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극 매너는 어디서 시작되었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약 1년 전으로 기억한다. 취재를 위해 공연장을 찾은 기자가 옆자리 관객으로부터 필기를 하지 말아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에 항의하다, 노트 필기가 시끄러울 정도의 공연장이라면 공연을 볼 이유가 없다는 부정적인 기사를 작성했던 일이었다. 이는 국내 공연계의 관람 관습에 대한 다양한 토론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누군가는 열악한 극장 공간의 특성, 몰입을 요하는 공연의 성격, 그리고 점점 부담스러울 정도로 치솟는 티켓 가격에 따른 예민함으로 이런 경향을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이해하는 한편, 누군가는 그것이 공연에 대한 진입장벽을 높이는 것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공연 마니아 관객들의 예민함에 대한 도를 넘어선 비판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을 필자는 참으로 흥미롭게 생각했다. 이는 극장에서의 적절한 관람 태도가 비단 한국의 공연 환경에 한정되지 않는, 당연한 문화적 관습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불편한 극장 공간이나 티켓 가격 등이 관객들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의 긍정적인 효과와는 별개로, 한국의 공연 문화가 비정상적이고 병적이라며 해외 사례들을 끌고 오며 관객들을 비방하는 입장들의 경우 과연 공연을 본 적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관광 산업이나 가족 단위 관객을 초점으로 하는 공연 등 보다 자유로운 관람이 가능한 공연도 있겠지만, 그런 공연의 존재와 별개로 왜 정적인 관객 태도를 기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공연의 매체적 특성 및 관람 태도의 정립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위에 언급한 사건이 벌어진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으나, SNS 등을 살펴보면 관람 태도에 대한 불평, 이에 따른 반발, 그리고 마니아 관객층에 대한 비판은 잊을 만 하면 다시 돌아오는 주제이다. ‘관크’ (관객과 크리티컬의 합성어로 관람을 방해하는 비매너 행위를 종합적으로 지칭한다)라는 표현이 일반화되어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현대 공연의 역사를 봤을 때 ‘편안하고 자유로운’ 관극 태도는 결코 일반화될 수 없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극예술의 관습, 특히 서양 연극의 형식들이 예술적 활동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공연의 조건들을 추구함으로써 비로소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 관객을 포함한 참여자들의 적절한 태도는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서양연극사에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는 ‘예술 연극’ 개념과 연출의 도래를 중심으로 하는 연극혁신운동의 시기에 해당되었다. 당대의 연극이론가, 연출가들은 상업적, 유흥적 연극을 거부하며 연극의 차별화된 운영법칙을 고려하게 되었다. 즉, 우리가 연극을 예술적 활동으로 여기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을 거쳐 온 것이며, 우리에게 친숙한 많은 관습들이 이때 발생했다.
이런 주장에 따라 극장은 신성한 공간이 되고, 배우는 사제와 같은 역할을 수행해야 했으며 관객의 수용 방식 또한 변화해야 했다. 현대 연기 하면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는 이런 방향에 따라 연극 공연의 환경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연기 테크닉의 개발에 그치지 않고 배우가 ‘순수한 영혼과 고귀한 감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극장의 청결을 유지하고 작업시간을 준수하는 등의 단순한 규칙들부터 엄격한 생활규칙과 정신 집중까지 강조했다. 또한 그는 배우들의 태만함과 나쁜 습관들을 비판하며 그들이 나쁜 감정들을 극장에 가지고 들어오는 것을 금했다. 그는 “예술적으로 순수한 영혼들만이 새로운 사원들에 어울리는 예술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으며, 극장과 자신에 일에 대한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극장과 그곳에서 행해지는 예술에 대한 존경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규율들은 배우를 넘어 관객에게도 적용되었다. 실제로 스타니슬라프스키는 관객의 교육을 예술 연극의 기본으로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어야 했다. 이 예술의 신참 관객들에게 조용히 앉아 있을 것, 떠들지 말 것, 정시에 제 자리에 앉을 것, 담배를 피우지 말 것, 땅콩을 부스럭거리며 먹지 말 것, 모자를 벗을 것, 공연 중에 샌드위치를 먹지 말 것 등을 가르쳐야 했다.” (아직 그런 규율에 익숙하지 않던 당시 관객들은 극장에 스타니슬랍스키가 등장하면 “그 사람이다!” 라고 외치며 도망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당시 예술적인 동시에 대중적인 연극을 추구한 빌라르는 늦게 도착한 관객들에게 다음과 같은 안내문을 제시하고 첫 번째 암전이 될 때까지 기다리도록 했다고 한다.
관객께서는 늦게 도착하셨습니다. 지금 공연은 시작되었습니다. 관객께서는 저희가 ‘연극 의식’과 관람객들을 정성으로 모시고자 함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늦게 도착하신 분들이 내는 문 여는 소리, 의자 삐걱거리는 소리, 불가피하게 소곤거리는 소리들로 관객뿐 아니라 작품에도 피해를 줄 수 있음을 염려하는 저희의 마음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로부터 공연 작품의 완성과 온전한 향유에 있어 관객 태도가 큰 영향을 미치며, 적절한 태도를 가지는 것은 공연이라는 특정한 ‘의식’에 동참한다는 의미가 있다는 인식이 꾸준히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적절한 관객 태도라는 것은 완전히 정해져 있다기보다는 자신이 어떤 의식, 어떤 종류의 활동에 참여하는지에 대한 예민함을 가짐으로써 충분히 충족된다. 실제로 공연을 보면 미동 없이 관람하던 관객들이 관객의 참여가 요구되거나, 박수와 웃음 등 움직임을 허용하는 장면들에서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보다 실험적인 작품들이나 공연예술의 공동체적인 성격을 이용하는 퍼포먼스 공연들의 경우에는 그런 양상이 더욱 쉽게 관찰된다. 반면에 소위 ‘제 4의 벽’을 가정하며 관객이 존재하지 않는, 별도의 허구적 시공간을 상정하는 작품들에서 무대 위 던져진 질문에 관객이 대답하면서 불쾌감을 자아내는 사례들도 존재한다. 다양한 공연의 맥락에 대응할 수 있는 마니아 관객층의 ‘예민함’은 사실 공연예술의 성립과 완성에 필수적인 조건으로서 과도하지 않을 경우 오히려 존중되고 함양되어야 하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각각의 공연이 요구하는 제도적 요구사항을 파악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관객들도 이에 대한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기 위해 관객들이 기본적으로 침묵과 부동이라는 기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다른 한편, 일반적으로 연극, 뮤지컬 작품에서 관객의 정적인 태도가 권장되는 것은 대다수의 작품들이 허구적 시공간과 사건의 설득력 있는 전달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연극의 역사까지 들어가지 않더라도 공연 경험에 대한 대다수의 관객의 기대, 그리고 이와 관련된 공연예술의 독특한 특성은 관객들로부터 특수한 태도와 집중력을 요하는 경향이 있다. 첫 번째 글에서부터 필자는 공연이 결국 현재하는 물질적 수단을 통해 환영을 발생시키는, 어떻게 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효과를 추구하는 예술임을 강조한 바 있다. (사실 이론적인 측면이나 공연의 다양성 측면에서 이런 주장은 이견의 여지가 있으나, 필자가 이런 주장을 한 것은 그것이 일반적인 관객들의 경험에 중요한 부분임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객이 무대 위의 허구적인 현실에 집중하고 허구적 인물들에게 공감하고자 할 때 공연의 현장성은 문제를 발생시킨다.
관객은 지금 여기에 충분히 참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공연을 관람했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이 ‘지금 여기’는 생각보다 복잡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현실의 사건들을 인식할 때, 우리는 공연을 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대’에서 지금 여기 이루어지는 사건은 많은 경우 이는 관객의 직접적인 현실과 상응하지 않는다. 따라서 공연이 그 어떤 허구적 예술보다 현장성을 가진다는 특성은 오히려 관객이 속한 현실과의 불일치, 그리고 이에 따른 저항을 발생시킨다. 다시 말해, 관객은 공연의 허구적 현실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으며 이 허구적 현실은 객석, 그리고 무대의 직접적인 물질적 현실과 충돌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의도적으로 그 물질적 현실과 거리를 두고 무대의 현실에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허구적 예술을 향유할 때 요구되는 상상력이나 불신의 유예 등은 공연예술의 관람에서 특별히 큰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객석의 누군가가 무대의 사건이나 심할 경우 극장의 관습에조차 상응하지 않는 행위를 반복한다면 어떨까? 당연히 물질적 현실의 비중이 커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요구되는 의식적 노력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극예술의 경우 이런 저항이 너무 커질 경우 추상적이고 불완전한 측면을 지니는 무대 위의 허구적 현실에 대한 경험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과도한 ‘관크’는 주변 관객의 공연 경험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이런 불편함은 그것의 성립을 위해 물질적 현실을 전제하지 않는 다른 허구적 매체, 예를 들자면 영화나 소설 등과 비교했을 때 훨씬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다른 관객이 덜 보이게 함으로써 무대에의 집중력을 증가시키는 조명의 사용이 일반적인 것도 허구의 생성과 관련된 극장 관습을 전제하고 있다.
결국 공연장에서 적절치 않은 관객 태도는 주변 관객에게 드라마적 픽션이 아닌 객석에서의 경험만을 남길 수 있다. 이는 타 관객이 공연을 보기 위해 투자한 것들을 존중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공연이 재생산 불가능한 예술형식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를 발생시킨다. 공연이 현장성을 그 매체적 특성으로 갖고 매개된 예술적 표현들과 그 자신을 구분함에 따라, 모든 공연은 반복될 수 없는 고유함을 가지게 되었다. 같은 제목 하에 같은 규칙들과 약속들에 따라 이루어지는 공연일지라도 그날의 분위기, 관객 태도, 혹은 배우의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 공연이다. 실제로 공연을 녹화해 보았을 때 가시성이 훨씬 강화된 경우에도 실제 보는 것에 비해 뭔가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다. 특히 공연을 즐기는 마니아층 관객의 경우 이런 특성으로부터 큰 매력을 느끼거나 예민한 성격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상황에서 그날 공연의 향유에 영향을 미치는 주변 관객의 태도는 그날 관극의 특성, 이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으며,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경험을 무효화시킨다는 점에서 더 큰 상실감을 발생시킨다.
공연에서 관객의 태도가 중요한 본질적인 이유과 별개로 극장의 물리적 조건에 따른 배려심도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대극장의 경우 그나마 사정이 낫지만, 대부분의 소극장 공연의 경우 좌석 간 간격이 상당히 좁고 좌석들이 줄 단위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여러 가지 문제를 발생시킨다. 옆 관객이 움직일 경우 작은 움직임이라도 바로 옆 관객과 직접적으로 접촉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심한 경우 열 전체가 진동하는 경우도 공연을 자주 관람하는 관객이라면 경험해 봤을 것이다. 그리고 단차의 특성이나 앞뒤 좌석 간의 간격 부족으로 인해 몸을 조금만 앞으로 숙이거나 옆으로 기울여도 뒤 관객의 시야가 심하게 가려질 수 있으며, 뒷 좌석 관객의 무릎 높이가 앞 관객의 귀 높이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약간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조차 앞 관객에게는 귀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큰 소음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극장이 보다 쾌적하고 과학적인 환경을 갖춘다면 참 좋기는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지금 공연중인 극장들을 다시 지으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뿐 아니라 앞서 살펴본 이유들에 따라, 보다 시설이 좋은 극장이라고 해서 가장 시설적으로 부실한 극장과 권장되는 관람 태도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극장 시설과 별개로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해 가능한 범주의 방해 행위에 대해서는 굳이 문제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편할지라도 자신의 행위가 마니아 관객층의 과도한 예민함으로 치부될까봐 웬만해서는 참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필자도 10년 넘게 매주 최소 한 편 이상의, 장르를 불문한 공연을 봐 온 사람인데 주변 관객의 태도를 문제삼거나, 다른 관객에 의해 행동을 저지당하거나, 다른 관객들끼리 이 문제로 갈등을 빚는 것을 본 경우는 손에 꼽는다. 다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있다. ‘예민한 연뮤덕’보다 몰상식한 관객의 수가 더 많다는 것이다. 공연 중 벨소리나 알람이 울리거나, 음식을 먹거나, 앞좌석을 발로 차는 등 상식적인 예의범절을 알고 시작 전 안내방송만 들어도 지킬 수 있는 규칙칙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갑자기 물건을 정리하며 부스럭거리거나 끊임없이 가방을 열고 닫고, 공연 중 휴대폰을 보고, 지인과 대화하는 사람들까지 친다면 몰상식한 관람 태도는 끝이 없다. 그렇다면 관객들을 점점 더 예민하게 만들고, 공연 시작 전부터 방해 행위를 할 것 같은 사람을 경계하는 태도를 발생시킨 것은 과연 누구의 책임일까? 너무나 당연한 상식조차 지키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소중한 시간을 잃어버린 경험을 해 봤다면 누구나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점이 있다. 관객 태도와 관련해 공연예술의 특성이나 역사에 대해 돌아보면, 과연 현재의 한국 공연계가 보다 긍정적인 환경 조성을 위한 건설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지에 대한 회의감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우리가 알고 있는 관극 예절은 ‘예술 연극’의 개념이 발생함에 따라 형성되었다. 이런 연극의 재정립은 관객이나 배우의 태도에만 근거하지 않았고, 제작 주체들의 적극적인 협력을 요구했다. 연극의 사회적 지위나 인식을 고양시키기 위해, 당시 연극 연출가들은 교양 있는 관객들에게 외면받는 연극, 즉 ‘파렴치한 상인들’에게 매수된 소수의 배우들이 무대를 독점하고 ‘위대한 전통이 어느 정도의 부끄러움을 보전해야 할 곳에서 똑같은 어설픈 연기나 투기심리, 똑같은 천박함이 판을 치고 있는’ 연극의 성행을 문제시했다. 이처럼 오로지 매상과 최대의 흥행수익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조합되는 이른바 ‘통속 공연’에 반대한 20세기 연극적 실천들은 극장에서 새로운 규칙들과 윤리를 실행에 옮겼으며, 여기에는 저렴한 관람료, 직원들에 대한 봉사료 폐지, 가족처럼 친근한 공연 분위기 조성 등이 포함되었다. 대표적으로 앙투안의 자유극장을 필두로 한 ‘예술 연극’의 실천자들은 사업이나 이익이 아닌 예술에 의해, 예술을 위해 활동할 것을 거듭 강조하였다. 갈수록 치솟는 티켓 가격, 비합리적인 좌석 가격 분포, 스타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이나 준비 과정 미흡으로 인한 공연 질 하락, 티켓 판매에만 초점을 둔 이벤트의 일반화, 그리고 소재나 서사면에서 확인되는 양산형 작품들의 생산이 과연 과거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 든다. 어쩌면 현재 비판성을 잃은 채 과열된 공연계는 작품의 생산과 유통에서 필요한 진지함을 외면하고 이를 과도하게 관객에게서만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와중에 해당 작품에 대한 이해가 부재한, 가벼운 쇼츠 위주의 홍보, 대중성만을 노린 공연 작품의 희화화 등은 공연 관람에 요구되는 관객 참여에 부합하지 않는 인상을 새롭게 유입되는 관객들에게 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방향 잃은 정보제공은 모두에게 공연 관람에 대한 불만족스러운 인상을 남길 수밖에 없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배려심 있는 공연 환경의 조성을 위해서는 단지 몰상식한 관객, 혹은 예민한 관객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공연계가 어떤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연극이 유흥만을 위한 활동이 아니라 예술적 실천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제작자, 배우, 그리고 관객들의 충실하고 진지한 참여가 요구되어 왔다. 제작자는 이득만을 고려해서는 안 되며, 배우는 엄격한 태도로 자신을 담금질해야 하고, 관객들은 연극이라는 의식을, 그리고 그 의식에 참여하는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은 그 자리에 함께함으로써 이런 규칙들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임을 인지해야 한다. 그것이 관객이든, 배우나 창작진이든 간에 이런 약속이 무엇이며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에 대해 생각한다면 공연의 본질뿐 아니라 그것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고민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그런 고민이 일부 관객의 과도한 자기 검열로 전가되지 않길 바란다.
현대 연극으로 이어지는 서양 연극의 시도들과 관련 사상들을 개론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서적으로 다음을 추천한다.
카트린 노그레트, <프랑스 연극 미학>, 김덕희 외 역, 연극과 인간, 2007.
뮤지컬 잡지 <더뮤지컬>에서 공연 에티켓과 관크 경험을 다루는 기사를 낸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