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불현듯 '나'에 대한 회의와 의문이 들고 우울해져 본 적 있나요
잘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것에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여행도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동유럽은 내가 습득한 지식에서 꽤 벗어나 있었고 내 생애 패턴에서도 가볼 기회가 없었다. 동유럽이란 공간을 가보기로 했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내겐 마치 돈이나 시간을 쓰면서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았다. 누가 나올지 모르는 소개팅에 나가는 마음으로, 초등학교에서 새 학년 들어 새로운 반 배정받는 심정으로, 사전 정보가 전혀 없이 새로운 사교모임에 나가는 마음으로 동유럽 여행을 결정했다.
여행의 환희, 두근거림, 도파민과 엔도르핀만 있으리라는 기대는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시작으로 체코 프라하까지 오스트리아 빈으로의 여정을 앞두고 돌연 기분이 멜랑콜리해졌다. 돌연 수면 위로 올라온 이 감정의 원천은 무엇일까. 여행이 마련하는 설렘의 화수분 근처에 누가 우울의 심연을 가져다 놓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여행은 계속 흘러가야 했다.
여행이 시작된 후 며칠 만에 여러 사소하거나 거대한 일대기 속 수많은 사건을 독해했고 수많은 인물을 알았고 그 이야기를 듣거나 읽었다. 동시에 비행기와 버스로 이동 중에 열심히 읽고 있던 은희경 작가의 ‘소년을 위로해줘’에서 프란츠 카프카가 비중 있게 나와 흥미롭던 차에 프라하성 황금소로에서 카프카를 우연히 만났던 일, 존 레논의 사상과 가치가 응집된 벽을 마주하거나 얀 후스라는 종교 개혁가의 인생을 알게 되고 자유와 신념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이들의 역사를 접했다. 거대한 역사가 한꺼번에 굴러들어 오면서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됐고 노력해서 말을 붙이기도, 반대로 과감히 말을 줄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사람도 있었지만 인생 컬러북에 칠해온 색 배합이 완전히 달랐던 사람도 있는 것도 당연했다. 구공산권 국가 특유의 음울함과 콘크리트가 내뿜는 회색 기운이 이따금 흐린 날씨와 맞물린 탓일까 머릿속 긍정 회로도 쇼트 날 위협에 쉽게 놓였다. 쉴 새 없이 낯선 인문들이 눈과 귀로 쏟아져 범람했고 동시에 그것들이 익숙해질수록 흥미가 생겼지만 속은 복잡해지고 마음은 생경해 지치지 마지않을 수 없었다. 여행이 제공하는 외면의 자극에 집중하려다가 오히려 내면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우울과 고독의 심연이 열렸는데, 이에 대응할 시간과 여유는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처럼 자고 일어나니 해충이 되었고 연고 없는 중부와 동부 유럽 일대를 돌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소설에선 해충으로 변한 주인공이 혐오받기 시작했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어디나 있는 파리처럼 나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상황이었다.
나는 김원상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발생한 재화를 들고 유럽에 수송하는 외화 유출자였고, 여행사의 수익에 이바지하는 충실한 소비자였고, 각 나라 지역 경제와 관광 상품의 타깃이었고, 여행에 처음 알게 된 이들에겐 각자의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판단과 편견의 대상이 되는 하나의 여행객에 불과했다. 내 생각과 마음과 별개로 낯선 존재와 관념이 상관없이 흘러 오고 흘러갔다. 내 의지와 선호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다. 주변 환경은 인식론적으로 과부하를 가져오는 동시에, 일상과 박리된 일정은 내 실존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했고 나다움을 위협하는 외부 세계의 큰 도전을 느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체험한 고독을 이렇게 정리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울감이 근원에 대해 고민했던 이를 알게 됐고 그 힌트도 얻게 됐다. 프라하성 황금소로에서 만난 카프카에 관해 정보를 찾다가 우연히, 어쩌면 검색 알고리즘 상으로는 매우 필연적으로, 에리히 프롬의 이론에 가 닿았다. 구원의 손은 그의 철학을 농축한 서적 '사랑의 기술‘이란 책으로부터 불쑥 튀어나왔다. 그는 인간이라면 살면서 느낄 수밖에 없는 고독이 항상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인간은 괴로운 고독을 극복하려고 하면서 둘 사이 긴장과 갈등이 있는 것이다. 과감히 표현하자면 인간의 역사란 실존적 고독을 느끼는 인간과 그 고독을 극복하고자 하는 과정이었다.
쉽게 말해 보자. 인간이라면 사노라면 주변 모든 것들과 분리된다. 그리고 이에 따라 필연적인 고독이 따른다. 평생 함께할 것 같은 가족, 친구, 연인과의 관계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내가 사는 동네, 나라, 회사 역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와 관련 없는 것이 되기도 한다. 프롬은 이럴 때마다 우리가 겪는 정체성 혼란이 있고 이를 실존적 고독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했다. 나는 예상치 못하게, 다른 시간대, 낯선 문화, 친숙한 콘텐츠가 없는 곳에 낯선 사람들과 지내야 하면서 한꺼번에 우울감에 휩싸인 것이다.
낯선 땅, 낯선 문화, 낯선 이들과 며칠을 보내면서 이성이 작동하는 방식에 적용되는 법칙도 달라진다. 연유는 다양하다. 우선 나와는 전연 상관없는 대상들의 장엄함을 마주한 일. 동유럽 역사에 기록된 지극히 숭고한 한 인물이 보여준 진리와 선에 대한 초월성, 그것들을 기리는 사람들의 위대한 사랑과 존경, 길고도 짧은 시대 사이에서 춤을 추듯 본연의 색깔과 모습을 바꾸는 문화와 예술의 그러데이션. 내 마음이 가는 곳을 발견하는 동시에 내 마음이 갈 수 없는 곳이 있을 수 있다는 당연한 깨달음. 잘못하지도 않았거나 의도하지 않은 나의 행동 혹은 존재로 누군가의 의뭉스러운 눈빛과 석연치 않은 화행을 눈치채지만 모른 척하거나 무시해야 하는 여정의 순간. 이렇듯 복합적이고 불안정한 순간순간에 던져지면서 기분은 더 오묘해지고 오묘는 층위를 더해간다. 우울감과 고독을 손으로 잡으려고 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면서 더 우울해지고 고독해지려던 차에 프롬의 언어를 빌려 실존적 고독이었음을 깨달았다.
다행히 프롬은 그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면 해결책도 권한다. 책 이름인 사랑이 그 정답이다. 프롬은 우리가 성숙한 사랑을 한다면 실존적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기주의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대상을 향한 성숙한 사랑은 인간성을 지키고 나다움을 지속게 하고 온전한 통합을 이루게 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기술'은 결국 실존을 위한 지침서였다. 이기적 목적을 달성하기엔 이타성이 해답이라니 어찌 참!
실존적 고독을 느낀 나는 성숙한 사랑을 하지 못했던 걸까.
다행히 여행이 주는 산뜻함과 감동도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사람 중 기억에 남는 인물 중 하나는 체코의 위인 얀 후스다. 좁은 의미에서 그를 바라보면 구교에서 신교가 갈라져 나올 수 있게 한 초기 종교개혁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주는 가르침과 메시지는 종교인을 넘어 후대에 거대한 메시지를 던진다. 지금은 무교 비중이 가장 큰 체코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고 가장 상징적인 귀감이 되는 위인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교회의 부당한 권력과 부정의에 대항하다 권력의 위협을 회피하거나 자기 안위를 만회하려 하지 않다가 결국 화형으로 세상을 떠났다. 프라하의 구시청광장에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얀후스의 기념비엔 그의 죽음이 응축한 그의 메시지가 굳게 새겨져 있다. "서로 사랑하라. 모두에게 진실을 요구하라."
결국 다시 사랑이다. 나의 실존과 세상의 진실을 존중하고 지키는 일은 같은 길에 있다.
은희경 작가가 '소년을 위로해줘'를 마치며 남긴 글을 발췌한다. 성숙한 사랑에 한 가닥 의미를 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여행 중 나 역시 위로를 받았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