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연을 왜, 어떻게 보는가?
글을 통해 나 자신을 대변하고자 한다면 어떤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학술적인 목적 혹은 개인적인 정리를 위해 글을 써 왔지만 내 글이 일반적인 독자들 대상으로 공개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글을 써 본 경우는 드물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다른 문제는, 나를 ‘공연을 보고, 이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오늘날 구체적인 의미를 가지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공연예술의 풍토에서는 다양한 예술적 실천과 취향이 동시적으로 추구될 수 있으며 가장 고전적인 희곡 및 발레 작품들 옆에 장르적 규정이 불가능한 퍼포먼스적 실천들 및 융합적 실험들이 나란히 놓일 수 있다. 이 시대에 공연을 만들고 보는 행위는 특정한 스타일이나 예술운동으로 분류되기 어려우며, 새로운 실천들이 이루어짐과 별개로 상업적인 공연 시장 또한 나름대로의 활발함을 보이고 있다. 나 또한 의식적으로 다양한 공연을 보려 하지만 ‘재밌어서 보는’ 수많은 대중 작품들의 경험과 기록을 배제하고 싶지는 않다.
그나마 기댈 수 있는 것은, 내가 취하고 있는 공연의 경험이 아무리 다양하고 산발적이라도 이에 접근함에 있어 개인적인 기준점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공연예술의 특성, 형식이나 사례, 그리고 공연을 보는 방식은 내 취향 및 해석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런 기준이 존재하는지를 돌아보는 식으로의 자기소개이며, 이는 내가 공연을 보는 방식으로서 앞으로 작성할 관람 후기들의 중심이 될 것이다.
필자는 매주 공연을 보는 관객이자 공연예술을 공부하는 학생이다. 고등학생 때 연극동아리 친구들과 본 공연들, 그리고 함께 학교 무대에서 연극을 올린 경험은 필자의 진로를 뒤바꿔 놓았다. 아직 세상에서 내가 갖는 위치를 구체적인 직업이나 업무의 성격으로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오는 것은 공연을 올리고 이를 보는 경험이 문화적으로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며, 여전히 해명되지 않은 (혹은 사회문화적 변화에 따라 확장되는) 연구 가능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다. 구체적인 성격은 시기에 따라 달라졌을지라도 일상의 상당 부분을 공연과 관련된 활동과 생각에 투자해 온 지 10년이 넘어가는 지금, 공연이 대체 어떤 경험이기에 내게 그토록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공연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에 대한 질문은 결국 자기 정당화 시도로부터 출발한다. 공연예술은 건재한 예술 분야이며 상업적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지만 대중적이라 보기에는 한계가 있고, 이에 대한 연구가 현대에 갖는 가치는 이미 퇴락한 것으로 여겨지기 쉽다. (애초에 인문학적 연구의 필요성 및 전문성에 대한 폄하와 무관심이 계속되는 상황 또한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그래서 공연을 연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를 통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아 왔다. 누군가는 내 연구가 결국 자기만족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에 대해 (다소 무례하게) 묻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적당한 표현을 찾기 어려워하면서도 공연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런 믿음의 기저에 있는 것은 결국 공연이 나보다, 그 질문을 한 사람보다, 그리고 현재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보다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정한 시대에 통용되는 가치나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대상들은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으나 그 시대나 맥락을 벗어나서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공연이 지금은 올드한 것, 혹은 부차적이고 오락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상 공연이라 불릴 수 있는 행위가 멈춘 적은 없을 것이다. 공연은 문자, 돈이 있기도 전부터 상이한 문화로부터 확인되었으며, 의례나 제의, 문화적 제도들과 연결됨으로써 우리의 본성 속속들이 숨어들어 있다. 그러니 필자가 초점을 두는 공연예술의 가치는 그것이 만들어짐에 따라 어떤 이익을 만들어내는지의 문제는 아니다. 대신 공연예술을 통해 제기할 수 있는 핵심적인 질문은 “왜 인간은 공연을 하는가”이며, 이 질문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어떤 이해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수천 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문명의 가면들, 벽화에서 확인되는 비사실적인 표현들, 그리고 의례 및 공연과 관련된 기록 및 건축물들은 시대와 문화권을 넘어서는 공연예술의 역사에 대해 실감하도록 한다.
공연을 중요한 인간 행위로서 분석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오늘날의 복잡한 공연예술 풍토의 해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도 의미가 있다. 공연예술의 영역에서 다양한 비판적 실천들이 이루어지고, 이전에는 개별적인 장르나 매체의 기준에 따라 분리되어 있던 실천들이 뒤섞이며 융합적인 예술을 형성하는 것이 일반화된 오늘날, 공연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쉽사리 대답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런 발전 양상은 아방가르드 이후 연극적 실천들에서부터 분명하게 확인된다. 이런 실천들은 희곡 텍스트가 가지는 우위를 부정하고, 희곡 혹은 플롯에 복속된 것으로 여겨졌던 실연, 말하자면 무대화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으며 희곡이 아닌 제의적이고 공동체적인 실천으로부터 연극의 근원을 찾고자 했다. 이는 사건으로서의 공연의 성격을 부각시키며 퍼포먼스의 개념, 관객의 경험 등 공연에 핵심적인 매체적 조건들을 탐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플롯과 텍스트에 대한 기존의 전통을 재고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곡 텍스트를 중심에 둔 작품들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대다수 관객들의 공연 경험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제 텍스트 및 그것이 전달하는 언어적 의미는 그 자체로 공연예술의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지만, 이에 대한 거부의 전통이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관객의 입장에서도 희곡을 중심으로 한 작품이라 해서 압도적으로 텍스트, 즉 대사를 중심으로 수용되는 것은 아니며, 텍스트가 없는 퍼포먼스에서도 언어적 의미를 도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공연예술의 다양한 실천들이 동시에 추구되고 또 뒤섞일 수 있는 오늘날, 형식적 차이를 넘어 ‘연극을 경험하는 것’의 의미와 특별함에 대한 사유를 정리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다양성이 부각될수록 그 본질, 혹은 이 다양한 실천들을 하나의 이름 하에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질문은 커지는 법이다.
극장을 찾아가면 표현주의, 상징주의 등 현대의 연극적 실천들에서 그러했듯 비사실적인 표현과 무대를 볼 수 있는 한편, 현실에서 떼어 놓은 양 극도로 사실적인 무대를 마주할 수도 있다. 또한 이전에는 특정한 연출적 양식을 토대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새롭게 각색 및 연출되기도 하고, 다양한 양식들이 한 무대 위에 혼재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필자에게 중요하게 다가오는 공연예술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이는 특정한 이론적 접근, 주장에 따른 것이기보다는 그동안 수많은 공연들을 봄으로부터 발생한 경험적 도출이자 개인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던 요소에 주목한 것이다. 내게 공연을 본다는 것은 그 어떤 예술적 경험보다도 부재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연은 부재의 경험이라는 모순적인 방향성을 갖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생각이 가능한 이유는 연극이 지금 여기, 내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공연은 분명 현재하며, 이로부터 관객에게서 강렬한 경험을 발생시킨다. 그 어떤 형식이든 공연은 관객과 연행자가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 움직이는 연행자와 사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경험을 이용한다. 하지만 현장성이나 현재성 그 자체로는 공연에 대한 경험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지금 여기의 사건들을 공연이라고 부를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며, 영화가 훨씬 더 풍성한 사실적 이미지를 보여주고 감각적인 전달 수단으로 무장할지라도 이는 연극과는 다른 경험을 발생시킨다. 물론 현대적인 공연예술 실천들은 예술과 사건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실험들을 수행했으나, 그조차도 무언가를 관객에게 보여준다는 전제로부터 벗어나지는 않는다. 특히나 그런 실천들이 실험으로서 의미를 가지더라도, 다수의 관객에게 공연은 배우의 연기나 연행자의 기술, 즉 일상적인 현실과는 구분되는 보여줌의 수단들과 결부되어 있으며 그들은 이를 기대한다.
그렇다면 공연예술을 특징짓는 매체적 조건, 즉 무언가를 공연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독특한 특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다양하겠지만 다른 매체에 비해 공연예술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경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것이 현재하는 수단과 시공간을 이용해 ‘다른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도록 함으로써 부재의 현존하는 현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배우가 연기를 하며 가상의 인물과 시공간, 사건을 구현하는 것을 볼 때 관객은 항상 배우와 인물을 동시에 보며, 배우의 부정할 수 없는 현재성은 배우 자신 혹은 배우와 인물의 동화뿐 아니라 부재하는 것으로의 인물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말하자면 필자가 극장에 가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빠져들기 위해서이며, 특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부정할 수 없이 강력하게 존재하는 현재의 감각들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연극이 실재와 부재 사이에서 작동하며 그 차이를 그 어떤 예술적 매체보다도 강조할 수 있음에 주목한다면 공연의 제작 및 그것을 수용하도록 하는 관객의 인식 능력과 관련된 특수한 현상을 풍부하게 발견할 수 있다.
부재하는 것의 경험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부터 공연예술을 이해하는 시각을 발전시키려 할 때 필자에게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찾아오는 연극인이 있다. 그는 바로 “잔혹연극(Le théâtre de la cruauté)”을 주장함으로써 현대 공연예술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으며 연극에 대한 실현 불가능한 이상을 주장한 광기 어린 혁신가 앙토냉 아르토(Antinin Artaud, 1896-1948)이다. 아르토의 주장들은 객석과 무대의 구분을 철폐하고 관객을 강렬한 감각적 자극으로 에워쌀 것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현장성과 관객 참여를 말하는 퍼포먼스, 이머시브 씨어터, 도발극 등의 실천들과 흔히 관련된다. 특히 그가 자신이 추구하는 연극을 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인 ‘잔혹’은 그의 이상을 강렬한 표현 및 신체성의 강조로부터 찾는 경향을 발생시켰다. 하지만 내게 그의 주장들이 여전히 새롭게, 그리고 (그 신비주의적인 비약과 비일관적인 경향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게 여겨지는 이유는 그가 연극이 회복해야 할 본질을 결국은 ‘가상’으로부터 찾았다는 점이다.
필자는 아르토의 이론과 글을 처음 접한 대학생 때 그가 제시한 ‘잔혹연극’의 아이디어에 깊은 감명과 호기심을 느꼈지만, 이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한편으로, 이는 당연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아르토는 현대 연극의 대표적인 선구자로 자리매김했지만 막상 그의 연극이론은 성공적으로 실현된 바가 없으며, 아르토가 연극을 페스트에 비유하며 사용하는 표현들 및 ‘잔혹’이라는 개념에서 연상되는 폭력적 이미지, 그리고 질병과 기행으로 가득한 아르토 자신의 삶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격렬한 파괴와 저항, 신체적 자극으로 가득한 연극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는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선입견이며, 명백한 연극적 예시의 부족 및 아르토 본인의 저술들이 나타내는 신비주의적이고 모호한 특성으로 인해 아르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그 명성에 비하면) 상당히 부족한 상태이다. 때로는 아르토의 주장 자체보다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갖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잔혹성’이 더 큰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잔혹연극의 수용 경향은 공연에서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 즉 감각적으로 현재하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르토가 연극의 본질을 회복하고자 할 때, 연극이 다른 예술적 매체에 비해 분명한 현장성을 가진다는 점은 그의 이론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 된다. 하지만 막상 그의 주장을 살펴보면 그는 연극에서 부재에 대해 말하는 것이 결코 실재와 이분법적으로 대립하지 않으며, 실재와 부재의 관계야말로 연극을 통해 현실을 확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 여긴다. 그가 보기에 어떤 대상을 불변하는 고정된 존재로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은 제도와 체계에 의해 편향된 존재를 갖는 문명인의 오류이다. 대신 어떤 대상에 대한 통상적인 이해를 부정하는 것은 그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힘들 속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따라서 아르토는 어떤 현상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표현하는 당대의 연극을 비판하고, 일상적인 기준에서는 이해하거나 믿을 수 없는 현상들이 경험될 수 있는 연극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비록 그의 이상은 성취되지 않았으나, 내게 있어 그 가능성은 이미 연극이라는 매체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능성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이 연극이 부재를 다루는 방식이다.
아르토는 연극을 “가상현실(la réalité virtuelle du théâtre)”이라 칭했으며, 그것이 순수하게 가정되고 환영적인 층위에 존재한다고 여겼다. 또한 그는 연극에서 정신에 의해 구성된 것은 구실에 불과하며, 연극의 강렬한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은 가상성의 ‘이중(Double)’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그에게 연극의 표현들은 비가시적인 것, 즉 가상의 구현으로서 연극적 기호인 ‘이중’으로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아르토가 사용하는 ‘이중’이라는 표현은 연극의 실재가 그것과 다른 존재를 표현함에 따라 발생하는 격차를 반영하는 언어 선택을 보여주며, 현실과 맞닿은 실재는 그것이 표현하려는 가상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이중과 함께 존재하게 된다. 그에게 연극이 현실과 다른 의의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이와의 불일치를 숨기지 않고 현실의 경험을 복잡하게 하는 고유한 예술적 표현 (여기에는 가면, 의상, 연출 등이 표현될 수 있다), 그리고 현실과 다르기 '때문에' 의미있는 ‘그림자’를 가지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연극이 현실에 대한 모방으로서 그림자에 불과하며 진리를 전달할 수 없는 것으로 폄하되었고 이에 대항해 연극의 효능성을 주장하기 위한 연극적 규칙들을 발전시키려 시도해 왔다면, 아르토는 연극이 현실의 그림자로서 현실과 완전히 같아질 수 없지만 이로부터 비가시적인 이면의 세계를 암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고 보았다.
연극이 그림자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진실을 전달할 수 없다는 주장은 플라톤의 <국가> 중 제 7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현실의 모방으로서 예술을 향유하는 것은 동굴 속에 묶인 채로 뒤로 지나가는 사물들의 그림자를 보며 이를 진짜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 이런 모방으로서의 비진리만 소모하다 보면 태양을 눈부시다 느껴 바라보지 못하는 것처럼 진정한 진리에 도달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런 예술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 비유는 현상계 너머 존재하는 진리, 즉 이데아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플라톤이 보기에 현상계는 애초에 이데아의 모방으로서 완전한 진리를 전달할 수 없는데, 예술은 이런 현상계에 대한 모방이기 때문에 진리로부터 더 멀어져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국가> 제 10권에서 세 가지 유형의 침대를 통해 설명된다. 이에 따르면 침대에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형상, 목수가 만든 사물, 그리고 화가가 만든 예술이 있으며 이때 모방적 예술은 자연의 형상으로부터 사물보다 더 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은 연극의 핵심적인 특성은 그것이 현실과 다른, 혹은 현실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는 경험을 발생시킴으로써 통념과 거듭 충돌한다는 데 있다. 특히 연극이 그 어떤 예술보다도 현실에 직접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으로 인해 부재를 강조한다는 점은 아르토가 잔혹연극을 주장함으로써 추구한 연극의 충격효과를 가리킨다. 이와 같은 연극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연극이 ‘페스트’와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는 유명한 은유이다. 이에 따르면 연극이 페스트와 같은 이유는 페스트가 현실적인 제도와 체계의 완전한 붕괴를 가져오며, 환자들로부터 일상적인 상황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행위 및 성격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특히 페스트가 창궐한 도시에서 평소와 정반대되는 성품을 보인다거나, 실질적인 이익을 주지 않을 행동에 탐닉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자신에게 무용한 감정을 경험하고 표현하는 ‘배우’의 존재에 비유된다. 따라서 연극이 페스트와 같으며 이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이용하는 실재와 이로부터 발생한 표현 사이의 모순, 불일치로부터 현실을 붕괴시키는 것에 비유될 수 있는 충격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아르토는 페스트에 의한 신체의 총체적인 붕괴를 병원균의 작용이나 특정한 기관의 훼손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을 비현실적인 것, 즉 추상적인 질병이라고 표현하며 이때 환자의 몸에서는 (배우에게서와 같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 또한 그가 연극의 효과를 구체적 현실에 포섭되지 않는 가상적인 속성에서 찾았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아르토는 그가 추구하는 연극을 ‘형이상학적’이라 칭하며 ‘그 어떤 현실적인 이득도 없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르토에게 연극은 현실의 기준으로부터 벗어나야만 진정으로 경험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잔혹연극은 연극의 경험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가상화’의 작용을 극한으로 발전시킨다. 앞서 언급한 ‘이중’은 연극을 실재하는 수단이 비일상적인 것 혹은 잠재적인 것 (즉 가상)을 가리키는 장소로 만들어 일상적인 수용에 저항하는데, 이런 이중은 가상적인 것을 구현하는 연극의 표현 기법뿐 아니라 연극이 서로 다른 존재 사이의 동일성을 전제함에 따라 모순적인 상태로 존재한다는 이중적인 조건을 폭넓게 가리킬 수 있다. 실제로 아르토는 자신의 연극과 관련된 대표 에세이들을 모아 편집한 대표 저술을 <연극과 그 이중(Le Théâtre et son double)>이라고 이름붙임으로써 이중을 연극의 핵심 개념으로 소개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잔혹연극에서 주장되는 연극의 특성은 그것이 비현실 혹은 환상의 영역을 가리킨다는 데서 이중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며, 연극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원동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실재와 그것이 가리키는 부재의 관계와 불일치로 인해 현실과 구분되기 때문이지, 직접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가지거나 현실의 기준에서 혁신적인 성격을 가져서가 아니다. 따라서 아르토에게 가장 순수한 연극은 그 직접적인 물질적 존재에도 불구하고 환영이며, 그는 연극에서의 정치적인 접근을 경계하고 거부했다.
공연을 바라보는 개인적인 시각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아르토에 대한 길고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을 덧붙인 이유는 어떤 이론가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다양한 예술적 실천들 중 자신과 공명하는 바를 찾는다는 것과 같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생각을 전달 가능한, 외적 형태로 가공하는 데 있어 중요한 도구를 제공한다. 이는 이론의 완벽함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관객으로서 개인이 동요하는 요소에 주목하도록 하는 외부의 시선을 찾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론에 동의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생각의 형태를 더듬어갈 수 있다. 필자의 부족함으로 인해 이런 자기 이해는 여전히 현재 진행중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내가 공연예술에 대한 경험을 분석하기 위해 사용하고자 하는 도구가 연극의 가상성을 중심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어떤 공연에서 실재와 부재의 이중적인 갈등이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 어떤 ‘보이지 않는 것’을 경험하도록 하는지, 그리고 이에 따라 현실의 가능성이 어떻게 확장되는지를 찾는 것이다.
아르토는 사실상 새로운 연극을 주장하기보다는 연극 본연의 힘을 회복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연극의 독특한 매체에 대해 생각할 것을 요청했으며, 그가 관심을 가진 연극의 잠재성은 원시적인 상태에서부터 인류를 끌어당겨 온,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매혹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날의 관객들도 그들의 다양한 관람 경향에도 불구하고 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연극이 부재의 경험을 발생시킨다는 점은 불변의 진리와 인간적인 합리성을 추구하는 연극의 오랜 전통에 의해 부정되었으며, 실제로 많은 공연은 사회, 정치, 문화와 결부되는 ‘진지한’ 의미를 전달하거나 분명한 주제의식과 일관된 흐름에 기반한 플롯을 구축하려는 욕구에 빠져 관객에 대한 매혹을 상실하기도 한다. 하지만 애초에 연극은 의미를 전달하기에 효율적인 매체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어느 정도는 비사실적이며 관객에게 처리 가능한 범위 이상의 감각적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관객은 본인의 경험, 무대의 어떤 요소에 초점을 두는지, 그리고 연행자의 행위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같은 공연일지라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를 경험한다. 이는 공연이 부재하는 것으로서의 본질을 가지기 때문에 관객의 사유 속에서만 완성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공연의 해석은 관객에게 달려 있고 각자가 보는 것이 모두 정답이 될 수 있다는 인식도 결국 공연이 가상으로서 갖는 의미로부터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대학로의 다양한 창작 작품들 및 이에 대한 반응들을 보다 보면, 부족한 서사 및 주제의식에 대한 비판과 함께 ‘대본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공연이 오히려 배우 및 관객의 해석 차이에 따라 큰 인기를 얻는 양상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공연은 모든 행위와 같이 정치적인 목적을 가질 수 있으며 현실과 결부되었을 때 가장 큰 가치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공연은 현실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 위의 구성으로부터 현실의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는 미완의 과정을 항상 동반하기에, 연극이 보여주려 하는 비가시적인 잠재성 및 무대이기 때문에 확장된 허용 범위에 대해 ‘비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 관람 경험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공연을 더 풍부하게 보는 방법은 알려진 현실을 기준으로 한 논리, 이성 등에 대한 의심의 역사가 존재함을 인지하고, 공연이 현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유동적인 태도를 발생시킴으로써 성립한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다. 공연은 분명 지금 여기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아닌 그것의 ‘이중’으로서 의미를 가지며, 항상 현실과의 충돌 상태로서 현실과 관계맺는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공연의 경험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항상 불완전함과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이 모순을 현실의 습관과 경향을 넘어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은 관객 스스로 인간 행위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도록 한다. 우리는 공연을 볼 때 분명 연행자를 보며, 동시에 가상적인 인물이나 감상의 규칙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항상 다른 작품, 혹은 다른 연행자와의 비교 속에서 공연의 경험을 받아들인다. 이처럼 공연에서 실재와 부재, 현실과 공연의 경계 등은 결코 분명히 구분될 수 없으며, 이에 따라 그것은 현실의 굳건한 가치를 불안정하게 하고 부재하는 것의 기호로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으로부터 의미를 갖는다.
이런 배경을 통해 내가 시도하려는 관람 행위 및 그 분석은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는 우리의 사유적 습관에 의해 부정되어 온 공연의 가상성, 혹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공연이 허구, 가짜라는 점을 분명히 전제함으로써 이를 읽어내는 것이다.
참고자료
Antonin Artaud, Le Théâtre et son double, 1938
플라톤, 국가, 천병희 역, 도서출판 숲,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