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바깥에서 인간을 다시 묻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런 상상을 하곤 했다. 우주 어딘가에는 지구의 생명체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생명이 있지 않을까. 왜 생명은 꼭 산소로 호흡해야 하고, 왜 탄소를 기반으로 한 몸을 가져야만 하는가. 규소, 그러니까 모래 같은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는 없을까. 유기물이 아니라 무기물을 섭취하며 생명활동을 이어가는 생물은 없을까. 어린 시절의 이런 질문들은 대개 별다른 대답 없이 머릿속을 떠다니다 사라지곤 했다.
그런데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보며 이상한 반가움을 느꼈다. 나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었다. 작품 속 그레이스도, 이 원작을 쓴 앤디 위어도, 비슷한 질문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다. 우주에 대한 이런 엉뚱하고도 진지한 상상을 홀로 해온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당연한 일인데도,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생기는 지적 동질감은 꽤 특별하다. SF가 주는 기쁨 가운데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허무맹랑한 상상이 아니라, 누군가와 공유 가능한 질문의 형태로 우주를 다시 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영화에 대한 한줄평 가운데 가장 오래 남은 표현은 “휴먼 없는 휴머니즘”이었다. 정말 그렇다. 우리는 듣도 보도 못한 가상의 외계 생명체 로키와, 극한의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끝내 행동하는 인간 그레이스의 관계를 보며 어째서 인간들 사이의 우정과 신뢰, 희로애락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걸까. 왜 낯선 존재에게조차 마음을 열 수 있는가. 더 흥미로운 것은, 현실에서는 인간들끼리조차 역사책이 두터워질수록 화합과 융합, 조화가 결코 쉬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민족과 국가, 이념과 종교, 계급과 이해관계는 끊임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전혀 다른 종, 전혀 다른 감각과 언어 체계를 가진 존재와의 교감에는 오히려 더 순수한 감동을 느낀다. 왜일까. 인간은 같은 인간에게는 쉽게 벽을 세우면서, 인간이 아닌 것에는 오히려 더 근원적인 연민과 호기심을 발휘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과연 우리를 더 넓게 만든 것일까, 아니면 더 좁게 만든 것일까. 이 영화는 그 질문을 조용히 남긴다.
로키라는 존재 자체도 무척 유쾌했다. 음의 높고 낮음을 이용한 언어, 시각 대신 진동을 활용한 주변 인식. 재치 있고 기발하며, 동시에 철학적으로도 상당히 풍부한 소재다. 이 지점에서 내가 자연스럽게 떠올린 것은 철학의 오래된 질문, “박쥐임이란 무엇인가”였다. 토머스 네이글(Thomas Nagel)의 1974년 논문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What Is it Like to Be a Bat?)"로 유명한 질문이다. 인간은 오감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경험한다. 그러나 박쥐는 초음파를 통해 세계를 구성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박쥐가 ‘어떻게’ 세계를 경험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까. 아무리 더 많은 지식과 정교한 분석을 동원해도, 우리는 박쥐의 감각 내부로 들어갈 수 없다. 그 세계는 설명할 수 있어도 체험할 수는 없다.
그런데 오늘 본 한 릴스가 이 질문을 더 가까운 자리로 끌고 왔다. 선천적으로 청각장애를 갖고 태어난 사람은 혼자 생각할 때 어떤 방식으로 사고할까. 발화된 언어를 들어본 적이 없다면, 비청각장애인처럼 머릿속에서 ‘말소리’로 생각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생각은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이 질문은 단지 흥미로운 호기심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더 본질적인 무지를 드러낸다. 우리는 “박쥐임이란 무엇인가”를 묻지만, 실은 “인간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탁월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인간 내부의 감각과 사고의 다양성조차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우리는 자꾸 인간 바깥의 존재를 상상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상상 덕분에 인간에 대한 이해는 더 깊어진다. 외계생물체를 상상하는 일은, 결국 인간을 다시 묻는 일이다.
그래서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과학적 상상력은 단순히 “기발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과학을 빌린 철학이다. 생명은 무엇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언어는 꼭 우리와 같은 방식이어야 하는가, 지성은 어떤 감각 위에서 자라나는가, 우정은 동일성 위에서 가능한가 아니면 차이 속에서도 가능한가. 이 영화는 그런 질문들을 어렵고 무겁게 설교하지 않는다. 대신 모험과 농담, 위기와 협력의 형식 속에 밀어 넣는다. 그래서 더 즐겁다. 관객은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존재론과 인식론의 문턱 앞에 서게 된다. 좋은 SF는 늘 그렇다. 상상력으로 문을 열고, 사유로 사람을 머물게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며 한편으로는 씁쓸함도 느꼈다. <마션>도 그렇고, 이 작품도 그렇고, 인류가 공통의 위기에 처했을 때 대응하는 방식은 놀랍도록 이상적이다. 모두가 돈을 모으고, 의견을 모으고, 대안과 해결책을 위한 합의를 이뤄낸다. 그리고 끝내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극 중 등장하는 외계 생명체와 우주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백번 양보해서 핍진성과 개연성을 부여할 수 있다. 그런데 국제사회가 기꺼이 한마음으로 움직이는 장면 앞에서는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멈춘다. 그건 과학적 상상력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기후위기 앞에서 국제사회가 보여준 태도, 전쟁과 갈등 앞에서 각국이 취해온 자세를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이미 공동의 위기 속에 살고 있지만, 공동의 해답에는 좀처럼 도달하지 못한다. 기술은 진보하는데 합의는 퇴보하고, 정보는 넘치는데 신뢰는 바닥난다. 어쩌면 오늘날 가장 비현실적인 서사는 외계 생명체가 아니라, 이해관계를 넘어 인류가 협력하는 장면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SF가 정말로 허구인 부분은 우주가 아니라 정치일 것이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의도치 않게 또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인류를 구할 과학은 준비되어 있는데, 인류를 구할 사회는 준비되어 있는가.
영화 속 음악 활용도 절묘하다. 항모의 파티 장면에서 프로젝트 리더가 부르는 해리 스타일스의 Sign of the Times는, 임무를 완수하고 죽어야 할지도 모르는 그레이스를 향한 헌정처럼 들린다. 시대의 징후 앞에서 누군가는 떠나야 하고, 누군가는 남아야 하며, 누군가는 설명되지 않는 의무를 짊어진다. 또 그레이스가 지구로 직접 돌아가지 않고 작은 우주선 네 기를 띄워 보내는 순간, 그 이름이 존, 폴, 조지, 링고라는 사실은 괜히 마음을 건드린다. 그 장면에 겹쳐지는 비틀스의 Two of Us는 결국 이 이야기가 우주 구원의 서사이기 이전에, 두 존재의 우정과 신뢰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을 다시 확인시킨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가 함께 만든 “우리”라는 복수형. 그 작은 복수형이야말로 이 거대한 이야기의 중심이다. 그리고 영화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더라도, 소설에서 먼 우주로 향하는 자살 임무를 The Long and Winding Road에 비유한 대목까지 떠올리면, 이 작품은 과학과 철학 사이를 가로지르면서도 끝내 음악으로 감정을 봉합하는 데 능하다.
결국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외계 생명체에 대한 이야기이면서도, 끝까지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을 인간 바깥으로 밀어낸 뒤에야 비로소 인간을 다시 보게 만드는 이야기다. 우리는 왜 탄소 기반의 생명만을 떠올려왔는지, 왜 낯선 존재와의 우정과 희생에 눈물짓는지, 왜 다른 감각의 세계를 상상하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지한지, 왜 지구적 위기 앞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는지. 이 영화는 그런 질문들을 차례로 꺼내 놓는다.
좋은 SF는 미래를 예언하지 않는다. 대신 현재를 낯설게 만든다. 그리고 그 낯섦 덕분에,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온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바로 그런 영화였다. 과학에 대한 영감을 주고, 상상력에 감탄하게 만들며, 끝내 철학적 질문으로 관객을 밀어 넣는다. 보고 난 뒤 남는 것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세계를 다시 묻고 싶어지는 지적 즐거움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재미있는 영화인 동시에,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SF를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인간 바깥을 상상하는 순간, 인간 안쪽이 더 깊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