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속 폭력의 재현과 관람

호페쉬 쉑터, <Clowns>

by 현일

공연예술에서 폭력을 재현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전통적으로 모방적이되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진다는 시공간적 특수성을 가지는 공연예술은 항상 폭력의 재현과 관련된 실용적, 그리고 윤리적 문제를 고민해 왔다. 관습적으로 공연예술에서 폭력의 재현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지양되었다. 플라톤을 비롯한 고대의 철학자들은 예술에서 추하고 비윤리적인 행위나 대상이 기꺼이 수용되며 관객들에게 정서적 변화를 일으키는 현상을 위험하다고 여겼다. <시학>을 통해 서양 연극의 기틀을 형성한 것으로 여겨지는 아리스토텔레스는 공포와 연민을 일으키는 행위를 통해 관객에게서 부정적인 감정을 정화하는 ‘카타르시스’를 연극의 교유한 효과로 여긴 바 있지만, 그조차도 실제로 비윤리적인 행위를 수행하기 이전에 플롯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면 (즉 ‘무서운 행위를 모르고 행하려 하다가 알게 된 후 행하지 않는 것’) 그것이 더 긍정적이라고 여겼다. 더불어, <시학>의 수용과 발전을 통해 연극의 규칙들을 발전시킨 근대 연극에 있어서도 공포와 연민이 나타내는 부정적인 감정적 경험은 문제적으로 여겨졌다. 이런 경향에 따라 연극은 카타르시스를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치환시키거나, 사회적 제도나 지위에 부합하는 적합성의 규칙들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특히 살인을 비롯한 폭력적 행위 및 관객에게 공포를 야기할 수 있는 행위는 무대 위에서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는 것이 적절하다 여겨졌다. 오늘날까지도 공연에서의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요소들은 검열 및 관람 제한의 문제와 함께 논의되고 있으며, 희곡에서 재현 불가능한 수준의 폭력이 묘사될 경우 그것을 어떻게 무대화할 것인지에 대한 실용적인 문제의식도 발생하고 있다. 공연이 폭력을 소재로 하거나 묘사하는 것이 과연 비판적인 방식으로 수용될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소위 '불행 포르노'로 전락할 것인지의 문제의식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과 분석이 존재함은 역설적으로 폭력의 재현,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행위 및 그것의 영향이 공연예술에서 분리할 수 없는 문제였음을 가리킨다. 공연예술의 모태가 된 것으로 여겨지는 제의적 실천 및 종교, 그리고 오늘날 다양한 매체에 범람하는 폭력의 이미지까지 폭력을 관람하는 행위는 문화로부터 뗄레야 뗄 수 없는 경험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관객에게 2023년 MODAFE(국제현대무용제) 폐막작으로 선정된 호페쉬 쉑터 컴퍼니(Hofesh Shechter Company)의 공연은 날카로운 경험을 제시한다. <Double Murder>, 즉 ‘한 쌍의 살인’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공연의 흥미로운 명칭은 상이한 분위기의 두 작품으로 구성된 더블빌을 가리킨다. 하나는 폭력의 재현과 수용에 대한 격렬한 풍자를 담고 있는 <Clowns>이며, 다른 하나는 폭력과 적대에 대항하는 연대의 따스함을 품고 있는 <The Fix>이다. 전자가 폭력에 대한 소비적인 시선 및 그것 하에서 폭력의 무한한 굴레 속에서 움직이는 ‘광대들’의 모습을 공격적인 어조로 그려낸다면, 후자는 이에 대한 일종의 치료로서 공동체로부터 기인하는 따뜻한 시선을 객석으로까지 퍼뜨린다. 두 작품은 모두 호페쉬 쉑터 컴퍼니 특유의 원초적이고 집단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며 그 시각적 유사성은 분명하지만, 이를 그려내는 시각과 분위기에 따라 관객은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오늘의 글에서는 두 공연 중 <Clowns>가 앞서 언급한 폭력의 재현과 수용의 문제에 대해 어떤 문제의식을 제시하고 있는지, 공연에 잠재되어 있는 폭력의 요소를 다루는 방식부터 그것의 세속화가 야기하는 은폐,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위기에 대해서까지 논해 보고자 한다.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폭력의 재현이 무대 위에서는 비현실적인 장치들 그리고 일종의 제의화된 표현 방식을 통해 이루어짐으로써 폭력이라는 현상 자체가 아닌 그것에 내재한 혹은 그것을 둘러싸는 제도적 장치 및 폭력의 원형적 형태를 폭로하는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Clowns>는 한 명의 무용수가 관객을 직접 대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는 COVID-19 판데믹이 지나고 직접 관객을 만날 수 있게 된 것, 그리고 한국에 올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며, 함께 구호를 외칠 것을 부탁한다. 그가 Hip, hip! 을 외치면 관객은 Hooray!를 외친다. 전형적인 화이팅 구호이다. 여기 동참함으로써 관객은 공연의 시작에서부터 관객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지각하고, 화이팅콜과 함께 공연의 진행에 참여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질 수 있다. 이제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관객은 일종의 공범이 된다. 그리고 그와 함께 무용수들이 무대 위로 뛰어나오며 공연은 시작된다. 민속적인 분위기의 의상을 입고 흥분한 듯 뛰어다니는 무용수들과 늘어진 알전구는 축제의 흥겨운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마치 단장인 양, 무용수들을 대표해 관객을 대면하며 인사하는 인물 (앞서 관객에게 말을 건 인물과 동일인물이다) 도 등장한다. 이처럼 공연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들은 관객에게 어떤 ‘쇼’를 보여줄 것이며, 이를 보기 위해 그들이 객석에 앉아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이런 축제 같은 분위기는 곧 서로 목을 따고 배를 찌르는 악몽과 같은 이미지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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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이런 폭력적 행위가 가지는 역동적이고 직접적인 감각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이 공연 자체는 그려지는 폭력의 행위를 비현실적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공연 중간중간, 무대 뒤쪽으로는 전형적인 연극 무대를 연상시키는 붉은색 막이 드리워져 있고, 살해당한 쪽이 일어나 다시 폭력을 휘두르는 양상은 마치 게임과 같은 느낌을 준다. 죽고 죽이는 역할을 끊임없이 바꿔 수행하고 음악에 맞춰 승리를 자축하듯 춤을 추다가 다시 정적인 군무 대형으로 돌아가는 무용수들의 태도는 행위의 내용과 그것이 보여지는 방식 사이의 이질감을 만들어 낸다. 또한, 광란의 움직임들은 무대상의 위치를 바꿔 가며, 조명의 점등과 소등을 따라 마치 장면 단위로 끊겨서 제시되는 느낌을 준다. 이런 장면의 비연속성, 그리고 특유의 흐릿하고 안개가 낀 듯한 비일상적 조명은 모든 행위에 몽환적인 분위기를 주며 일종의 기억이나 꿈, 혹은 환상처럼 보이도록 한다. 또한 손에 손을 잡고 서거나 걸어 나오는, 그리고 허리를 굽히는 움직임은 커튼콜의 배우들을 연상시키며, 반복적인 움직임과 클래식 발레를 연상시키는 움직임은 공연 전체에 관습적인 공연 및 관람의 맥락을 부여한다. 이로부터 관객은 제목인 '광대(Clowns)'가 갖는 의미와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광대를 누군가의 유흥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폭력의 피해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등장시키고 예술활동으로 대표되는 제도적 양식들에 폭력성이 내재해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이때 서로 죽고 죽이는 다양한 방식들이 묘사될 뿐 아니라 여성적 신체를 과시하듯 노출시키는 동작들도 확인할 수 있는데, 성적인 이미지의 소비 또한 폭력 혹은 과잉의 재현에 포함될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 한편, 이 작품은 이런 폭력을 철저히 무대 위의 행위로서 가상현실이 허용하는, 일상적 현실을 넘어서는 표현 가능성 속에서 탐구하겠다는 지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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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들이 보여주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폭력의 움직임과 제도화된 맥락의 이질적인 만남은 문화적 양식으로서의 제의가 가지는 폭력의 요소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발을 맞춘 집단적 움직임과 그것의 극대화, 축제나 공연 등 문화적 맥락, 그리고 폭력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현상은 제의의 근간을 상호적 폭력에서 찾고 현실에서의 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로 이해하는 프랑스 학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의 설명을 연상시킨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지라르는 그의 대표적인 저술인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제의적 실천에서 희생은 성스러움과 죄악의 양가성을 가지고 있으며 희생제의는 폭력을 통해 폭력을 해소하려 하는, 폭력과 비폭력의 결합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가 문화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양식들에는 폭력에 대한 집단적 승인이 내재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공연을 포함한 제도화된 제의적 양식에는 폭력에 대한 위기의식이 은폐되어 있게 된다. 또한 폭력과 제의에 대한 지라르의 논의는 비극을 경유해 예술적 실천의 영역으로도 확장되는데, 이에 따르면 연극, 특히 비극은 대칭요소들의 대립을 시작지점으로 하며, 이들 사이의 폭력으로 인해 야기된 불균형이 반격으로서의 폭력을 낳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끊이지 않는 상호적 폭력을 나타내게 된다. 이때 관객이 보는 것은 ‘폭력의 메커니즘’ 그 자체이다. 이런 상호적 폭력은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폭력에 대한 경고이자 폭력의 억압으로 인한 욕구불만 상태를 해소하는 방법이 된다.

이에 부합하듯 <Clowns>에서 등장인물들이 서로에 대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그 어떤 합리적 이유도 없으며, 어느 한 쪽의 고정적인 우위를 나타내지도 않는다. 특히 공연이 클라이맥스로 치닫음에 따라, 특정 인물이 감전되듯 발작하고, 총에 맞고, 둔기로 가격되고, 칼로 찔리는 등의 폭력적인 움직임들은 마치 연쇄 작용을 이루듯 여러 무용수들의 몸으로 연결되어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는 식으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인상을 준다. 이때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개인의 경험으로 한정되는 대신 폭력의 메커니즘 그 자체를 체화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의 분리된 정체성이 사라져 집단적인 격렬한 움직임이 발생됨에 따라, 움직임 자체가 가지는 힘은 더욱 커지고 일종의 현기증을 야기한다. 이는 제의, 혹은 이로부터 기인한 집단적 예술 전체가 가질 수 있는 특수한 시공간, 변화의 가능성을 나타낸다.

한편, 지라르가 제의에서 폭력의 문제를 강조한 것은 그것이 폭력의 욕구불만 상태를 해소해 더 큰 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사회의 기제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는 폭력을 제도적으로 구현하고 그것에 동참하는 행위가 사회적인 효용성의 측면에서 이해되도록 한다. 하지만 이런 효용성이 폭력의 제도적 수용이 가지는 문제를 완전히 해소하는 것은 아니다. 지라르에 따르면 희생물은 폭력의 욕구불만 상태의 해소를 위한 것인 만큼 인간과의 유사성을 필수적으로 가져야 한다. 이는 개인들에게 억눌려 있는 ‘폭력을 속이기 위해 폭력의 배출구를 막지 않으면서 간간히 먹이를 던져주는 것’이라고 설명된다. 다시 말해, 희생제의는 희생물과 희생될 ‘뻔한’ 것 사이의 유사성에 원칙을 둔 ‘대체’에 기반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희생물과 희생될 뻔한 것 사이의 유사성은 혼동을 일으킬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되며, 폭력이 위험한 수준으로 연쇄적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제의의 목표에 따라 결국 제도적인 차원에서 복수(즉 연쇄적 폭력의 시발점)의 위험을 제기하지 않는 대상을 향하게 된다. 이는 일반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결여하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제의에서 희생물을 향한 폭력은 폭력을 방지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는 모순에 따라 항상 그것의 정당성을 완벽히 보장할 수 없다는 위기를 나타낸다.

실제로 <Clowns>에 나타나는 무용수들의 모습은 그들이 ‘광대’로서 소비되며 무표정으로, 반복적이며 비개인적인 동작들을 기계적으로 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꼭두각시를 연상시킨다. 이들이 머리와 팔을 늘어뜨리고, 머리를 양 옆으로 자잘하게 움직이는 동작들을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인 인간의 움직임이 아닌 인형이나 초자연적인 존재를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그리고 이들은 시선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약자에 해당된다. 앞서 설명했듯이 무대 위에서 보여지는 폭력은 유흥, 비현실, 혹은 문화적 양식으로 순화되어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여러 맥락 속에서 등장하는데, 이는 폭력적 행위와 그것을 관람하는 행위가 사회적 효용성으로부터 시작해 세속화되어 정립되었음을 가리킨다. 하지만 제도화된 폭력이 보여지는 와중에도 이 작품은 폭력이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완전히 수용될 수 없다는 충격을 관객에게 남김으로써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폭력 및 그것에 둔감해지도록 하는 제도적 실천에 대한 문제의식을 남긴다. 한 장면에서, 한 인물의 관자놀이에 손가락 총이 겨누어지고, 음악의 강렬한 리듬은 잦아들어 나직한 피아노 선율만 남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긴장의 순간을 지나, 총이 발사되고 인물은 바닥으로 쓰러진다. 집단적 행위의 역동성과 제도적 장치들로 감춰지더라도 폭력은 절대 완전히 용인될 수 없는 위기의 지점을 나타낸다.

따라서 폭력의 가해자이자 대상으로서 무대 위에서 소비되는 광대들은 사회적 약자의 희생, 그리고 무비판적인 폭력의 수용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동시에 폭력의 메커니즘 그 자체를 대변하며, 결과적으로는 통제될 수 없는 폭력에의 위기의식을 발생시킨다. 이들의 존재, 그리고 그들의 폭력적 행위를 지켜보고 있다는 입장은 관객에게 형언할 수 없는 불안을 자극한다. 무대의 조명을 받으며 거친 폭력의 움직임과 시선을 보내는 무용수들은 낯선 존재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불안감을 발생시킨다. 뒤틀린 움직임과 표정, 상체를 굽히고 떨어뜨린 채 ‘추함’에 가까운 이미지를 발생시키는 안무, 시체처럼 늘어진 신체를 끌고 좀비와 같이 움직이는 장면들은 이를 마치 ‘죽음의 춤’과 같이 느끼도록 한다. 지라르는 제의적인 면모가 사라질수록 축제는 긴장완화의 허용이라는 면으로 한정되며, 축제의 우호적이고 즐거운 겉모습 뒤에 희생위기와 상호적 폭력이라는 ‘어두운 모델’이 있다는 것을 잊게 된다고 설명한다. 제도화된 문화적 양식들을 차용하는 동시에 이를 급격히 어두운 이미지로 변환시키는 특성을 가지는 <Clowns>는 관객에게 폭력에 근거한 문화적 행위를 경험하도록 하는 동시에 무용수들의 움직임과 표정을 통해 이런 ‘어두운 모델’이 존재함을 잊을 수 없게 한다. 제의적 실천에 내포된 폭력을 망각할 때 우리는 폭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상태에 이를 수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제의적 활동 안에 해소되지 않은 채 잠재되어, 돌아올 수 있는 위협적인 힘으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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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무용수들이 보여주는 비인간적인 모습들은 꼭두각시와 같은 피해자의 인상을 넘어 관객에 대한 위협으로도 작용하게 된다. 이 공연은 집단적으로 뭉쳐 만들어내는 완벽한 군무,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살의를 제외하고는 기이한 무표정으로 굳어 있는 얼굴들을 보여주며,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부드럽고 쾌적한 움직임에서 광기에 가까운 도취 상태, 그리고 기이한 정적 상태 사이에서 갑작스럽게 오가는 급변과 단절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이때 무용수들은 사회적, 문화적으로 형성된 개인의 속성을 제거하고 대신 집단적 폭력의 불길한 얼굴을 가지게 된다. 이들은 함께 달리고, 뭉치고, 열을 지어 움직이기 때문에 더욱 강렬한 효과를 가지게 되는데, 그런 움직임은 음악에까지 반영되며 공간 속에 반향을 만들어 낸다. 발을 구르고 몸을 흔드는 역동성은 음악의 타악기 리듬과 완벽하게 상응해, 마치 무용수들이 몸에 악기를 매달고 춤을 추고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 손을 떨듯 흔들고 양 옆이나 위아래로 진동하는 움직임부터, 균형을 잃듯 몸을 낮춰 흔드는 동작, 팔다리를 위로 뻗으며 뛰어오르는 동작, 원을 그리고 회전하는 동작들은 역동적으로 희생물을 쓰러뜨리고 이를 자축하는, 원시적인 제의로부터 기인하는 폭력성을 그려 낸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격한 움직임은 절도 있는 멈춤 및 부동 자세와 교차되며, 기이한 고요함 속에서 관객을 향해 시선을 보낸다. 이로부터 관객은 문화적으로 감행된 폭력을 지켜보며 우리는 욕구를 해소하기도 하지만, 폭력적 행위에 잠재되어 있는 죽음의 얼굴을 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의 시선은 관객에게 희생물을 소비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문제의식, 혹은 문화적인 맥락을 통해 감춰 왔던 폭력의 두려운 본모습에 대한 생각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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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폭력이 보여지는 맥락 및 효과에 대한 다양한 ‘연출’을 오가며 <Clowns>는 공연이라는 집단적 수용 행위에 반영된 폭력적 본질과 이로 인한 해소되지 않은 문제들을 불러낸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도 이 문제는 완벽히 해소되지 않는다. 공연은 도입부에 이루어졌던 폭력적인 안무가 반복되는 것으로 끝이 나며, 커튼콜 중에도 조명의 점등과 소등에 따라 공연 중 보여졌던 춤 및 행위가 반복된다. 이런 연출은 폭력적 행위와 그것의 문화적 수용이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과 같으며, 관객이 이에 맞춰 박수를 침에 따라 폭력을 감상한다는 것에서 비롯되는 이질감을 극대화시킨다. 관객은 폭력을 지켜보는 군중의 일부로서 이 모든 문제제기의 경험에 함께했으며 이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희열 및 죄책감, 혹은 공포를 극장 바깥으로까지 가지고 나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런 폭력의 재현 및 소비가 실생활의 다양한 방면에서 계속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것이 바로 <Clowns>가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에게 남기는 여운이다.



단체소개


호페쉬 쉑터 컴퍼니는 춤을 통해 인간의 영혼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지향을 가지고, 춤을 통해 우리의 가장 깊은 감정들에 접촉할 수 있다는 믿음을 내세우는 단체로서 스스로를 소개한다.


“We dance to know what it feels like, not just to live, but to be alive.”
(우리는 단지 사는 것이 아닌, 살아있는 것의 느낌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춤을 춘다.)


<Clowns>를 통해 관객은 문화적 양식에 은폐된 폭력의 문제를 관객의 입장에서 출발해 생각해 볼 수 있으며, 이는 문명화된, 현대적인 삶의 타성으로부터 벗어나 이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이를 통해 관객은 폭력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재발견한다. 이는 사실적인 현상으로서 재현되기보다는 관객에 대한 직접적인 응시를 통해 경험된다. 죽음과 폭력은 문화, 그리고 개개인의 삶에 있어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인 동시에 본능적으로 은폐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과 다시 마주함으로써 우리는 삶과 한 쌍으로 존재하는 죽음, 문명화된 개인에게 언제나 내재된 어두운 본능을 재발견함으로써 현실과 자신에 대한 이해를 재고할 수 있다. 호페쉬 쉑터 컴퍼니가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즉 생명력 자체를 말하고자 할 때, 이 공연은 그것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님을 가리킨다. 하지만 현실과 자신을 낯설게 바라볼 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는 더욱 고양되고 확장될 것이다.


*본 글을 읽고 Clowns에 대해 관심이 생긴다면, 해당 작품의 영화화된 버전을 찾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는 카메라를 통한 집중된 효과를 통해 직접 공연을 볼 때 느낄 수 있는 역동성을 대체하는데, 특히 무용수들에게 과도하게 가까이 다가가 얼굴과 신체 부위들을 비추는 방식으로 현기증에 가까운 효과를 주고 무용수들의 강렬한 시선을 잡아 낸다. 영상을 보는 관객들은 카메라 렌즈와 접촉하듯 춤을 추는 무용수의 몸과 날카로운 시선, 그리고 카메라 렌즈 너머에 있는 관객에게 총을 겨누는 움직임에 의해 마치 자신이 무대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공연예술의 근본적인 조건이 퍼포먼스와 관객이 시공간을 공유하는 것에 있다면, 이 댄스필름은 이런 가능성을 카메라라는 매체를 통해 실험하는 것처럼 보인다.



참고문헌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김진식/박무호 역. 민음사. 2000.

사진 출처: Hofesh Shechter Company 공식 홈페이지 https://hofesh.co.uk/film/hofesh-shechters-clowns/#myCarousel / hofeshshechterco 유튜브 채널 (Clowns Trai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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