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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구아빠 Nov 19. 2019

『반일종족주의』, 이영훈, 김낙년, 김용삼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더북클럽 서평팀, 책갈피

리뷰작성자 : Operarius Student

함께 모여 책을 읽고 자유롭게 글을 씁니다. 모두의 독서생활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북클럽 #책갈피






일전에 썼던 서평에서 “언젠가부터 한국의 근현대사를 서술할 때 심심찮게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운운하며 건조하게 서술하는 경향이 눈에 띄곤 한다.”라는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사실 '반일종족주의'를 염두에 두고 쓴 문장이었다. 



판매량이 보여주듯이 2019년 한국사회에서 가장 논쟁적인 책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썩 건전하지 못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집필에 참여한 저자들의 면면을 두고 봤을 때 아쉬움이 더욱 크다. 이제까지 보여줬던 연구자로서의 역량에 비해 너무 형편없는 책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모종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만 짐작한다.





'반일종족주의'가 워낙 전방위적으로 들쑤셔놓아서 학술적으로는 해당 분야마다 개별적으로 사실에 입각한 반박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지난 10월 1일 “‘역사부정’을 논박한다”라는 발표회에서는 '반일종족주의'에서 다뤘던 강제동원, 위안부, 한일협정, 친일청산 등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강제동원에 대한 글들을 주의깊게 봤는데, 당시 조선인들의 탄광노동을 진지하게 탄광의 노동수요와 조선의 노동공급이 맞아 떨어진 결과로 해석하는지 반문하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시장논리로 간편하게 해석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별 사안을 일일이 모두 언급하면 끝없이 평행선만 달릴 것 같고, 다만 각자 입론의 대전제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와 감각이 애초에 다른 것이다.



따라서 내용 전반에 대해 전면적인 비판과 반박은 무리이고 여기서는 유독 '반일종족주의'에서 느껴졌던 ‘무시간성’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반지성주의를 말하다'의 엮은이 우치다 다쓰루는 사실을 호도하는 자들의 주요 특징 중 하나로 무시간성을 꼽았다. 그들에게는 ‘지금, 여기, 나’밖에 없으므로 시야가 대단히 편협해지고 사실상 시간이 정지된 세계에 산다. 그리고 동일한 주장을 반복하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시간 또한 멈추려고 노력한다. 





 반복적인 선동의 결과 사회 안에서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고 이 때문에 그 사회의 자정 작용이 마비되기에 이른다. 이영훈은 2004년에 이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한 바가 있다. 그럼에도 비슷한 주장을 반복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당시에 비해 '위안부'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건전하지 않은 방향으로 다양해진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행태는 우치다 다쓰루가 지적한 무시간성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겠다.



 주장을 반복하는 것 외에도 '반일종족주의'는 의도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 특수한 역사적 경험을 왜소화함으로써 시간성을 무화한다. 해방 이후 한국의 공식적인 역사적 집단 기억에는 유례없이 특수했던 억압 구조가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반일종족주의'에서는 그러한 특수성을 소거하고 일반적인 현상으로 환원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자. 



“반일종족주의는 한국인의 내면을 구성하는 장기지속의 심성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p.238) 



 여기서 이영훈은 굳이 장기지속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영훈도 밝혔듯이 이는 본디 브로델의 용어를 빌려온 것으로 거칠게 말해 장기간 변하지 않는, 인간 바깥의 구조를 가리킨다. 불변성이란 곧 무시간성을 뜻한다. 



  역사학의 대전제는 시간의 경과, 다시 말해 변화이다. 불변성이란 변화의 반의어로서 의미가 있으며, 적어도 역사학에서는 불변성 그 자체로 독립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만물이 시시각각 변화하기 때문에 인간이 빚어내는 개별 사건은 특수한 개체성을 인정받는다. 역사학의 주된 관심사는 장기구조라는 매몰과 풍화를 이겨낸 바로 이 특수한 개체성에 있다. 



 비역사적 조건과 역사적 주체 사이 길항에서 역사적 주체의 역할을 분명히 긍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지나간 역사에서마저 뒤늦게나마 도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구조 뒤에 숨어 시간의 흐름을 멈추고 개별 사건의 특수성을 제거해버리면 당대의 민감했던 각축이 으레 있었던 반복의 무미건조한 박제에 그치게 된다. 무시간성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일종족주의'에서는 장기지속을 언급한 문장 이외에도 의도적으로 시간성을 제거하려는 표현이 속속 눈에 띈다.  


“요컨대 조선인의 재해율이 높은 것은 인위적인 ‘민족차별’이 아니라, 탄광의 노동수요와 조선의 노동공급이 맞아 떨어진 불가피한 결과였습니다.”(p.86)


“이에 한국의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반일종족주의입니다.”(p.251)


“그런데 역사를 세밀히 살피면 군 위안부는 이전부터 죽 있어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p.256) 



 본질적이라 함은 원래 그렇게 결정된 항구적인 것을 가리키는 바이다. 생성과 소멸이라는 가장 대표적인 일련의 변화상이 배제된 표현이다. 따라서 이는 한국의 민족주의가 생성된 특수한 역사적 맥락을 부인하는 것이며 동시에 향후 한국인들의 집단 심성의 변화 가능성 또한 봉쇄한 선언이다. 



 한편,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도 이전부터 죽 있었다며 이것이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님을 강조한다. 일본군 ‘위안부’가 성매매의 한 형태이며, 성매매란 인간 사회에 항상 있었던 거래라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이들 학자군의 학문적 바탕이 경제학이라서 그런지 시장과 거래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가 낭만적일 정도로 비역사적이고 탈정치적이다. 



 강제동원 또한 노동시장에서의 균형점에서 발생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보는데, 무시간적인 모델에 눈이 가려 엄연한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 것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도식적이다, 경제학자가 전제하는 이론이 때때로 얼마나 공허한지 보여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 화학자, 물리학자, 경제학자가 통조림을 어떻게 열 것인가 논의하고 있다. 경제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자, 여기에 통조림 따개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정리하자면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은 엄존하는 한국과 일본 사이 특수한 역사적 맥락을 가볍게 눙치고 일반론적인 서술로 일관하며 한국인들이 맹목적인 반일 감정에 휩싸여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시도가 어떠한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시비에 장단맞춰 이미 드러난 사실에 대해서도 진위 검증이 반복되면 누군가는 피로감을 호소하고 누군가는 사실 그 자체에 냉소를 보낼 것이다. 



 사실을 호도하려는 자들의 의도가 한국 사회 내 역사인식의 황폐화라면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 같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자의 실제 재판을 모티브로 한 ‘나는 부정한다’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썩 흥미롭지는 않았지만, 영화 속 판사의 질문, 신념이 된 거짓이 여전히 거짓인가라는 질문은 '반일종족주의'와 관련해서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이 책을 금과옥조로 삼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 책은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비판하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작업이 유의미한가. 20세기 한국사의 어두운 측면들에 대해 속속 제기되는 터무니없는 시비들은 어쩌면 사실과 거짓의 판별이 목표가 아닌 것 같다. 이러한 천박한 주장들에 대해 한국 사회는 사실을 거듭 검증하는 것 말고 그보다 세련된 또는 그보다 강력한 대응방안을 가지고 있는가. 현재로서는 비관적이다.




By. Operarius Stu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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