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시스의 미분과 적분

영화 ‘끝까지 간다’의 운명론

by 나효진
인간은 운명에 몸을 맡길 수는 있어도 그것에 관여할 수는 없다. 또 인간은 운명이라는 실을 꼴 수는 있어도 그것을 끊어버릴 수는 없다.
- 마키아벨리


인간은 과연 운명의 주인일까? 우리는 바꿀 수 없는 운명 따위는 없으며, 삶의 모든 고난들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이 명제가 항상 참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 터다. 인간은 고난을 피하려 애쓰지만, 그 고난의 양과 분배되는 시기는 다분히 운명론에 입각해 있다. 오히려 운명이라는 것이 실존한다면, 기술의 발달로 신체가 무한에 가깝게 확장되고 있는 현대의 혼돈 속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행동의 구획을 그어 주는 유용한 도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김성훈 감독의 두 번째 장편 <끝까지 간다>는 운명이라는 거대 서사가 지닌 힘과 부지불식간에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간 인간의 몸부림을 매우 독창적인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다. 영화의 전반부에서는 주인공의 선택으로 인해 쪼개진 디제시스의 충돌로 서스펜스를 만들어 내고, 주어진 상황을 주도적으로 바꿔나가려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분리됐던 영화적 세계는 운명의 압도적 힘에 의해 다시 한데로 모여 갈등을 만들어 낸다. 이선균과 조진웅, 두 배우의 강렬한 화학작용은 자칫 이 영화를 인간과 인간 사이의 대결만으로 여겨지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이 서로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고 있을지언정 그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항상 운명이었다. 그렇다면 <끝까지 간다>의 인물들이 온 몸으로 역설하는 이 운명론에서 우리는 어떤 것들을 볼 수 있고, 또 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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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빛과 그림자, 그리고 소리


<끝까지 간다> 전반부의 디제시스는, 주인공 고건수(이선균 분)를 중심으로 분리되어 있다. 고건수의 세계와 그 밖의 세계를 나누는 것은 빛이다. 이러한 유리(遊離)의 전조(前兆)는, 유흥업소의 뒤를 봐 주는 것으로 가외 수입을 챙기던 부패 경찰 고건수가 감찰반의 기습에 어머니의 장례식을 제쳐 두고 서울로 향하는 어두운 차 안에서부터 포착된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 감찰반의 기습과 같은 중첩된 위기들을 차에 실은 채로 달리고 있다. 아직은 고건수가 그의 바깥과 완벽히 분리되기 전이다. 그는 외부 세계에서 벌어진 사태들을 수습하기 위해 서울의 경찰서와 장례식장, 양 끝의 빛이 만든 그림자의 지대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렇게 양쪽 세계의 채근에 시달리던 고건수는 잠시 한눈을 팔다가 차로 사람을 들이받는다. 놀란 고건수의 발밑으로 사체에서 흐른 피가 빠르게 번져가는 와중에도 감찰반은 그의 책상 서랍을 뜯어내고, 딸은 "초콜릿 케이크를 사 오라"고 야단이며, 유일한 목격자인 개는 무심히 사고 현장을 바라보고 있다. 고건수의 세계가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위협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고 있는 한편, 그 밖은 몹시도 평화롭기만 한 것이다. 그때, 순찰차의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가르며 다가온다. 그리고 고건수는 자신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비출 그 빛을 피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편을 택한다. 그의 세계를 위협하는 결정적 존재인 사체도 고건수와 함께다. 카메라는 이 분리의 순간 속 빛과 그림자의 경계를 놓치지 않고 붙잡아낸다. 그를 발견하지 못한 순찰차의 빛이 다시 멀어지고 사위가 고요해지면, 오롯이 고건수만의 것인 어둠이 온 화면을 메운다.


고건수는 빛의 세계와 분리된 이후부터 자신의 위기와 비밀로 가득 찬 어둠의 세계에 깊은 신뢰를 보낸다. 스스로가 선택한 것인 이상,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다는 자만 때문이리라. 꺼내 놓기는 너무 위험해진 위기를 실은 채로 고건수의 차는 다시 달리지만, 얼마 못 가 다시 빛의 간섭과 마주친다. 음주 단속에 붙잡히고 만 것이다. 여기서 고건수가 어둠을 고른 순간이 그에게 원죄처럼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목격된다. 그의 세계를 망쳐버릴 폭탄의 뇌관은, 고건수의 생각대로 그림자 안에 안전하게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림자 안은, 외부시선 뿐만 아니라 고건수 자신의 시선까지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리는 미지의 세계다. 또 빛이 닿는 순간, 그림자는 소멸하고 고건수의 세계는 무너진다. 그림자의 태생적 한계를 간과한 고건수의 선택은 끊임없이 빛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넣고, 관객들은 그 과정에서 창출된 서스펜스를 만끽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고건수는 영리했다. 자신의 세계를 위협하는 빛을 어떻게든 피해 보려는 시도를 시작한 것이다. 음주 단속을 가까스로 벗어난 후 다시 어머니의 장례식장으로 돌아온 고건수는 곧 감찰반이 들이닥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다. 그 순간 고건수가 떠올린 것은 죽은 어머니의 관 속이라는 또 다른 어둠이었다. 감찰반의 시선이라는 빛이 결코 틈입할 수 없는 공간에 사체를 숨기기로 결심한 그는 오로지 자신만이 눈 뜬 채인 어둠, 밀실을 직접 만들어 낸다. 고건수는 먼저 안치실에 가장 간단히 접근할 수 있는 장례지도사(이장유 분)의 눈을 자신의 공간으로부터 배제시킨 후 그 안에서 번뜩이는 눈으로 기능하는 CCTV까지 완벽히 가린다. 그리고는 분리되어 있던 두 세계-차와 안치실-를 연결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고건수를 방해하는 빛이 전부 사라졌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 스스로 선택하고 직접 만들기까지 한 세계 안에서 자유로운가? 아쉽게도 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다른 감각들은 더 기민하게 움직인다. 특히 견고한 고건수의 밀실을 깨려 했던 것은 소리다. 사체를 안치실 안으로 가져오는데 사용한 딸 민아(허정은 분)의 장난감이 말썽이었다. 전방에 총을 겨눈 채 포복하던 장난감이 멈출 때마다 콩을 볶는 듯한 따발총소리가 요란히 울려 퍼지며 장례식장 안 사람들의 청각을 자극한다. 10분이라는 밀실의 유효기간보다 훨씬 고건수를 옥죄는 이 소리는, 어머니의 관에 사체를 넣고 난 후에도 위협적으로 작용한다. 못질까지 다 한 관 속에서 전화 벨소리가 새어나오는 순간, 안치실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고건수를 밀어내려고 한다.


하지만 김성훈 감독은 아직 고건수를 나락으로 빠트릴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의 세계는 소리에 의해 붕괴될 뻔 했지만, 이 같은 상황은 극적인 아이러니에 의해 웃음으로 승화된다. 운구차에 실린 관에서 다시 한 번 전화 벨소리가 울리지만, 운전사는 이를 귀신의 장난이라고 믿는다. 시체 두 구가 들어 있는 관의 무게는 분명 상식 밖이지만, 이를 고건수의 수상한 행동과 연결하기에는 개연성이 부족하다. 외부 세계의 기준으로 보기에 그는 관뚜껑을 뜯게 만들 만큼 의심스럽지 않은 것이다.


이 영화의 전반부는 주인공 고건수가 맞닥뜨린 모든 위기들을 자신의 세계 안으로 끌고 들어오면서 마무리된다. 그러나 관객들은 여러 모로 악당의 조건을 고루 갖춘 고건수를 쉽사리 미워할 수 없다. 그가 빛을 등진 채 어둠을 택한 순간부터, 고건수의 행동들은 악의를 품고 한 짓이 아니라 위기 탈출의 일환인 것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빛과 소리의 기습에도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고건수에게, 관객들은 어떤 역경을 극복하는 영웅을 보듯 기꺼이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이처럼, <끝까지 간다>에서 이뤄진 디제시스의 분리는 스릴러 장르의 최고 미덕인 서스펜스 형성에 주효했다.


이후 박창민(조진웅 분)이 등장할 때까지, 항상 사건의 선두에서 물러나 외부 세계를 관망하는 고건수는 그야말로 디제시스의 지배자다. 그가 어머니의 무덤 깊숙이 묻어 버린 사체가 살인 용의자 이광민(조하석 분)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고건수 뿐이다. 그러나 또 다른 악인 박창민으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고건수의 비밀들을 폭로하고, 밀봉된 그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침범해 온다. 그렇게 두 악인의 세계는 섞이고, 완전범죄를 꿈꾸던 고건수의 '삼일천하'가 꿈의 형태로 정리되며 이 영화의 2막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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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의 대결 - 가장 나쁜 것은 운명이다


스릴러 장르에서 극중 인물들의 대결 구도는, 다뤄지는 사건의 무게감 때문에라도 모종의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감독에 의해 상정된 '절대선'과 '절대악'이 맞서는 경우, 대개 전자가 승리한다. 이러한 구도의 반복은 영화 속 절대선에 대한 객관적 가치판단을 수반하며, 여태껏 절대선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반드시 옳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환기했다. 아예 절대악이라 불리던 것의 편에 서서 절대선에 대한 근본적 의문에 답하려 하려는 움직임도 보이며, 선했던 인물이 악의 처단을 위해 스스로 악을 짊어지고 마는 모순적 과정은 경향성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선과 악의 경계가 점차 모호해지면서 숫제 '누가 더 악인인가?'라는 의문을 던지는 영화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영화 외적 상황에서, <끝까지 간다> 속 대결 구도는 매우 독특하게 다가온다. 경찰의 신분으로 유흥업소를 관리하며 뒷돈을 챙기고, 교통사고로 인명 피해가 났는데도 이를 은폐하려 한 고건수는 악인이다. 마약 밀매에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박창민은 그보다도 한 수 위의 '나쁜 놈'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운명 앞에서 악함의 정도 차이 따위는 소멸돼 버린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 영화는 언뜻 악인으로 분류되는 인간과 인간의 대결을 표방하며 스릴러의 최신 경향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끝까지 간다>는 인간과 운명의 부딪침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언가를 갈구하는 자를 프로타고니스트로 보고, 이를 막는 자를 안타고니스트로 본다면 관객들은 좀 더 오랜 시간 관찰해 온 고건수를 전자로 여기게 될 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박창민에 비하면 고건수는 상대적으로 감정을 이입하기 쉬운 약자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요한 사건들이 인간의 힘으로 예방할 수 없는 범위에서 일어나며 더 이상 손 쓸 수 없을 지경까지 진행된 순간 극적 아이러니를 통해 갈등이 해소된다는 점에서 프로타고니스트는 인간, 안타고니스트는 운명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이광민의 죽음이 고건수와 박창민을 매개한다거나 두 사람이 결국 경찰 신분으로 마주친다는 사실은 극중 인물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또한 두 사람의 마지막 대결에서 총구가 박창민을 향해 있다는 상황 역시 감독의 머릿속에서만 예비된 것이었다.

고건수와 박창민이 서로의 머릿속을 읽을 수 있다면, 이는 오로지 '만약'의 범위에서만 허용된다. 일련의 상황을 만든 것은 인간일지 몰라도, 이를 비극으로 만드는 모든 관계의 배치는 운명의 논리를 따른다. 그런 까닭에 <끝까지 간다>의 박창민과 고건수에게는 '추격자'의 지영민(하정우 분)이나 '악마를 보았다'의 장경식(최민식 분) 등 악인 캐릭터가 영화 속 상황을 온전히 지배할 때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 카리스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감독은 이처럼 '사실은 운명 앞에 무기력한 악인'이라는 캐릭터 설정과 박창민의 죽음이라는 결과를 통해 조금 더 강하고, 보다 나빠 보이는 것이 패배할 때 발생하는 순수한 카타르시스를 주며 관객의 무의식 속에 있을 보편적 정서에 다가가려 한다.


이 영화의 전반부가 고건수의 세계를 중심으로 디제시스를 미분해낸 일종의 성취라면, 후반부는 완벽히 분리된 줄만 알았던 고건수와 그 바깥, 특히 박창민의 세계가 적분된 결과물이다. 기실 이 같은 적분의 과정은 전반부에서도 오버랩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를테면 자물쇠로 굳게 잠가 두었던 고건수의 서랍이 감찰반의 망치에 의해 파괴되는 순간과, 고건수가 음주 단속의 위기에서 벗어나며 자신을 몰아세웠던 순경의 뺨을 때리는 순간이 파열음으로 중첩된다. 이는 고건수가 자신의 세계와 외부 세계 사이에 경계를 그어 보려 발버둥쳤던 모든 일들의 주관자는 그 자신이 아니라 운명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또 고건수가 이광민을 들이 받은 후 손상된 범퍼를 갈아 끼우며 완전범죄를 꾀하는 장면과 새 서장의 취임과 함께 경찰서의 표어 간판을 교체하는 장면이 겹칠 때는 이 이야기를 실질적으로 관장하는 운명의 공시성까지 확인할 수 있다. 영화의 후반부, 고건수로부터 불시의 습격을 받아 저수지 아래로 가라앉는 박창민의 모습과 물이 가득 찬 욕조 위로 떠오르는 고건수의 얼굴이 오버랩되는 장면은 그동안 주장해왔던 운명의 얄궃음을 친절히 정리해 주는 장치다.


<끝까지 간다>는 고전적 의미의 '반전', 즉 사건의 원인과 범인의 정체를 극의 맨 앞에 두며 관객들에게 내러티브 진행의 주요한 실마리들을 미리 제공한다. 이러한 감독의 '시도'는, 이 영화가 가진 최고의 미덕인 '속도감'에 집중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함과 동시에 전체 이야기에서 운명이 갖는 힘을 강조하는 효과를 거둔다. 평행선을 걷고 있는 것 같던 고건수와 박창민의 세계가 교차하기 시작한 지점부터 내러티브는 빠르게 전복되는데, 이때 고건수라는 씨실과 박창민이라는 날실을 하나로 교묘히 직조해낸 것은 운명의 장난으로 욕망의 집결체가 되어 버린 이광민의 주검이었다. 자신이 선택한 상황이라면 스스로의 힘으로 어떻게든 조종이 가능할 것이라 믿었던 고건수와 박창민은, 운명의 쳇바퀴 안을 끝없이 구르는 가련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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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실존적 공백'으로서의 영화 속 설정들


모든 영화에서는 좋은 작품이건 아니건 영화 속 시어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속성을 가진다.
-루이스 부뉴엘


감독이 디제시스를 미분했다가 다시 적분하며 영화에 긴장감을 불어 넣는 동안, 전체적 분위기가 너무 묵직하게 가라앉지 않도록 균형을 맞춰 주는 것은 <끝까지 간다>의 섬세한 설정들이다. 그는 작품 안에 어지럽게 벌여 놓기만 한 것 같은 설정들을 개연성 있게 연결시키며 내러티브에 쓸모 있는 것으로 치환해 낸다. 또 김성훈 감독은 이 과정에 ‘공시적 유머’를 가미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기도 했다. 그의 영화 안에서 모든 영화적 시어들은 존재감을 갖고, 그 자체로 무엇으로든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실존적 공백'이 된다.


고건수가 어머니의 관 속에 이광민의 사체를 숨기는 데 사용했던 딸 민아의 군인 모형 장난감은 상술했듯 조력과 동시에 소리로서 위기 상황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을 달성한 고건수의 앞에서, 민아는 그가 몰래 훔쳐낸 장난감보다 훨씬 이동이 용이하고 조용하기까지 한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긴박감이 가까스로 해소되어 가고 있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주인공을 향한 감독의 의도적 조롱이 치고 들어온다. 허탈함과 억울함이 반씩 섞인 얼굴을 한 채 딸을 바라보던 고건수의 입에서 “민아야, 그만해. 아빠 화나려고 그래.”라는 화풀이가 터져 나올 때, 우리는 겨우 마음을 놓고 웃을 수 있게 된다. 고건수의 손에 쥐어진 군인 모형 장난감 하나가, 이 영화 안에서는 경제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다각도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또 고건수의 제부 영철(김강현 분)이 스쳐가듯 언급한 고장 난 샤워기는, 영철 그 자신의 허술한 면모를 부각시키는 장치였다. 이 샤워기가 영화 말미 고건수와 박창민의 혈투 속에서 다시 등장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물을 뿜는 무기로 변신한다는 점도 <끝까지 간다> 속 미장센이 존재감을 드러낸 좋은 예다.


이처럼 작은 설정에도 예민한 촉을 갖춘 감독은 현실이라는 시공간을 활용할 때 비현실적 설정이 관객의 몰입을 위협하는 것을 막는 완충재이자 설정들을 쌓아 올리는 바탕으로 쓴다. 그래서 감독은 이 밑그림을 매우 꼼꼼히 그리려 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것이 특정 시공간에 특화된 유머다. 그는 통시적인 해학보다는 공시적인 위트에서 두각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김성훈 감독의 데뷔작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 속 구두쇠 아버지(백윤식 분)가 아들(봉태규 분)을 압박하며 ‘올드보이’의 내용을 인용하는데, "네가 내 아들만 아니었어도 15년 동안 만두만 먹였을 거다"가 그러한 경우의 대사다. 또 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 백윤식이 영화 '싸움의 기술'에 출연했음을 비튼 "내가 너한테 아무 것도 물려줄 것이 없어서 싸움의 기술이라도 물려주려고 했다"는 등의 대사 역시 그렇다. 동시대의 문화를 함께 향유하지 않으면 웃을 수 없는 유머는 약점도 분명하지만 영화적 공간을 보다 현실에 가까운 것으로 만드는 데는 주효하다.


이 같은 유머는 <끝까지 간다>에서 좀 더 발전된 형태로 등장하는데, 감독은 이 영화의 주 관객층인 '현대의', '한국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위트를 첨가한다. 이를테면 고건수가 이광민의 사체를 트렁크에 실은 상태에서 음주 단속에 적발됐을 때 순경이 13자리인 주민번호를 14자리로 착각해 벌어지는 해프닝이나, 영화 말미 영철이 토스트 장사를 시작했을 때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을 암산한 것처럼 행동하다가 "몰라, 나 문과잖아"라고 말하며 계산을 포기해 버리는 장면은 굵직한 이야기를 건드리지 않는 수준에서 소소한 웃음을 만든다. 이는 동시에 고속으로 내달리는 플롯들을 이완시키는 역할도 한다.


또 천하에 둘도 없을 패륜을 저지른 고건수가 결과적으로 장례지도사에게 효자 취급을 받는 부분이나 점을 보고 온 여동생(신동미 분)이 "엄마 지금도 남자랑 같이 있대"라고 말하는 장면은 전형적인 현실의 묘사다. 이처럼 잘 갖춰진 ‘현실’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할 다소 비현실적인 설정들이 과도하게 돌출되지 않도록 하는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되며, 이로써 영화적 허용의 범위는 확대된다.


그리고 이러한 유머의 조력과 함께, 꼬리에 꼬리를 물며 극중 인물들을 괴롭히는 운명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것은 법망이라는 한계적 범위다. 고건수의 부덕은 감찰반의 공격, 살인에의 죄책감, 심지어는 속도위반 범칙금 고지서의 모습을 빌려서라도 반드시 그 자신에게 돌아온다. 이 모든 것이 일견 있을 수 없어 보이는 연쇄이면서도, 법망의 구조를 빌린 덕에 절대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으로 수용된다. 이처럼 김성훈 감독은 현실이라는 밑그림을 잘 깔아둔 위에 ‘실존적 공백’으로서의 설정들을 경제적으로 배치하며 내러티브를 강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극적으로 허용되는 모순적 설정이나 충격에 가려진 진실들이 디제시스의 통일성을 해치는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이를테면 폭탄으로 부서진 차와 함께 저수지에 가라앉아 죽은 줄만 알았던 박창민이 살아 돌아와 고건수와 마지막 혈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박창민이 UDT 출신으로 잠수에 능하다는 설정이 편집됐다는 사실은 가시지 않는 의문을 남긴다. 또 박창민이 고건수의 눈앞에서 최 형사(정만식 분)를 잔혹하게 살해한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로 꼽아도 좋을 만큼 스릴이 넘쳤지만, 두 사람의 조우와 그 위치까지 파악한 박창민이 막상 이광민의 시체는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것 역시 쉽사리 납득되지 않는 대목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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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허무의 빈 곳을 채운 카타르시스 - ‘오락형 스릴러’ <끝까지 간다>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끝까지 간다> 속에서 발견되는 운명론에서 우리는 어떤 것들을 볼 수 있고, 또 보아야 할까? 이 영화는 운명의 마수에 걸린 박창민은 죽고, 고건수는 박창민의 금고 열쇠를 얻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윽고 고건수 앞에 펼쳐진 지폐의 높은 벽을 보며 우리가 떠올려야 할 메시지란 사실 없다. 이 영화의 잔혹동화적인 결말에는 모종의 메시지를 던져야만 한다는 강박도,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라는 강요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세계의 충돌이 있고, 서스펜스가 존재한다. 이를테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장고 : 분노의 추적자' 속 저택 폭파 장면처럼, <끝까지 간다>는 일반인이 구경도 해 보지 못했을 엄청난 양의 돈더미가 주는 충격으로서 조금이나마 남아있었을지 모르는 의혹들을 지워버린다. 소멸의 허무는 이내 또 다른 시작을 암시하고, 우리에게 순수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이 영화를 ‘오락형 스릴러’라 부르고 싶은 까닭은, 상술한 것처럼 천편일률적 교훈을 이야기하지 않으며 내러티브의 허무함을 굳이 의미 있는 무언가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 미덕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끝까지 간다>의 오락성을 배가시키는 것은 인상적인 속도감이다.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는 광경을 보여 주듯이 사건의 빠른 연쇄와 거기서 오는 박진감만으로 관객들을 압도한다. 이는 카메라 앵글을 다각화한 뒤 촬영된 쇼트들을 리듬감 있게 병치한 데서 오는 장점일 터다. 한 앵글 안에서 클로즈업은 매우 천천히, 조심스럽게 들어오지만 시선의 전환은 몹시 빨라서 공포 영화의 문법이 주는 효과를 보이기도 한다. 또한 <끝까지 간다>에는 배경을 비스듬히 비추는 앙각이 자주 등장하는데, 전지적 시점의 느낌을 주는 조감 앵글보다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인간의 불안한 심경과 외부 세계가 대비되는 창조적인 풍경을 만들어냈다.


이 영화의 원제는 <무덤까지 간다>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 속에서 벌어진 모든 악행들이 죽은 박창민에게 덧입혀질 때, 신임 서장이 이 사실을 죽을 때까지, 무덤까지 묻어두라고 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다. 고건수의 비밀들이 숨겨져 있던 장소가 어머니의 무덤이라는 점도 연상된다. 제목을 <끝까지 간다>로 고친 것이 타의였을지라도, 영화에서 느껴지는 운명론을 좀 더 포괄할 수 있는 변경이었다는 느낌이다. 관찰된 것처럼, 이 영화에서 무덤은 결코 끝이 아니다. 그리고 끝까지 가는 것은 인간이지만 그 끝의 뒤편은 운명만이 관찰할 수 있는 범위다. 디제시스의 미분과 적분은 물론 각종 영화 언어의 변주로 운명 뒤에 또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이 영화는 탁월하게 묘사해낸다.


인간이 운명을 이길 수 있다는 신화는, 이 영화에서 부서졌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 보자. 우리는 운명과 항상 다퉈야만 할까?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를 도는 고건수는, 모든 사건이 해결되고 난 후의 허무에 잠식되지 않는다. 그는 경찰을 그만 두고, 여동생 부부에게 푸드 트럭 창업을 제안한다. 고건수는 자신이 운명에 의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박창민의 죽음을 통해 절감했다. 동시에 그는 운명이 삶과 맞물려 있다는 점도 깨달았다. 살아 있는 한, 인간은 운명의 지배를 받는다. 마치 빛의 뒤편에 그림자가 존재하듯이. 그래서 영화의 끝과 함께 하는 고건수의 시작은 운명을 향한 저항이 아니라, 운명 안으로 뛰어들어 상황을 내 것으로 가져오려는 삶의 지속 의지다. 다시 한 번 자문해 본다. 우리는 운명과 항상 다퉈야만 하는 것일까? 아직 유보된 채로 남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은 충돌을 겪어야만 할지도 모른다.


운명은,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끌어 주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끌어당긴다.
-클레안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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