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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원상 Nov 29. 2023

에이징 커브, 슬퍼할 일이 아니야

페이커, 메시, 호날두, 신유빈 다 나오는 글

나이듦은 거의 모든 종류의 퍼포먼스에 저하를 가져온다. 퍼포먼스 발휘를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스포츠 세계에서 나이는 너무나도 잔인할 정도로 솔직하다. 나이에 따라 신체능력과 판단력을 요하는 종목은 퍼포먼스가 선형적으로 감소하고 성과 역시 이에 따라 줄어든다. 종목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20대 중후반에 전성기로 여겨지며 앞자리 숫자가 바뀌면 서서히 내리막을 탄다고 본다. 심지어 두뇌만 쓰는 바둑만 하더라도 전성기는 20대 초반이다.


각계각층에서 나온 출연자들이 두뇌싸움을 벌이는 정종연 피디의 '지니어스'를 즐겨봤다. 거기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이거다. 한의사 출연자 최연승이 탈락자를 정하는 데스매치에서 카이스트 대학생 오현민과 붙었던 순간이었다. 오현민의 대담하고 거침없는 게임 플레이에 최연승은 패배한다. 최연승은 30세, 오현민은 19세였다. 최연승은 "평범함이 비범함을 이긴다는 게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의 눈물의 이유는 단순한 패배의 쓴맛을 토로하는 게 아니었다. 지적 능력의 감퇴, 에이징 커브에 대한 한탄이었다. 그는 "나도 현민이 같이 겁 없이 당차던 때가 있었고 그런 때가 있었는데 그런 것들을 잃어가는 시점에 지니어스에 나오게 되니까 그냥 그런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다시 한번 나도 그런 사람이 돼야겠다"라며 말했다. 오현민에게 마지막 인사는 "나는 네가 되고 싶었다는 거를 꼭, 알았지?"였다.



일상다반사 누구나 에이징 커브를 체감하는 순간에 마주하면 말할 나위 없이 멜랑콜리한 기분이 든다. 평소 즐기던 운동에서 예전 같지 않음을 체감하거나 이전에 없던 신체적, 정신적 변화를 마주할 땐 필멸적 존재로서, 자존감이 붕괴된 느낌을 받는다. 하물며 평생을 한 종목에 헌신한 프로 선수가 에이징 커브레 마주할 때 겪는 기분을 말로 형언할 수 있을까.


두뇌 활동과 빠른 신체 동작을 요구로 하는 e스포츠는 에이징 커브가 더 드라마틱하게 드러난다. 매우 잔혹한 직업이다. 프로게이머 통계는 20대 중반만 해도 노장이라고 분류한다. 대부분 18살 전후로 데뷔하고 20대 초반에 절정을 맞는다. 20대 중후반까지 프로선수로 생활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 어린 나이에 프로의 길에 들어서서 비교적 짧은 선수생활을 지낸다. 평범한 분야에서는 사회에 진출할 매우 젊은 나이지만 e스포츠에서는 현역에서 물러나고 인생 2막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다. 압축된 커리어 시간에 e스포츠 선수가 짊어지는 부담은 얼마나 막강할까.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프로게이머인 페이커도 불사대마왕인 동시에 사람이다. 에이징 커브를 겪어야 했다. 그도 여느 게이머처럼 2013년 16살 나이로 프로에 뛰어들었다. T1에서 2013년 화려하게 데뷔했던 그는 데뷔년을 포함해 2015, 2016년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을 3차례 우승했다. 롤(LOL)은 곧 그를 가리키는 게임이 됐다. 게임에 관심 없어도, 롤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인물이 됐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페이커의 시대도 한 번 저물었다. 2017년 월드 챔피언십 결승에서 3:0으로 패한 뒤 곧장 테이블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공개석상에서 눈물을 흘린 건 처음이었고, 그 눈물은 마치 그의 전성기가 지났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후 페이커는 세계 챔피언과 거리가 멀어졌다. "페이커는 다시 우승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주장을 타당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페이커를 e스포츠의 원로로 추대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함께하는 동료들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그동안 페이커는 팀에서 홀로 그 중심을 지켰다. 그는 제우스, 오너, 구마유시, 케리아와 탄탄한 팀을 구성했다. 그렇게 마지막 우승 후 6년 만인 2022년 결승전에 올랐다. 그러나 결승서 아쉽게 2:3으로 패했다. 이번에 페이커는 울지 않았다. 패배가 확정되자 고개를 돌려 가장 먼저 팀원들의 표정을 살폈다. "얘들아, 잘했다. 고생했다. 너무 아쉽다. 잘했어 근데"라며 위로했다. 마음껏 패배를 슬퍼할 수 있었던 청년은 어느덧 가장 경험 많은 리더가 되어 동료의 슬픔을 먼저 헤아릴 수 있는 선수가 됐다.



졌던 꽃은 다시 핀다. 페이커의 2막은 결승전 패배에서 다시 시작했다. 똑같은 팀원들과 1년 만에 다시 결승에 올랐다. 페이커는 토너먼트서 중국 팀들을 상대로 파죽지세로 리드하며 팀에게 완벽한 승리를 가져왔다. 사전 영상에서 "4번째 우승은 우리 팀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공언한 것처럼 우승이 확정되자 팀원들과 모여 서로를 축하했다. 월드 챔피언십에서 가장 많은 나이로 우승한 선수며, 최초의 역대 4번째 우승 선수가 됐다. 


페이커의 4번째 우승이 확정되자 중국 해설진의 축전이 가슴을 울렸다. 


축하합니다 T1! 제우스, 오너, 페이커, 구마유시, 케리아 2023 월즈 챔피언입니다! 10년 전 LA 스테이플스 센터 10년 후 서울. 여전히 이 남성이 4명의 선수들과 함께 소환사 컵을 들어 올립니다.

11년의 시간 동안 페이커의 팀원은 15번 바뀌었지만 그는 이 15명의 선수들과 함께 본인 통산 4번째 월즈를 들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경기 전 티저에서 말한 네 번째 우승은 우리 팀을 위한 것처럼 말이죠.

우리는 편도 승차권을 가지고 시간이라는 이름의 열차에 올라타게 됩니다. 인생이란 가끔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하는 여정처럼 보이지만 페이커는 노력과 열정으로 계속해서 우리에게 시간의 무게가 휩쓸고 지나갈지언정 오직 자신만큼은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나가고 있습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축구 역사상 최고의 라이벌리이자 불세출의 주인공들인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모두 16강전에서 나란히 탈락했다. 각각 31세, 33세였고 월드컵 통계와 역사는 그 둘이 마지막 월드컵임을 공고히 보여줬다. 두 선수의 데뷔와 전성기 그리고 황혼기까지 함께한 축덕으로서 두 선수의 시대를 떠나보내며 시원섭섭한 기분으로 글을 썼던 기억이 있다. 언론에서도 메날두의 시대는 갔다는 헤드라인을 썼다.


그러나 두 선수는 보란 듯이 다음 대회인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 출전했다. 여전히 세계 최정상의 지위 그대로였다. 그리고 이 대회서 메시는 거대한 낭만과 감동 때문에 오히려 현실감 없이 느껴졌던 내러티브를 써 내려가며 끝내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그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메시의 전성기는 언제라고 해야 할까. 



탁구 신동으로 시작해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가 된 신유빈 선수가 2020년 도쿄 월드컵에서 흥미로운 상대를 만났다. 룩셈부르크 니시아리안 선수인데 나이가 당시 58세였다. 1991년 룩셈부르크로 귀하하기 전 중국 국가대표로 세계 랭킹 6위까지 올랐던 경쟁력 있는 선수였다. 올림픽 4년 전 세계 대회에서 신 선수를 상대로 이긴 경력도 있었다. 17세였던 신 선수와는 무려 41살 차이였다. 세계 정상의 무대인 올림픽에서도 매우 보기 드문 경우였다. 접전 끝에 승리는 신 선수에게 돌아갔다. 나이 차이로 큰 이목을 끌었던 경기 후 니시아리안 선수는 인터뷰에서 신 선수에 대한 칭찬과 함께 이와 같이 말했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보다 젊어요. 도전을 멈추지 말아야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즐기는 것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인류 문명 발달사는 인간이 중력을 어떻게 극복했는가의 역사로 치환할 수 있다. 개인의 인생은 에이징 커브에 어떻게 대처했는가로 치환하는 건 어떨까. 시간의 편도 열차에 탄 우리는 결코 나이듦과 노화를 거스를 수 없다. 주어진 숙명에 거스르자는 얘기가 아니다. 주어진 신체 조건과 축적된 경험에서 조화로움을 찾아 최우선의 결과를 내는 방법이 무엇인지 최선을 다해서 고민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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