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환자 Jan 23. 2019

외로움은 왜 말하면 안 될까

함께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혼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연락이 오지 않는 내 전화기가 비정상인 줄 알았던 때가 있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는 누구나 다 스마트폰과 카카오톡이란 걸 쓰기 시작한 때였다.


‘실시간으로 연결 돼 있다는 게 이런 뜻이구나’라고 알 수 있었다. 친구들의 아이폰은 쉴새없이 까똑 까똑 울려대고 그들은 수업을 들으면서도 핸드폰 화면을 계속 두드리고 있었다. 교실을 이동하거나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도 계속 통화를 해서 무료할 틈이 없어 보였다. 그들의 카카오톡 친구 목록이 세 자리수를 넘어갈 때 나는 아직 카카오톡 아이디를 묻는 것도 멋쩍었고 내 핸드폰 번호를 카카오톡에 연동 시켜놓지도 않았다.


내 엘지 폰은 조용했다.


이따금씩 나는 내 핸드폰 화면을 켜보았다.


카톡 창에 항상 얘기하던 몇 명의 친구 목록만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나를 찾지 않는다는 것이 내 결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도 이 고민을 털어놓지 않았고, 같은 고민을 누군가에게서 들은 적도 없었다. 이게 오히려 정상임을 깨닫게 된 것은 몇 년이 지난 후였다.


그로부터 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내 아이폰은 별반 다르지 않다. 생일에도, 연말에도, 연초에도 요란스럽지 않다. 유일하게 달라진 게 있다면 이 조용함을 대하는 나의 태도일 것이다.


요즘은 카카오톡이 아니라 인스타그램이다. 누구와 함께 간 어디, 누구와 함께 먹은 무엇. 온통 함께에 관한 얘기이다. 심지어 라이브 기능은 “실시간”의 개념을 한 단계 더 높혔다. 모두 가족, 연인, 친구 - 모쪼록 최소한 다른 한 명의 누군가와 어디서 즐겁게 보냈는지에 대한 내용들이다.


쉽사리 혼자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다.


우리는 왜 외로움에 대해서 말하지 못할까? 누구나 외롭지 않을 때가 없다. 그러나 외로움의 시간은 없는 듯이 숨겨버리고 함께 있는 순간만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한다. 모자른 건 채우고 찬 건 넘치는 게 자연의 이치라면, 오히려 사람의 관심을 필요로 할 때 그것을 받는 게 맞지 않을까?


그러나 “외롭지만 외롭지 않아”라는 선언만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뿐이다. 이런 선언에는 곧 “멋져”라는 반응이 따른다. 멋지다는 말에는 거리감이 있다. ‘나는 하고 싶지만 못하는 걸 너는 한다’는 동경도 있다. 외롭고 싶지 않은 게 보편적인 마음이라는 것인데, 이는 다시 말하면 외로움이란 어떤 건지 너도 잘 알고 있다는 것 아닐까.


사람들의 관심이 꼭 필요하다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봄이 있다면 겨울도 있고 해가 쨍한 날이 있다면 진눈깨비가 오는 날도 있다. 싫긴 하지만 지나 보내야하는 하루들이다. 마치 날씨처럼, 자연스러운 것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이왕이면 조금 따뜻하게 바라봐주면 좋겠다. 추운 날에 찬 바람을 맞고 있으면 더 추우니까 이불 속에 들어가서 수면 양말도 신고 귤도 까먹듯이, 외로움을 정면으로 벌겋게 태우게 놔두기보다는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조금 도와주는 것도 좋겠다.


아니면 뭐, 외로움을 즐기는 거다. 외로움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름 잔잔하고 예쁘고 여유로운 맛이 있다. 비누조각을 깎아가듯이 나의 외로움을 조금씩 디자인해보는 것도 방법이겠다. 하지만 모두가 그럴 수 있는 시간적, 물질적 자원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외로움을 다스릴 수 있는 환경에 있는 것도 감사해야할 일이다. 또 한편, 철저히 외로우려고 해도 삶이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적극적으로 외로움에 대해서 얘기해보려고 한다. 사실은 외로움이라기보다 혼자의 삶이 더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혼자의 삶이어도 외로움을 필수적으로 느끼지는 않기 때문에. 어쨌건 외로움에게 입이 있었다면 이렇게 저렇게 억울했을 법한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와 나의 상처에 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