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살리에르>, 그리고 <사의 찬미>
*앞선 글들에서 다뤘던 것처럼 극예술은 관객의 경험, 가치관, 중시하는 요소에 따라 해석을 얼마든지 달리할 수 있으며, 한 역할에 여러 배우가 캐스팅되는 한국 시장의 특성상 실제로 무대에서 본 것이 배우, 회차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 글의 해석에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이는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며, 본인이 느낀 바가 옳다는 전제에서 참고만 해 주시길 바랍니다. (특히 본 글에서 다룬 작품들은 배우들의 캐릭터 해석, 표현 방식, 상세한 대사나 행동도 상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선정해 다루는 공연들은 그 성공 여부, 완성도와는 별개로 공연이라는 매체를 잘 이용하고 있다고 느꼈으며 해당 글의 주제에 따라 긍정적으로 평가할 여지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글에서는 주로 그 공연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는 지점들이 논의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이 공연을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보았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경험과 해석이 매번 바뀔 수 있는 공연예술의 특성상, 집중할 수 있는 좋은 지점이 분명히 있다면 논의의 가치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예술은 그 무엇보다 ‘행위’를 통해 전달되고 경험되는 예술 형식이라 볼 수 있다. 주인공을 비롯한 인물들의 내적 상태 및 심리, 그리고 그들이 속한 시대나 상황에 대한 정보가 다양한 방식으로 직접 제공될 수 있는 소설이나 영화 등과 달리 극예술에서 관객은 등장인물의 내면에 진입하는 데 한계를 갖는다. 극적 상황은 관객 외부에 존재하는 등장인물의 구체적인 신체를 통해 전달되며, 그 점에서 무대는 현실과 닮아 있다. 아무리 무대가 실제 현실과는 다른 특성을 갖고 관객이 이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 해도, 극예술은 그것이 지금 여기 실재한다는 현실의 특성에서 너무 멀어지는 순간 설득력을 상실하게 된다. 나레이션, 독백 등 정보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무대 특유의 관습들이 있기는 하지만, 공연에서 그 사용이 과도할 경우 이는 관객에게 반감마저 야기할 수 있다. 무대의 등장인물들이 과도하게 단순화되거나 특정한 메시지의 전달이라는 목적에 종속될 경우에도 연극이 현재에 집중하는 예술형식이라는 점과 충돌할 수 있다. 따라서 극예술의 인물들은 연극이 예술적 형식으로서 가져야 하는 방향성 및 일관성, 무대와 현실의 차이 및 재현의 한계, 그리고 그 인물이 현실적이라 여겨질 수 있게 하는 입체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구축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극예술은 전통적으로 인물과 관객 사이의 강한 공감을 발생시킬 수 있는 예술적 형식으로 여겨져 왔다. 배우-인물과 관객이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것은 집단적인 집중력에 힘입어 강한 정서적 동조를 일으키곤 한다. 연극에 대한 비판에 주가 되어 온 윤리적 문제는 이런 공감을 통해 연극이 관객에게 부정적인 감정이나 성정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여기며, 극예술이 발생시킬 수 있는 효과로 제기된 카타르시스도 연민과 공포라는 정서적 공감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질문이 발생한다. 관객의 외부에 존재하는 행위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는 극예술은 어떻게 고유한 방식으로 내면의 재현을 성취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연극의 매체적 특성으로 인해 요구되는 인물의 입체성에 반하지 않으면서도 더 강력한 내적 공감을 발생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이 글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감각적인 현재성을 통해 탐구하는 극예술의 전통 및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오늘날의 사례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위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답은 반-자연주의적인 연극 실천들이 발생하던 세기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징주의 극작가 및 연출가 스트린드베리(August Strindberg)는 주관적인 경험들을 무대의 개념들로 직접적으로 옮기고자 했으며, 이를 표현하기 위해 개인화된 인물의 개념을 문제시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그는 사람들을 과거와 미래의 상태, 혹은 서로 모순적인 요소들의 복합체로서 이해했으며 그의 대표 작품들은 일종의 영적 모험으로써 모든 인물들을 누군가의 정신적 반영물로서 등장시켰다. 그는 이런 시도들을 마치 허구나 꿈이 삶과 뒤섞인 것과 같다고 표현하며, 무엇이 일어나든, 그것이 아무리 낯설든 간에 그것은 자신의 한 측면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때 꿈꾸는 상태는 진실을 추구하는 방식, 무의식의 반영으로서 자신과 소통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여겨진다. 이를 위해 스트린드베리는 “마음의 연극”을 만들고자 했다.
이처럼 세상의 물질적인 재현이 아닌 내면의 반영으로서 무대를 이용하고자 한 스트린드베리는 독일 표현주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연극에 ‘표현주의’라는 표현을 처음 적용하기 시작한 발터 하젠클레버(Walter Hasenclever)는 이를 “영적인 무대를 향한 요청”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이런 표현주의 연극은 인간의 본성을 상징하는 인물들과 장면들을 통해 전개되며, 사회적 문제의 해결이 좌절되는 대신 본능과 영적 재탄생의 가능성이 제기되는 경향을 가진다. 그리고 표현주의적인 인물들은 모방적인 재현을 택하는 대신 자아를 분석하려는 목적에 따르게 되며, 이에 따라 얼굴이 여러 개의 가면들로 사라지는 것과 같은 모순을 나타낸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표현주의 연극의 배우는 이성적이고 의식적인 정신의 측면과 연결되는 개별성 대신 감정과 집단적인 특성, 즉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특성들을 추구하며 언제든 개성을 없앨 수 있을 것을 추구했다.
이런 표현주의 연극은 과잉된 형식적 특성과 클리셰, 혹은 과장되고 가식적이라 생각될 수 있는 주제적인 포부들로 인해 쇠락했으나 그 영향력은 아방가르드 연극으로 이어지며 연극사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연극이 외적인 재현이 아닌 내면의 반영, 특히 이를 통한 본성의 회복에 효과적이라는 인식은 제의적 실천으로서 연극의 뿌리 및 퍼포먼스적 실천들과도 닿아 있으며, 특정한 예술운동이나 실천으로 한정될 필요 없이 집단적인 정서적 반응을 이끌어 허구에 대한 수용, 그리고 이를 통한 자기 이해의 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연극의 특성을 보여준다. 폭넓게 봤을 때 연극은 눈 앞의 대상을 일상적인 현실과는 다르게 보도록 관객을 추동하며, 이를 통해 부재, 내면, 무의식, 가상에 대한 체험이 가능해진다. 오늘날 대학로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인 공연, 분명한 텍스트를 가지고 언어적으로 전달되는 공연조차도 내면의 탐구를 위해 의인화된 비인간 존재 혹은 자아분열 등의 소재를 애용하는 것을 보면 연극의 가능한 효과에 대한 인식이 표현주의적인 전통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공연은 인물의 복잡한 내면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의인화된 이유’를 등장시키는 방식을 택한 공연들이다. 이 공연들은 갈등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유기적인 사건을 보여주는 대신 이미 갈등의 절정 상태에 처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인물을 등장시키며, 그 인물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 그 ‘이유’를 살아 움직이는 인물의 행위로서 표현한다. 이에 따라 인물의 변화는 외적인 행위로 표현되면서도 논리적인 인과관계보다는 자신의 내적인 상호작용으로서 표현된다.
2014년 초연되어 2024년 오랜만에 무대로 돌아온 창작 뮤지컬 <살리에르>는 푸쉬킨의 <살리에르와 모차르트>를 모티브로, 모차르트의 음악으로부터 극심한 질투를 느낀 안토니오 살리에르의 갈등과 파멸을 그려낸다. 이때 모차르트로부터 촉발된 살리에르의 질투심은 ‘젤라스’라는 인물로 구현되고 있다. 이런 의인화된 감정과 등장인물의 상호작용을 통해 <살리에르>는 외적인 형상과 내적 본성 사이의 갈등을 표현하며, 객관적인 현실 대신 인물의 내적 풍경을 무대 위에 구현한다. 이에 따라 무대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 및 배경들은 순수한 외적 현실이 아닌, 인물의 왜곡된 시각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때 무대의 현장성과 사실성은 비가시적인 내적 현실의 역동성과 현존을 주장하는 방법이 된다.
극은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라는 넘버로 시작해 동일한 넘버의 리프라이즈로 끝나고, 실제로 같은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전형적인 수미상관형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두 장면을 구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는 일치하지 않는데, 첫 장면에서는 살리에르가 혼자서 갈등하듯 두 인격을 오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 장면이 살리에르와 젤라스의 대화와 충돌로 묘사된다. 그리고 첫 장면에서는 살리에르가 목에 펜을 꽂아 자해하면 식솔들이 그를 부축해 나가는 것으로 끝나고, 병원에서의 다음 장면으로 연결된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살리에르는 쓰러져 일어나지 않으며, 함께 쓰러졌던 젤라스가 일어나 뒤로 걸어가는 것으로 끝난다. 이때 넘버 제목인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젤라스라는 내면의 파편이 보이지 않는 첫 번째 장면은 비교적 사실적이고 인과적인 흐름으로 다음 장면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이 장면이 외부의 사람들이 보는 살리에르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이런 관점에서 내적 갈등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 즉 한 사람의 망상으로 치부될 수 있다. 반면에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들이 볼 수 없었던, 즉 그들이 모르는 이야기인 내적 갈등이 보여지며 이 갈등으로 인해 살리에르가 몸은 죽지 않았되 본질적으로 변화했으리라는 점을 암시한다.
이런 결말은 관객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는 이를 살리에르가 결국은 질투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표현하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고, 누군가는 이를 살리에르를 모차르트와의 관계 및 질투심으로 기억하며 그 본연의 모습을 잊게 된 후대의 시선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첫 장면에서 살리에르가 보여진 것과 달리 마지막 장면을 통해서는 내적 갈등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실재하며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경험된다는 것이다. 극의 수미상관적 구조는 첫 장면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파멸의 ‘이유’를 뒤로 갈수록 구체화하는 성격을 갖는다. 이는 극의 전개에도 반영된다. 첫 장면 이후 병원에서 살리에르는 아내 테레지아에게 모차르트를 죽인 자가 자신도 죽이러 올 것이라 말하며,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내의 말에 “알잖아, 그가 나타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는 것을” 이라 답하며 과거 회상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그’는 모차르트를 말할 수도, 이로부터 촉발된 젤라스를 가리킬 수도 있겠으나 이 대사 자체로부터 극의 전개가 첫 번째,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그려지는 파멸의 원인을 들여다보는 데 초점을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사실 극 자체보다는 현실적인 맥락과 관련된다. 살리에르와 모차르트의 실제 관계에서는 그 정도로 부정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없으나, 그들의 라이벌 관계와 관련해 당시에 존재했던 루머, 그리고 이로부터 모티프를 얻어 만들어진 창작물들 (푸쉬킨뿐 아니라 피터 쉐퍼의 <아마데우스>, 그리고 이로부터 만들어진 영화도 이런 인상을 부추긴다) 은 살리에르를 생각할 때 모차르트 그리고 질투라는 키워드를 배제할 수 없게 만든다. 실제로 살리에르의 음악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도 한몫 할 것이다.
내면의 질투로 인해 한 인물이 ‘실제로’ 파멸하는 과정을 무대 위에 구현하기 위해, <살리에르>는 젤라스로 인해 살리에르가 보고 느끼게 되는 것들, 즉 그의 내적 상태로 인해 왜곡되거나 비현실성을 띄는 장면들을 현실과 중첩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는 살리에르가 처음으로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 그의 천재성을 발견하면서 젤라스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부터 확인된다. 그 순간, 조명은 푸른 색으로 바뀌고 세 인물 외의 모든 인물들이 정지하며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런 장치들을 통해 관객은 자신이 살리에르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임을 받아들이며, 살리에르의 혼란이 직접 노래로 표현될지라도 이를 자연스럽게 느낀다. 이 넘버가 끝나면 연출은 원래의 사실적인 양상으로 돌아가지만, 젤라스는 남아 살리에르를 도울 것을 제안함으로써써 잠깐 표출되었던 내적 갈등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또한, 이후의 장면에서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의 악보를 훔쳐보고 좌절하자 젤라스는 악보를 훔쳐 모차르트의 경연을 방해하기를 부추긴다. 이후 살리에르가 거리를 방황하며 갈등하는 장면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거리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인물들을 마주하는데, 이들은 각각 그의 지지자이지만 그가 관여된 정치적인 경쟁에 대해 그를 계속 자극하는 슈트라흐 백작, 그의 제자로 애정을 가진 대상인 카트리나, 그리고 그녀와 함께 화기애애하게 스쳐가는 질투의 대상 모차르트이다. 슈트라흐 백작은 음악이 잘 되어가고 있는지 물음으로써 살리에르에게 압박을 주며, 카트리나와 모차르트는 그가 소중히 여기던 것을 경쟁자에게 빼앗길 것이라는 분노를 자극한다. 이처럼 인물이 너무도 불안정한 상태에 시기적절하게(?) 자신의 가장 큰 불안을 마주하는 장면은 실제 현실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내면의 표현에 초점을 둔 극의 특성상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즉 이는 악보를 훔치자는 유혹을 느낌에 따른 살리에르의 갈등을 표현하며, 인물들과의 마주침은 그의 내면에 떠오른 그가 성공해야만 하는 이유, 즉 그가 유혹에 응하게 된 이유를 구현한다. 실제로 이 장면에서는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는데, 놀란 듯 하늘을 응시하는 살리에르의 눈빛은 그가 이를 일종의 신의 계시, 즉 그의 부적절한 생각에 따른 죄의식을 폭로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아닐지 생각하게 한다. 이 모든 표현들이 악보를 훔치는 것에 대한 살리에르의 갈등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그는 거리로 나선 것이 아니라 아직 모차르트의 방에서 악보 옆에 서 있으며, 넘버의 끝, 즉 그가 젤라스로부터 악보를 받아드는 순간 현실에서도 악보에 손댄 것이라고 상상해볼 수도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살리에르는 점점 유혹에 굴복하게 되며, 이는 그와 젤라스의 관계에서의 변화로 구현된다. 1막 마지막 넘버인 ‘신이시여’에서 살리에르는 모차르트에게 음악을 내림으로써 신의 음악을 쓸 수 있으리라는 자신의 희망을 좌절시킨 신에 대한 분노를 토해내며, 젤라스는 질투심에 사로잡힌 살리에르를 에워싸고 억누르며 그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졌음을 표현한다. 특히 이는 젤라스 한 명이 아닌 앙상블 배우들의 안무를 통해 표현되어, 젤라스가 상징하는 내적 갈등의 규모를 물리적인 방식으로 강조한다. 이에 따라 2막에서는 젤라스가 직접적으로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보이게 되는데, 이는 살리에르가 ‘젤라스로서,’ 즉 기존의 신념이 아닌 질투심에 따라 이전에는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게 되었음을 가리킨다.
또한, 젤라스의 영향력은 모차르트의 음악에 대한 그의 진심까지 위협하기 시작한다. 둘의 경연이 이루어지는 장면에서,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의 곡을 듣는 감각은 왜곡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같은 멜로디를 ‘오, 사랑 오, 음악’에서 들었을 때 그는 그 아름다움에 눈물 흘리지만, ‘황제의 사랑’에서는 이로부터 경박함 및 불손한 의도를 확인한다. 이 장면에서 궁중 인물들을 표현하는 앙상블이 1막에서 황제가 보여줬던 경박한 동작들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현실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장면이며,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의 곡으로부터 황제를 욕보이려는 의도를 읽었음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모차르트 본인의 의도와는 별개로 그를 인정하지 않고 폄하하려는 살리에르의 욕망이 반영된 것으로도 생각될 수 있다. 직전 살리에르의 경연곡이 연주되는 ‘황제의 영광’에서 앙상블 배우들이 뚝뚝 끊어지는 안무로 움직이며 지루함을 표현하는 것도,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의 음악에 대한 살리에르의 불안감이 구현된, 과장된 표현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런 살리에르의 불안은 ‘질투의 속삭임’에서 극대화되어, 궁정의 인물들 전원이 그를 비난하는 환영으로 구현된다. 이전 장면들에서 살리에르가 자신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내적 요소들을 상징하는 인물들과 마주했듯이, 이 장면에서 그는 가장 겪기 싫은 패배, 즉 지휘봉을 든 채 카타리나 곁에 있는 모차르트의 모습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 젤라스가 이런 인물들을 움직이고 연출하는 양상은 그것들이 모두 살리에르의 내면의 일부로서 그와 연결되어 있음의 증거이다. 이런 내적 갈등은 살리에르가 젤라스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모차르트를 직접적으로 해하려는 데까지 추락하도록 한다. 이때 모차르트를 찾아간 사람은 젤라스로, 그가 극중 처음으로 온전히 드러났음을 보여준다.
이런 살리에르의 내적 파멸은 흥미롭게도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야 비로소 해소될 가능성을 갖게 된다. 병든 모차르트를 도와 달라는 카트리나의 요청에 살리에르는 그를 찾아가며, 모차르트의 멜로디에 감화되어 그의 작곡을 돕는다. 질투심이 무의미해지는 그 순간 젤라스는 괴로워하며 힘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다시 살리에르의 내적 변화를 구현한다. 하지만 그 결과물인 ‘라크리모사’는 살리에르의 질투심에 다시 불을 붙이며, 젤라스는 되살아나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에게 약을 직접 건네도록 한다. 이는 젤라스가 결국 자신이라는, 지금까지는 부정하고 싶었을 죄책감을 상기시킬 뿐 아니라, 모차르트를 해함에 따라 이상적인 음악에 대한 살리에르의 모든 신념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로써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던 살리에르는 무너지며, 그는 극대화된 내적 갈등 속에서 자신을 조금이라도 지키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이때 살리에르가 자신을 펜으로 찌르는 모습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죽여야만 하는 모순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투쟁에도 불구하고 젤라스는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쓰러진 살리에르를 두고 일어선다. 이로부터 자신의 내면의 특정한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가능할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노력과 인내, 신실함의 가치를 내세우며 모두에게 침착하고 품위 있는 태도를 유지하려는 살리에르에게 질투심은 억압되어야 할 가치이지만, 오히려 그 극단성 때문에 마치 다른 존재인 것처럼 되돌아와 더 큰 파멸을 야기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억압되었다가 돌아온 것이 공포를 야기한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처럼, 사실 이 내적 싸움에서 살리에르의 가장 큰 패착 요인은 그의 엄격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결말은 비록 부정적일지라도 자신의 본능을 발견함으로써 가능한 영적 재탄생을 가리킨다.
한편, <살리에르>의 음악 및 연출은 그것이 인물의 내적 변화를 그려내는 데 주력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이 극에서 사용된 넘버들 사이의 관계는 그것이 인물의 내적 상태 변화로서 일관되게 흘러가고 있음을 강조한다. 살리에르의 신념을 표방하는 대표 선율이라 볼 수 있는 넘버 ‘노력한다면’은 같은 멜로디가 이후 장면들에서 리프라이즈되며 그가 본질적으로 붕괴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같은 멜로디가 사용됨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노력한다면’에서 표현되는, 인내와 노력을 통해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살리에르의 믿음은 ‘흔들리는 마음’에서 좌절을 맛보았으나 노력한다면 여전히 가능할 것이라는, 스스로를 재촉하는 불안한 읊조림으로 변화하고, 결국은 ‘오, 사랑 오, 질투’에서 자신은 실패할 것이라는 좌절로서 표현된다. 이처럼 극의 플롯과 음악적 구성이 인물의 추락을 단계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은 이 극이 인물의 내면을 섬세히 그려내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무대 연출의 측면에서, 젤라스라는 인물은 비현실적이고 역동적인 방식으로 그 영향력을 보여주며 내면의 감각적 구현이라는 목적에 기여한다. 그가 살리에르에게 영향력을 미칠 때 무대 위는 푸른빛, 붉은빛 등의 비현실적인 색채로 채워지고, 균열의 이미지를 담은 조명 효과가 객석 너머까지 펼쳐지기도 한다. 특히 살리에르의 기존 가치관이 신으로 대표되는 올바름에 있다면 젤라스는 이의 반대편에 존재하되, 그 강도에 있어서만은 신을 능가하는 것처럼 묘사됨으로써 살리에르의 변화에 신빙성을 제공한다.
심지어 살리에르의 경쟁자로서 그와 별도의 존재로 등장하는 모차르트조차 살리에르의 내면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방식으로 구현된다는 점은 이 극이 내적 탐구에 목적을 둠을 분명히 한다. 우선, 질투라는 내적인 현상은 쌍방적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모차르트가 결국 파멸한 이유는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음악을 써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며, 이는 경연에서의 실패로부터 극대화되어 살리에르에 대한 질투심에 뿌리를 둔다. 두 인물들은 서로를 질투하고, 이들이 서로를 의식함에 따라 갈등은 지속되며, 이 관계 속에서 둘은 아이러니하게도 서로에 대한 유사성으로 특징화된다. 따라서 살리에르와 모차르트는 질투심으로 연결된 서로의 분신과 같으며, 이에 부합하게 이 극은 젤라스가 살리에르의 것만이 아니라 모차르트의 내면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젤라스가 살리에르의 내적 표현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라 볼 수 없음에도 모차르트가 그의 존재를 알고 의식하는 것은, 질투라는 현상에 필연적으로 내포된 관계를 통해 살리에르의 내면을 여러 인물들을 통해 총체적인 현상, 극적 현실로서 그려낼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뮤지컬 <살리에르>는 무대 전체가 살리에르의 내면을 보여주는 장소로 작동하도록 하는 장치 및 서사를 발전시켰다. 분명 별개로 존재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행동 또한 이런 내적인 풍경에 소속되어 있으며, 살리에르의 내적 요소들을 상징하고 가시화한다. 극의 서사적 구조 또한 인물의 내면, 더 구체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변화 과정을 치열한 갈등으로부터 현재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와 비교될 수 있는 극적 구조 및 방향성을 가진 작품을 하나 더 소개하고자 한다. 이는 2013년 초연된 창작 뮤지컬 <사의 찬미>로, 극작가 김우진과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의 1926년 실종 사건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살리에르>가 불안한 심리 상태를 보여주는 주인공을 등장시키고 이런 그의 파멸을 설명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는 것처럼, <사의 찬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부상당한 한 사내가 남자와 여자(김우진과 윤심덕)의 동반 투신 소식을 전하는 전보를 읽으며 그 사건에 담긴 말할 수 없는 비밀에 대해 암시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끝난다. 이어지는 장면들은 과거와 현재 (극의 시작 지점)를 오가며 이들이 왜 사라져야 했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이때 우진과 심덕이 바다로 뛰어들어야 했던 이유는 ‘사내’라는 미스터리한 인물로 의인화되는데,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처럼 극중 등장하고 두 인물들과 교류하면서도 인물들을 갈등으로 몰아가는 방식의 측면에서 내적 요소로서의 특성을 계속 드러낸다. 단 <살리에르>의 젤라스가 부정되어 온 내면의 욕망, 즉 질투심을 구현한다면, <사의 찬미>의 ‘사내’는 개인의 존재에 내재해 있는 벗어날 수 없는 환경, 즉 시대적 배경을 구현하며 이에 따라 이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주체성을 주장하려는 갈등을 발생시킨다.
이들의 관계는 1921년, 우진이 ‘한명운’이라 자신을 소개하며 희곡을 함께 쓸 것을 제안하는 사내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이들은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조선인이라는 동질성 그리고 시대에 맞서 저항하려는 진보적인 성격에 따라 급속히 가까워지며, 대본 집필 과정에서 도쿄에서 유학 중이던 심덕을 만나 조국 투어 무대에 서 달라고 제안한다. 그런데 이후 시작된 작업 과정에서 인물들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흐르게 된다. 한명운이 구상한 희곡의 내용은 우진과 심덕의 삶과 완전히 닮아 있으며, 그 과정에서 이들이 숨기고자 했던 비밀들이 드러나 불안감을 자극하게 된다. (특히 희곡의 등장 인물이 김우진과 같이 부르주아에, 아내와 애인이 있다는 점은 그와 윤심덕의 관계를 위협할 수 있는 것으로 등장한다.) 또한 한명운은 심덕과 그가 친구 이상의 가까운 사이라 보이게 하는 장면들을 만들어 우진의 불안 및 질투를 자극해 인물들 사이의 갈등을 유발한다. 이들의 갈등은 한명운이 구상한 희곡이 과도하게 비극적인 결말로 향하게 되면서 절정에 이른다. 자신 그리고 심덕과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비극적으로 끝난다는 것을 거부하듯, 우진은 한명운에게 더 이상 협력하지 않겠다 선언한다. 하지만 이들이 헤어진 후에도 그에게는 글들이 배송되고, 그는 그것들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다. 그러던 중 그에게 도착한 희곡 ‘사의 찬미’를 통해 우진은 여전히 한명운이 자신과 심덕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스스로의 행동이 희곡의 내용과 일치함을 알게 되고, 지금처럼 가다가는 그들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될 것임을 깨닫는다.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는 부산을 향해 출발하는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에 탑승하고 심덕을 만나 새로운 결말을 쓰기로 한다. 이들은 사내가 구상한 결말, 즉 심덕이 우진을 총으로 쓰고 이에 좌절해 자살하는 결말을 거짓으로 연출한 다음 사내로부터 도망치며,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다.
앞 작품과 마찬가지로, 사내는 우진의 내면을 외현화된 낯선 형상으로 그려내는 역할을 한다. 그는 한명운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하지만 이는 거짓이었으며, 그가 이전에도 수많은 인물들의 파멸을 야기한 존재라는 점에서 비현실적, 비인간적인 요소를 의인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일정 장면에서 그림자를 이용한 연출이 두드러지며 사내가 우진과 심덕에게 거대한 영향력을 뻗치는 양상이 시각화되는 것, 그리고 사내가 총을 맞아도 죽지 않으며 빈번히 녹색 조명 하에서 드러나고, 손만 무대 위로 등장하는 등의 섬뜩한 연출은 그의 비인간성을 강조한다. 또한 그가 말한 적도 없는 우진의 비밀이나 가족관계를 알고 폭로하는 것, 그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글들을 우진이 홀린 듯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것, 그가 인물들을 파멸시키는 방식이 결국은 모두 그 개인들에게 실제로 존재하는 과거와 욕망, 불안을 자극하는 방식이라는 점 등도 사내와 우진의 내적 관계를 보여준다. 이런 관계 속에서 우진은 사내와 대적함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파멸을 스스로 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이들의 무대 위 상호작용은 가시화될 수 없는 내적 갈등을 시각화한다. 더불어 사내가 갖는 특성, 즉 당대의 현실을 반영해 비극적인 결말을 써야 한다는 회의주의, 그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여러 사람들 곁에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리라 말하는 듯한 강력한 힘은 그를 개인에게 내재한 보편적인 요소, 즉 어떤 시대를 살아감으로써 발생하고 자신을 구성함에도 통제 범위를 벗어난 시대적 속성을 가리킨다. 따라서 우진과 사내의 갈등은 자신과의 싸움인 동시에 시대에 저항해 자신의 주체성을 주장하려는 싸움이며, 자신의 삶을 자신이 뜻하는 대로 주도할 수 없다는 보편적인 내적 갈등과 연결될 수 있다.
이처럼 연극이 비가시적인 내적 현상을 무대 위에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은 <사의 찬미>에서는 이들이 바다로 뛰어든 ‘진짜 이유’가 밝혀지지 않으리라는 점과 관련해 중요하다. 사내는 자신의 의도대로 전개되지 않은 결말을 태워 버리며, 후세는 이들의 행동이 현실에 대한 비관이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좌절 때문이기보다는 주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행동이었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무대의 현재성은 이런 가상의 가능성을 인물들 사이의 관계 및 행동을 통해 실재하는 것으로 그려낸다. 이를 통해 관객은 알려진 현실, 그리고 인물들을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대신 보이지 않는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 그 점에서 필자에게 이 극은 다소 아쉽게 느껴지는 점도 있었는데, 현재와 과거를 계속 오가고 장면들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들 중 많은 부분들이 우진의 서술을 통해 전달되다 보니 사내라는 의인화된 추상적 존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위를 통한 전달이 한정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유사한 구조와 표현 수단을 가진 <살리에르>와 비교했을 때, 그 극은 모든 장면들을 인물들의 내적 반영으로서 새롭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 데 반해, <사의 찬미>에서는 인물의 내적 상태가 직접적으로 서술되고 장면들은 직설적인 외적 현실로서 느껴지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두 작품에서 모두 비사실적인 표현들이 인물들의 내면에 대한 이해를 복잡하고 역동적으로 만들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로도 적용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관객은 억압된 욕망 및 그것의 위험성, 그리고 자신이 과연 자신이 삶을 온전히 주체적으로 영위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것이 무대 위의 현장성을 통해 실감나게 연출된다는 점은 보이지 않는 내적 갈등의 존재를 더욱 실감하도록 한다.
이런 작품들을 보다 보면 인간에 대한 극예술의 뿌리깊은 탐구가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공연들에도 반영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흔히 공연은 현실을 모방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극예술의 독특한 매체에 대한 탐구는 그것이 오히려 보이지 않는, 혹은 비현실적인 현상들의 경험을 가능하게 함을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해 왔고, 그렇게 만들어진 기법들은 아직까지 작품들 속에 녹아들어 있다. 또한 내면의 가시화를 위한 비현실적 표현들 및 인물 설정이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지고 호응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은 자신에게서 낯설고 위협적인 요소들을 발견하는 성찰이 공감을 받을 수 있는 현상임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이런 극을 통해 우리는 현실, 그리고 자아를 보이는 것보다 복잡하고 갈등들 사이에서 작동하며 시점과 상태에 따라 다르게 경험될 수 있는 유동적 존재로 보는 연습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사진 출처
뮤지컬 <살리에르>: HJ컬처(주) X 계정 (@HJCULTURE), 오마이뉴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img_pg.aspx?CNTN_CD=IE003335994)
뮤지컬 <사의 찬미>: 더뮤지컬 (https://www.themusical.co.kr/Magazine/Detail?num=3514, https://www.themusical.co.kr/Magazine/Detail?num=3469), 아트인사이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66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