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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구아빠 Nov 21. 2019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더북클럽 서평팀, 책갈피

리뷰작성자 : 개미


함께 모여 책을 읽고 자유롭게 글을 씁니다. 모두의 독서생활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북클럽 #책갈피






존재한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

인간의 존재, 그 자체는 탄생으로 완성된다. 더 이상의 수식도 절차도 필요없다. 생명은 하나의 존재이며, 죽음으로 소멸되는 순간까지 그 것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 하나의 생명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그 존재를 오간다.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생명은 없다. 많든 적든 생이 유지되는 동안 우리는 타인의 존재에 기대어 삶을 채워간다. 탄생 그 자체로 우리의 존재는 완성되었지만, 완성된 존재 자체로는 어느것도 완성할 수 없는 모순. 그 것이 우리가 삶을 불안해하고, 타인을 끝없이 갈망하는 이유가 아닐까.



타인 그리고 연인

 삶은 좋든 싫든 타인과 부대끼며 채워가야 한다. 그렇기에 타인이란 생명의 시간을 나누는 존재들이다. 삶의 시작점이 탄생이라면 끝은 죽음이다. 주어진 것은 오직 시작점과 종료지점 밖에 없기에 인생이 혼란스럽고 때로는 불안하기도 한 것은 아닐까.


 죽음이라는 마지막 순간 외에는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 하지만 함께 시간을 나누고 있는 타인은 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을 통해 현실을 인식하고 삶의 방향을 가늠한다. 연인이란 그 중에서도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의 일상과 감정을 나누는 사람이다. 일상의 생각과 삶의 방향을 긴밀하게 주고받는 그런 사이. 그렇게 서로의 삶을 진하게 채우는 존재.



섹스의 의미

 섹스에 부여하는 의미는 사람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단순한 육체적 행위로 볼 것인가, 그 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의미의 행동으로 볼것인가 등등. 이에 관해서는 역사적으로도 많은 논쟁이 오가기도 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섹스는 자위행위와 달리 타인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성행위를 위해 내가 상대방을 필요로 하듯 상대도 나를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섹스는 어떤 점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원초적인 행위가 아닐까.







나가사와


"자신을 동정하지마. 자신을 동정하는 건 저속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야."


 나가사와를 떠올리면 먼저 생각나는 대사다. 그는 완전체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고, 동경대를 다니고, 어려운 시험들을 거침없이 합격해낸다. 그는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채워나가는 사람이다.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세상과 함께 어울려 살지만 타인에 의지하여 삶의 의미를 채우지 않는다.


 그는 자기 스스로 그렇게 훈련을 했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거나 의지하지 않고, 한편으로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속에 무기력하게 방치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단련했다고 말이다. 인간세상의 무기력함 불안함, 나약함 등은 그에게 저급하고 저속한 것에 불과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 그에게 섹스란  서로의 존재를 나누는 의미가 전혀 없다. 오직 쾌락일 뿐.



와타나베

 작품의 주인공이다. 나가사와는 그에게 서로 닮았다고 말한다. 와타나베는 부정하지만 나가사와는 닮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작품 속에서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다. 시시콜콜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건네는 정도가 전부고 타인에게 깊은 감정을 내비치는 적이 거의 없다. 그저 묻는 말에 대답하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주로 다른사람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줄 뿐이다.


 그런면에서 와타나베는 나가사와와 닮았다. 타인에게 스스로의 불안함과 혼란스러움, 존재의 허무함을 채우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적극적으로 타인을 열망하지도 않는다. 다른점이 있다면 나가사와는 강력한 의지로 스스로의 존재를 채워나간다면 와타나베는 단념한 채 산다는 점이다. 마치 성실한 무기징역수처럼. 그래서 어딘가 무기력하고 어딘가 관조적이다.



나오코

 나오코는 와타나베의 여자친구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잠적하고 요양원에서 정신치료를 받는다. 그녀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그녀가 사랑한 인물들은 항상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랑했던 언니, 사랑했던 남자친구 모두. 그녀가 채워줄 수 있는 존재도 없었고, 반대로 그녀를 채워주는 존재들은 모두 자살을 했다. 그녀는 인간이란 결국 서로의 깊은 곳을 채워줄 수 없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은 누구를 사랑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던 걸까.


  나오코는 어느 순간 세상과 단절된 곳으로 간다. 그렇게 스스로의 세계를 걸어 잠근다. 와타나베와 만나는 동안 잠시나마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지만 삶의 무게감을 이기지는 못했다. 어쩌면 그녀는 스스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삶의 불안함을 해소하고 탄생과 죽음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다가간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와타나베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나를 기억해달라고.




미도리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나 상처와 어려움이 생긴다. 우리는 타인을 필요로 하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상처와 아픔이 있다. 미도리는 그 아픔들을 내색하기보다 인내하고 행여나 틀어질 수 있는 관계를 위해 참고 견디는 타입이다.


 어딘가에 응석한번 부려본 적 없다는 그녀는 와타나베를 알게 된 뒤 그에게 끈적끈적한 성적 판타지들을 마구잡이로 털어놓는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지만, 그녀의 삶에 비춰보면 그 것은  인정욕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섹스는 타인이 나를 필요로 하기에 성립되는 일이다. 그녀가 와타나베에게 섹스판타지를 털어놓고, 아버지의 영정사진 앞에서 나체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나를 필요로 하는 관계’들에 목말라서 였던 것은 아닐까.


마음껏 응석부려도 나를 받아줄 수 있는 존재들에 대한 갈망 그리고 그만큼 농밀한 성적판타지. 그래서 그녀는 와타나베에게 호감을 가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와타나베는 들어주는 인간이니까.




레이코

 레이코는 어떤 사연으로 인해 정신요양원에 들어왔다. 하지만 치료가 된 뒤에도 세상으로 나가지 않고, 자신처럼 세상과 단절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나눠주는 사람이다. 나오코와 룸메이트였고,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그녀를 통해 소식을 주고받는 일이 많았다.


 와타나베는 레이코의 주름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에게 그녀의 주름은 존재의 불안함과 혼란스러움을 이겨낸 세월의 훈장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나오코가 목숨을 끊은 뒤, 레이코는 나오코가 물려준 옷을 입고 와타나베를 만나러 간다.


 다시 만난 와타나베와 레이코는 서로 진한 육체 관계를 맺고 각자의 길을 떠난다.  마치 서로의 존재를 깊이 각인하려는 것처럼. 말도없이 세상을 떠난 나오코를 기억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독후감상

 작품 결말에 대해 쓰고 싶지만 결말만큼은 남겨둬야 할 것 같아서 따로 쓰지 않으려 한다. 나는 작품의 결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내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건 내가 아닌 타인을 보고 있을때다. 생각해보면 단순한 진리이지만 그것을 놓치고 살때가 많다.


 작품 속에서 가장 흥미가 있었던 인물은 나가사와이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재수가 없지만 어쩌면 나는 그와 같은 삶을 꿈꾸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흔들림 없이 자기일을 척척 해내는 삶. 난이도 높은 세상의 퀘스트들을 가소롭다는 듯이 완수해버리는 모습들. 인생의 고통과 불안함과는 거리가 있어보이는 모습까지.


 돌이켜보면 항상 그렇게 '나'에게 집중하여 인생을 조망하려 했었다. 나는 어디쯤이지, 나는 어떤 길을 가고 있지, 잘 가고 있는것인지 항상 불안했던 날들. 의식적으로 삶의 테두리를 정하고 타인을 밀어냈던 날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살아왔지만 돌이켜보면 결국 나를 채워줬던 것은 내가 아닌 타인. 그리고 연인이었던 것 같다.  



By. 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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