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 오리, 은행나무에 담긴 흥미로운 이야기
스티븐 제이굴드의 “진화는 진보가 아닌, 다양성의 증가다”라는 인용으로 진화론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다. 단순히 명목상으로 이 명제를 이해하고 있었다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정리해본다.
오리는 참 귀여운 동물이다. 동그란 눈, 오동통한 몸매, 호수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모습까지 무해하고 자꾸 지켜보고 싶다. 카이스트 오리정원에서 오리가 거위와 함께 거니는 모습이 보이면 항상 가던 걸음을 멈추게 된다.
거위나 고니와 나란히 있는 걸 보면 자연스럽게 이렇게 생각했다. “얘네는 한 가족이겠지.”
하지만 생물 분류학을 익히면서 들은 첫 충격은, 오리는 사실 고니나 거위보다 분류학적으로 더 넓으면서 동시에 배제의 방식으로 정해진 무리라는 것이었다. 오리는 오리과의 새들 중에서 고니류나 기러기류에 해당하지 않는 오리과 생물을 일컫는 일반적 명칭이다. 쉽게 말하면, 오리과에서 ‘고니도 아니고, 거위도 아닌 나머지’가 몽땅 오리인 셈이다. "이거 제외하고 저거 빼내고 남음 놈들은 다 오리라고 불러!"니까 오리 입장에선 충분히 섭섭한 분류다. 아무튼 고니와 거위는 같은 계통으로 묶이고, 오리는 그보다 덜 가까운 친척이라는 얘기다.
귀여운 겉모습이 닮았다고 해서 가까운 혈연이라는 보장도 없다는 걸, 오리를 검색해보다 일깨웠다.
외연에서 느껴지는 직관적 공통점이 주는 반전은 진화론의 세계에선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진화는 내 예상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전혀 다른 생물이, 서로 다른 조상에서 출발했는데도 비슷한 모습에 도달한 경우들. 게처럼 생긴 것도 대표적인 사례다. 게처럼 생긴 생물들이 많은 이유도, 그 모든 종이 다 게라서 그런 외형을 갖춘 게 아니었다.
게는 특유의 모습 덕분에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납작한 등딱지, 옆으로 걷는 다리, 커다란 집게발. 하지만 이 ‘게처럼 생긴’ 생물들 중, 실제로 진짜 게는 얼마 없다. 완전 충격.
예를 들면,
• 왕게(King crab): 이름에 게가 있지만, 진짜 게가 아니다.
• 은둔게(Hermit crab): 껍질 안에 들어가는 귀여운 녀석도 진갑강류가 아니다.
• 가재, 털게, 짧은꼬리 게들도 각자 다른 조상에서 출발했다.
과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게화(crabification)’, 즉 게처럼 반복적으로 진화하는 현상이라 부른다.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바다나 해안 환경에서 ‘게 형태’가 생존에 유리하다는 결과다.
납작한 몸은 바위 틈에 숨기 좋고, 집게발은 방어와 사냥에 유리하며, 단단한 껍질은 포식자로부터 몸을 보호해준다.
진화는 말하자면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이 모양이면 살아남기 쉽더라. 또 만들어볼까?”
게라는 형태는 수억 년에 걸쳐, 전혀 다른 생물들에게서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이건 진화가 어떤 ‘해답’을 유독 선호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노랗게 물든 가로수 아래를 걷다 보면 우리가 흔히 마주치는 은행나무. 하지만 이 나무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남은 계통의 생존자다. 다시 말하면, 가로수에 있는 다른 나무와 근본적으로 매우 다르고, 심지어 산에 있는 다양한 나무들과도 '나무처럼' 생겼다는 것 이외의 공통점이 많지 않다는 것.
은행나무는 단일 종이며, 단일 속, 단일 과, 단일 목, 단일 문에 해당한다. 과장하자면, 식물계의 ‘외톨이 왕족’이다. 호모 사피엔스 세상에 원시시대 유인원 한 종이 번성하면서 인간처럼 행동하고 산다고 해야할까.
은행나무의 학명은 Ginkgo biloba, 현존하는 단 하나의 종, 생물분류체계 '계문강속과속종'에서 자기 혼자서 하나의 문(門)을 차지하는 식물이다.
화석 기록에 따르면, 은행나무목은 2억 7000만 년 전부터 존재했다. 공룡과 함께 살았고, 백악기 대멸종과 빙하기, 인류의 출현까지 버텨낸 진정한 '살아 있는 화석'이다.
우리는 흔히 진화를 다양성을 확장하는 과정으로 배운다. 시간이 지날수록 생물은 점점 더 다채로운 모습으로 나뉘고, 그 결과 오늘날의 풍부한 생물군이 생겨났다고 말이다. 그런데 게나 은행나무의 사례를 보면, 진화가 다양성을 해치는 걸까 싶은 사례가 잦다.
흥미로운 사례를 보면서 질문 하나가 남는다.
왜 게화나 나무화(treeification)처럼 비슷한 모습이 반복되는 걸까? 다양성을 향해 나아가기는커녕, 비슷한 형태로 수렴하는 건 아닌가? 그럼 모순이 아닌가?
이 질문의 해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진화는 목적 지향이 아니다. 해답이 반복될 뿐이다. 진화는 어떤 목표를 향해 움직이지 않는다. 단지, 환경에 더 잘 적응한 생물이 더 많이 살아남고 번식할 뿐이다.
은행나무는 여느 나무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줄기가 있고, 잎이 넓고, 높이 자라며 씨앗을 떨어뜨린다. 이건 다른 나무들과 가까워서가 아니다. 은행나무도, 다른 식물들도 비슷한 생존 전략 때문에 ‘나무처럼’ 진화한 것이다.
햇빛을 많이 받기 위해 높이 자라고, 광합성을 하려 넓은 잎을 만들고, 씨앗을 퍼뜨리기 위해 나무 형태가 유리했던 것. 이건 진화적 수렴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은행나무는 외형은 나무지만, 계통적으로는 외톨이다. ‘나무가 되면 살기 좋다’는 조건 아래에서, 수많은 식물이 서로 다른 계통에서 시작돼 나무처럼 수렴해왔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같은 환경 속에서 비슷한 생존 조건이 반복되다 보면, 전혀 다른 생물들이 결국 비슷한 해답을 내놓게 된다. 이건 다양성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생물들이 같은 문제를 풀다가 비슷한 정답을 찾은 것이다. 이걸 수렴 진화(convergent evolution)라고 부른다. 게화, 은행나무, 박쥐와 새, 고래와 물에 사는 생물들의 유선형 몸처럼 말이다.
여전히 다양성의 증가와 수렴 진화가 상호 모순적처럼 들린다고?
전 세계에서 셰프들이 모여 요리 대회를 연다. 각자 쓰는 재료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조리법도 다르다. 그런데 조건은 하나: “이 환경에서는 볶음밥이 최고다.” 한국 셰프는 김치볶음밥을, 스페인 셰프는 빠에야를, 중국 셰프는 양주볶음밥을 만든다.
모두 볶음밥이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 결과다. 다양한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면 요리를 사례를 들어도 되고, 순대와 비슷한 전 세계 여러 음식들을 떠올려도 좋다. 진화도 마찬가지다. 같은 문제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때로는 비슷한 해답을 만들 뿐이다.
진화의 오묘함은 굴드의 문장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경이롭다. 진화는 다양성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반복되기도 한다. 그 둘은 모순이 아니다. 오히려 같은 자연의 두 얼굴이다.
다양한 출발선에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무수한 실패를 거쳐, 결국 생존이라는 하나의 기준에 맞는 해답이 반복된다. 게처럼. 나무처럼. 볶음밥처럼.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꿰뚫어보면, 진화는 더 이상 단순한 ‘변화의 흐름’이 아니라 지구 생명이 수억 년간 써 내려간 문제 해결의 역사라는 걸 깨닫게 됐다.
굴드의 말처럼 진화는 단순한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확장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 다양성 속에는 반복과 수렴, 예외와 패턴이 함께 섞여 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