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공감의 능력이 확대되는 건 아름답지만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어렵게 익혀야 하는 일이다. 흔히 상상하는 것과 달리 공감의 확대는 어쩌면 감성이 아니라 이성을 발휘해야 도달 가능한 목표일지도 모른다.
나와 다른 사람과 공존하는 기술, 갈등의 해결, 세상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을 이야기 할 때 역지사지의 확대, 공감의 향상을 핵심에 놓는 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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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지사지하고 공감하는 능력보다 사적 관게에선 예의, 공적 관계에선 정책과 제도가 우리의 공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더 인간적인 장치다.
학창 시절 회초리나 채찍으로 매를 맞았던 이들은 거의 한결같이 그 덕에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내가 볼때는 이렇게 믿는 것 자체가 체벌이 끼치는 악영향 중 하나이다
-버틀란드 러셀-
한국의 가족주의는 소위 '정상가족'인 가부장적 가족만 인정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다.
'결혼=출산'의 등식이 지나치게 확고한 탓에 제도의 바깥에서 출산함으로써 가족의 순수함을 훼손했다고 여겨지는 미혼모와 그 자녀들은 제도적, 사회적 차별에 시달린다.
내 혈연이 아니더라도 세대를 이어 인류가 계속 존재하리라는 기대가 사라진다면, 개인의 삶은 유한해도 나보다 더 크고 지속되는 전체에 연결되되어 있다는 믿음이 사라진다면, 그 모든 추구와 삶의 의미도 빛을 잃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미래의 낯선 이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존재의 의미를 다음 세대에, 아이들에게 빚지고 있다.
나는 이 공공성의 강화를 통해 우리도 개인과 공동체의 평화로운 공존의 길을 만들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지국가의 사회적 계약에서 드러나는 개인-가족-국가 간의 관계 유형을 비교해보니 미국은 개인-가족의 관계를 중시하고 독일은 국가-가족의 관계를 중시한다면, 스웨덴은 국가-개인의 관계를 중시한다는 것이다.
발표자들은 이처럼 국가와 개인 간의 관계가 중심에 있는 스웨덴 식의 사회적 계약 방식을 '국가주의적 개인주의'라고 불렀다.
스웨덴의 아빠가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하루 평균 300분이고, OECD 국가 평균은 47분이다. 한국은? 6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