클로드가 세잔에 대한 의혹을 제기함으로써 작가로서 졸라가 가질 수 있는 이해관계나 개인적인 입장을 문제시할 때 극중 공간은 정전이 되며, 클로드는 드레퓌스 재심을 위한 원고를 찾아 훔치려 할 때, 즉 진실을 은폐하려는 움직임에 동조할 때 켜 둔 촛불들을 하나씩, 시간을 들여 끈다. 반면에 졸라가 세잔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변함없는 진실의 추구에 대해 주장한 후에는 빛이 다시 들어오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세잔의 그림이 추구하는 진실에 대해 설명할 때, 그리고 생 빅투아르의 추억을 회상할 때 무대 위는 색감이 가득한 세잔의 그림 이미지로 가득 차고, 객석까지 조명이 비춰지며 극장 전체를 빛으로 채운다. (이처럼 객석까지 밝게 표현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런 표현들은 진실을 주장한 대가로 어둠에 휩싸여 숨어 있는 졸라의 상태와 대비되는, 진실된 졸라의 마음을 대변한다. 더 나아가 빛과 어둠의 주제는 극중 시간과 연결된다. 졸라를 침묵하게 하려는 당시의 상황은 극중 시간이 늦은 밤에서 새벽이라는 점으로부터 보여진다. 따라서 진실이 지금 당장은 침묵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행진하여 드러날 것이라는 극 전체의 문제의식은 긴 밤이 지나고 뜰 태양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모호한 진실의 개념과 존재는 빛이라는 보편적인 형태로 관객에게 자리잡게 되고, 조명 및 영상을 통해 그 진실의 찬란한 형상을 본 관객들은 무대에 집중함으로써 인물들이 추구하는 진실에 동조하게 된다. 이런 연출은 극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무대라는 공간에서 인물의 행위 및 사건과 긴밀히 결부되어 전달되는 극예술, 드라마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이 극이 진실이라는 주제를 소통시키려는 목적을 가진다는 점은 진실의 주창자인 졸라가 무대 위에서 사망하고, 결국 빈 무대로 공연을 마무리한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극은 진실을 졸라라는 구체적인 인물의 형상으로 그려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관객의 내면에서 완성된다. 드레퓌스의 무죄 선고라는 목표의 수행으로 끝나는 대신, 극은 최종적으로 빈 무대, 진실이 행진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목소리, 졸라를 계승한 클로드(사실, 모자를 쓴 이 형상은 그 누구도 될 수 있을 것이다)가 걸어 나간 길, 그리고 진실을 추구하며 졸자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칠판으로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렇게 진실은 그것을 주장하고 밀어붙이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게 될지라도, 지금 당장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서 주장된다. 이런 진실은 졸라가 극중 거듭 주장했던 것처럼, 개인의 인식적인 한계나 욕망, 그리고 표면적으로 감각되는 현상을 넘어 존재하는 개념이 된다.

따라서 <에밀>은 질문으로 시작되고 진행되어 관객에게까지 전달되는, 완결되지 않은 행동을 발생시키는 극이라고 볼 수 있다. 진실을 향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이런 성장의 방향은 극중 ‘작가가 되는 것’의 의미로서 표현된다. 클로드가 떠나기 전, 그에게 졸라는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것 때문이 아닌지 묻는다. 그리고 그에게 작가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진실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 그리고 변하지 않는 궁극적인 진실을 보여줄 수 있도록 가장 민감하게 느끼고 또 가장 냉철하게 이를 적어낸다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 극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진실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끝까지 주장할 수 있도록 하는 어느 상태로서 작가라 지칭되며, 작가이자 작가가 되고자 하는 두 인물들의 동질성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클로드의 주된 동기, 즉 진실에 대한 질문은 곧 작가로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물의 이해 및 성장으로 연결된다. 비록 진실을 숨기는 현실의 한계로 인해 진실을 적대시한 바 있지만 졸라와의 만남을 계기로 성장하고 그를 계승하게 된 클로드는 진실이 행진한다는 지향에 대한 증거 자체가 된다. 특히 작가라는 설정은 졸라의 과거와 저작들, 클로드의 과거와 미래의 희망, 그리고 그 이후로도 존재할 수많은 현실의 작가들의 움직임을 연결하며 진실에 대한 보편적이면서도 감각적인 형상을 구축할 수 있도록 한다.




뮤지컬 <에밀>에서 무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은 진실의 형태를 확인하는 방법이 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현실에도 진실의 흔적은 도처에 있을 것이나, 무대에서와 같이 빛과 어둠, 말의 구성과 전개에 집중해 이로부터 진실이라는 하나의 형상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경험은 실제로 에밀 졸라라는 인물이 극예술에 부여한 가치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졸라는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주창자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자연주의 연극의 시발점으로서 무대가 곧 현실의 모델로서 진실에 기여하길 바라는 연극 이해를 낳았다. 그는 연극이 인간과 본성, 그리고 삶에 대한 탐구를 수행할 수 있는 장소가 될 것을 주장했으며 이를 위해 무대 위의 현실을 세밀하게 구현할 것을 추구했다. 이런 그의 주장은 연극에서 예술을 감추고 (즉 그 매체를 투명하게 하고) 자연 그 자체가 될 것을 주장한 드니 디드로의 미학적 리얼리즘에 근거한 것이다. 이들에게는 연극의 관습적인 규칙들이나 작가의 개성보다 진실 그 자체가 중요했다. 특히 졸라는 극작가란 개인적 상상력을 배제하고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며 현실의 단면을 과학적으로 관찰해 있는 그대로 무대에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런 실존인물에 바탕을 둔 뮤지컬을 올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이 작품이 졸라의 발자취와 충돌하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그도 그럴 것이, 졸라는 자연주의 연극을 발전시켰으며 그 표현 방식이나 형식에 있어 절대 사실적이라 할 수 없는 뮤지컬 장르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도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뮤지컬 <에밀>은 무대의 다양한 표현 요소들 및 음악을 통해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방법을 통해서도 진실의 경험을 추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접근방식은 졸라가 실제로 기획한 연극과는 다르겠지만, 개인적인 시선이나 창작자의 존재에 따라 변하지 않는 진실에 대한 믿음으로 거의 추상적이라 할 수 있는 진실의 개념을 고찰하고 이런 논의의 장을 현실로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투명한 진실에 대한 방향성을 공유한다. 연극은 현실과 완전히 분리된 무대를 통한 실험 공간이 될 수도 있겠지만, 관객을 향하는 경로를 열어 둠으로써, 즉 가상과 현실의 시공간적 접점을 마련해 관객을 통해 현실에 대해 말할 수도 있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2. [함께 보기] 뮤지컬 <시데레우스>: 소통과 교감으로서 진실


뮤지컬 <에밀>이 질문들, 빛, 그리고 빈 무대를 통해 진실의 존재에 대한 인식과 협력을 이끌어 내는 것은 결국 극문학이 관객과의 소통을 통해 무형의 주제나 가치에 대해 말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유사하게, 진실에 대한 인물들의 환희와 사명감, 그리고 성장을 통해 관객을 끌어들이는 뮤지컬을 한 편 더 소개하고자 한다. 2019년 초연된 뮤지컬 <시데레우스>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요하네스 케플러의 천문학 연구를 소재로 하는 창작 뮤지컬로, 성서에 기록된 내용에 반하는 우주의 현상, 즉 지동설을 발견함에 따라 발생하는 갈릴레이 자신의 갈등, 그리고 이를 접함에 따라 발생하는 그의 딸 마리아 첼레스테의 고뇌를 따라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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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극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이단 혐의를 받은 것을 배경으로, 그의 딸이자 수녀인 마리아 첼레스테가 아버지가 남긴 편지들을 보게 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편지들은 케플러와 갈릴레이 사이에서 오간 것으로, 케플러가 자신의 연구에 대한 조언을 부탁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우주에 대한 공동 연구의 과정을 담고 있다. 조언을 구하는 케플러의 끈질긴 요청에 갈릴레오는 그의 가설이 틀렸음을 증명하려 하는데, 그렇게 교류하던 중 당시 성경의 내용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금기시되던 지동설을 대입할 경우 새로운 연구의 가능성이 열림을 확인하게 된다. 지동설이라는 위험한 가능성을 함께 고려하기로 한 이들은 망원경을 발명하고 이를 통해 관측한 우주의 모습을 담은 책, "시데레우스 눈치우스(Sidereus Nuncius)"를 지필한다. 갈릴레이는 자신이 직접 본 우주의 모습 및 계산을 통해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만, 결국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자신의 발견을 부정하고 더 이상 주장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 극은 자신의 기존 가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케플러의 멈추지 않는 호기심, 그리고 편지와 망원경을 통해 아버지에 대해 더 알게 됨으로써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마리아 첼레스테의 성장으로 긍정적으로 마무리된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시데레우스>는 실패와 무지로 인해 좌절되는 듯하며 그 당시에는 무의미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분명히 존재하는 진실에 대한 희망을 관객에게 전달하며, 이에 부합하는 구성과 연출을 보여준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극의 흐름을 따라감에 따라 관객이 진실 그 자체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대한 인물들의 희열에 공감하게 되며, 이들이 공연을 통해 가상적인 인물 및 사건과 공감한다는 어찌 보면 비현실적인 현상은 시공간적 거리 및 가치관, 믿음의 차이로 인한 소통의 장애를 극복하는 극중 인물들의 행위와도 공명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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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가 사용한 망원경, 그리고 "시데레우스 눈치우스"


우선 극의 구성을 보면 스토리 전체가 소통, 그리고 이를 통한 개인적 세계관의 확장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극의 시작을 여는 마리아 첼레스테는 아버지의 편지, 그와 함께한 동료, 그리고 망원경을 통한 우주를 보며 자신에게 무관심한 것으로만 여겨졌던 아버지에 대한 인상을 재고하고, 그가 열중했던 대상, 즉 우주를 공유하며, 종교를 중심으로 하던 자신의 세계관에 대해 질문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극중 구체적인 일화들은 갈릴레이와 케플러 사이를 오가는 편지로 설정되어 있다. 이들은 극의 후반부, 케플러가 위기에 처한 갈릴레이를 직접 찾아오기 전까지는 직접 만나지 못하지만 그들의 교류는 우주의 진실을 향한 그들의 열망과 희열을 그대로 전달한다. 이는 그들 사이의 시공간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동시에 무대에 존재하며 직접적으로 교류하는 극적 허용과도 잘 어울린다. 조금 더 멀리 가자면, 이들의 관계 설정은 지금 여기에 함께 존재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분리된 시공간에 존재한다고 전제되며, 그러면서도 분명히 소통하는 무대와 관객 사이의 관계와도 비교될 수 있다. 따라서 <시데레우스>가 소통과 이해에 대한 극이라면, 이는 관객의 이해를 통해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케플러와 갈릴레이의 관계에 존재하는 갈등과 연대는 자신으로서 갖고 있던 한계를 넘어섬으로써, 즉 자신이라는 장벽을 깨는 소통을 통해 세계에 대한 시각을 넓힐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케플러는 자신이 처음부터 제시했던 <우주의 신비>(행성들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기존의 가설이 너무 복잡하다는 것을 문제삼아, 우주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거미줄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가설을 제시한 케플러의 논문)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려 하지만, 사실 갈릴레이는 이미 계산해 본 결과 그것이 잘못된 가설임을 알고 있으며 이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한다. 결국 갈릴레이가 그의 가설이 잘못되었음을 실토했을 때 그는 상황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하며 조금 더 연구해 보겠다는 말로 현실을 부정한다. 이와 같은 케플러의 좌절은 갈릴레이에 대한 교회의 억압과 함께 진행되며 갈등을 심화시키지만, 갈릴레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케플러는 이탈리아로 찾아오며 자신이 관여되었음을 밝히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그를 변호한다. 최종적으로 그는 마치 처음 서신을 보내 갈릴레이의 의견을 물었을 때와 같은 태도로 수정된 가설을 제시한다. 따라서, 비록 갈릴레이는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번복하지만, 그의 선택으로 남은 사람들은 미래로 나아가는 진실의 근원이 된다. 이처럼 진실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있는 케플러와 갈릴레이의 열정은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자신을 내려놓고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새로운 주장을 할 수 있는 소통 및 성장과 궤를 같이 한다. 그리고 이런 성장은 우주에 대한 진실을 밝혀 세계에 대한 이해와 시선을 확장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스토리의 구성 외에도 <시데레우스>는 관객에 대한 소통의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극이라고 할 수 있다. 갈릴레이와 케플러가 보고자 하는, 그리고 보는 우주의 모습은 무대를 넘어 객석 너머까지 아름답게 퍼져 나가는 영상 및 조명을 통해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우주의 풍경은 인물들의 시선이 반영된 것일 텐데, 새로운 발견에 대한 열정 및 우주를 이해한다는 희망으로부터 오는 인물들의 희열을 감각적으로 구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관객은 이런 연출에 매혹됨으로써 인물들과 감정과 시선을 공유하고, 이에 따라 극장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공연의 현장감을 바탕으로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그러므로 뮤지컬 <시데레우스>는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를 지필하는 갈릴레이와 케플러의 이야기를 다뤄서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관객에게 우주라는 진실의 형상을 전달해 주는 ‘별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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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시데레우스>가 공연으로서 갖는 의미는 어쩌면 망원경과 같다. 눈에 대고 멀리 있어 보이지 않던 사물을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하고 그럼으로써 비로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망원경처럼, 이 공연은 타인의 감정,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진실을 향한 열망을 실감나게 경험할 수 있게 함으로써 말이 필요 없는 공감을 발생시킨다. 특히 이 공연의 주제의식은 소통을 곧 진실의 속성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극예술이 관객에게 진실의 주제를 전달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진실은 그것을 억압 혹은 외면할 수 있는 제도나 개인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요구하기에, 항상 소통의 의지를 요구하는 것이다. 아버지에 대해 새롭게 알아감으로써 본인의 삶뿐 아니라 세계에 대한 시각을 확장시킬 수 있었던 마리아 첼레스테의 성장을 따라 극과 함께함으로써, 관객은 자신에게서도 소통의 가능성을 확인 및 적용하며 극을 망원경이라는 진실의 모티프로서 이용하게 된다.




지금까지 관객에게 ‘진실’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두 창작뮤지컬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에밀>은 관객의 내면에서 완성되는 진실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진실의 속성을 경험하도록 하는 감각적 논의를 전개하고, 그 결론은 열린 채로 남겨둔다. 그리고 <시데레우스>는 진실이 그 자체로 아름답고 가치 있음을 설득시키기 위해 관객이 인물들의 성장과 감정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도록 한다. 이 극들을 분석하면서 느꼈던 것은, 그것들이 진실의 드러남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극예술의 특성들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극예술은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통해 부재하는 것을 보여주는 매체이기에, 완전히 새롭게 창조하기보다는 실재로부터 다른 존재를 드러내는 움직임, 즉 드러나지 않던 진실의 발견과 비교될 수 있다. 무대를 올린다는 것, 즉 미장센은 분명히 실재하지 않는 어떤 대상이나 경험을 관객에게 가시화된 형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문제의식을 항상 갖고 있다. 그리고 연극은 극장에 오는 것만으로 무대의 모든 시공간적 한계와 비사실적인 요소들을 넘어 인물들 및 함께하는 수많은 신체들과 공명하려는 태도를 발전시키게 만들고, 인물에 대한 배우의 내, 외적인 이해와 구축을 강조한다. 결국 연극이 허구임에도 이와 일반적으로는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진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진실의 경험을 위해서는 현실과 개인의 편향됨을 벗어나야 하며 이는 결국 소통의 성취와 결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공연은 아름다운 감각적 표현들을 통해 말로는 전달되지 않는 명료함을 가지고 진실의 가치를 설득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두 작품에서 모두, 진실은 빛의 형상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는 모호하지만 분명한 것으로, 관객은 압축된 현실을 보여주는 무대로부터 얻은 진실의 경험을 바탕으로 살아갈 수 있다.



포스터 및 무대사진은 공연별 제작사의 SNS 채널로부터 가져왔다.

뮤지컬 <에밀>: 뮤지컬 에밀 X 공식계정 (@Emile_musical)

뮤지컬 <시데레우스>: 주식회사 랑 X 공식계정 (@company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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