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그룹, <Brachiation>
‘브래키에이션(Brachiation)’이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단어에 참 생경하게 느껴졌다. 작품 설명을 읽어보니, 이는 과거 유인원들이 먹이를 찾아 나무에서 나무로 이동하던 행동 양식을 가리키며, 인류가 생존을 위해 실행한 ‘첫 진화적 움직임’으로 알려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작품 제목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진화’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극장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공연을 보았을 때, 그 생각이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는 <브래키에이션>이 진화하는 신체의 현재성에 주목함으로써 ‘진화’라는 개념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들을 비판적으로 해체하는 작업을 수행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는 무대의 현재성이 언어와 관습에 따라 만들어진 한정된 시각에 맞서 규정되지 않는 현상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되었다.
공연은 온통 하얀 무대에서, 무용수들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들은 마치 나뭇가지처럼 늘어진 줄에 걸어놓은 옷을 보고 있으며, 그것이 내려지면 각자 옷을 입는다. 이후 그들은 무대 위를 오가며 작은 움직임을 반복한다. 그 움직임은 얼굴이나 몸의 미세한 떨림, 진동, 시선의 이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시도 멈추지 않는 유기체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이어 움직임은 점차 증폭되기 시작하며, 무용수들 간의 접촉과 상호작용을 통해 다소 폭력적인 양상을 띄기 시작한다. 이들은 서로를 땅에 끌고 다니거나, 타고 오르기도 하고, 서로의 무게를 이용하며 땅으로 떨어지고 다시 끌어올려지는 역동성을 보인다. 어딘가로 걸어가는 행위 하나조차 신체에 매달린 다른 신체들의 무게감으로 인해 강한 저항감을 가진 채로 진행된다. 무용수들 중 한 명이 들어올려져 고요한 장면을 연출하는 와중에 약동하는 신체의 다양한 이미지들이 비춰지는 것은 현재하는 신체에 내재해 있는 갈등과 역동성을 강조한다.
이런 움직임의 성격에 따라 무용수들은 그 자체로 별개의 존재인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려지며, 상이한 움직임들의 집합체로서 그려지게 된다. 이들은 직접적으로 접촉해 있지 않을 때도 서로의 분신처럼 거리를 두고 대칭적으로 움직이거나, 무대 위 어느 한 지점에서의 충격이 다른 지점에서의 움직임으로 연결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게 어떤 신체는 단일체로 축소될 수 없는는 모순 속에서 격렬한 갈등 속에서 존재하고, 이에 따라 변화 가능한 존재로서 그려진다. 다시 말해 신체적 변화는 단일한 흐름, 결과, 혹은 존재로 환원될 수 없는 현재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은 어느 한 움직임, 혹은 거기에 관여하는 신체적 부분도 허투루 볼 수 없는 강력한 현재성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현재성은 어떤 대상을 명확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모호하고 유동적인 것으로 경험하게 만들며, 그렇게 공연의 강렬한 현존은 오히려 비정형의 갈등 속으로 관객을 이끈다.
이는 공연 중 귀를 찌르는 소음과 함께 한 무용수만이 선 채로 남고, “이것은 진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는 문구가 비춰지는 것에서 절정을 맞는다. 진화는 신체를 어떤 목적이나 상황에 더 적합하도록 만드는 진보적인 과정, 그리고 선형적인 시간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 공연에서의 움직임들은 시간의 흐름보다는 지금 여기, 그리고 여기서 이루어지는 움직임들이 조화로운 흐름 속에 있는 것으로 감상되기 어렵게 하는 현재의 저항을 보게 만든다. 따라서 이 공연에서 지금 여기 존재하도록 그려지는 ‘진화’는 현재성을 배제하며 개념화된 ‘진화’와는 구분되어야 하는 현상 자체에 주목한다. 일관된 개념을 통해 구체화될 수 없는 이 ‘진짜 진화’는 분명히 포착될 수 없는 것이지만, 신체의 역동하는 생명력을 통해 그 존재를 증언하게 된다.
이를 통해 <브래키에이션>은 격렬한 움직임으로 점철되어 있으면서도 진화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존재들에 대한 다소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진화라는 개념이 어떤 목적을 향하는 경쟁과 진보의 의미를 담고 있을 때 이는 승리자와 패배자, 진화하는 자와 도태된 자의 개념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신체 자체에 새겨진, 멈추지 않는 변화의 가능성은 그것이 실패할지라도 그 존재를 강력하게 선언한다. 이것이 진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선언이 이루어진 후 무용수는 마치 날 수 없는 새처럼 옆으로 꺾어 든 팔을 휘젓고, 넘어지고 일어서는 동작을 반복한다. 다른 무용수들도 어깨를 이용해 팔다리가 없는 것처럼 기고, 일어나 걷고, 뛰는 등 움직임을 보여준다. 실패한 진화를 포함해 굉장히 전형적인 진화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이런 동작들은 이것이 진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선언을 접한 후에는 필연적으로 다른 시선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원을 그리며 뛰기 시작한 무용수들에게서는 일관된 우월성 혹은 도태의 표현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자리를 바꿔가며 달리고, 이들이 무대 위에서 움직인 동선의 흔적들은 그것이 어떤 목적을 향한 과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아름다운 영상으로 만들어져 띄워진다. 그렇게 <브래키에이션>은 미래를 향하는 신체가 아닌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며 정말 생생히 ‘살아 있는’ 신체를 보여주며 진화의 성공 혹은 실패가 아닌 신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한다.
고스트그룹은 류진욱과 김혜윤을 주축으로 만든 아트 그룹으로, 희미하게 빛나며 실체가 없는 것을 뜻하는 단어인 'ghost'에서 착안하여 추상적인 개념들을 구체화하고 분명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만든 창작그룹이다. 이를 위해 현상학적으로 설명되지 않은 삶의 현상들을 '현존하는 몸'으로 풀어나간다.
2017년 창단 이후 <TWO-GATHER>, <관계의 기술>, <희년연구>, <AURA>, <브래키에이션> 등 작품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