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북클럽 모임 기록, 2019년 2월 열세번째 만남
인류는 씨족으로 시작해 부족에서 민족으로 공동체의 크기를 넓혀왔다. 공동체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가족단위의 원시사회와는 전혀 다른 갈등들이 나타났다. 의사결정 방법 역시 그 전과 같을 수 없다. 인류가 농업혁명을 통해 이뤄낸 식량자급력의 증가는 역설적이게도 '더 가진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만들었다. 거기에 전쟁을 통한 다른 부족의 흡수까지. 이 모든 것들은 동일한 호모 사피엔스사이에서 특별한 호모사피엔스가 등장해야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렇게 파라오와 천자(天子)가 세상에 나왔다. 이들은 모두 신이 내려준 인간이었고, 이 들의 권력은 신에게서 주어졌다. 국가는 시민의 계약을 통해 합의된 공동체이고, 통치자는 시민들에게 그 계약을 통해 권리를 위임받았을 뿐이라는 '사회계약론'이 등장하기까지. '신이 내린 권력'에 의한 통치는 지속되었다. 길고 긴 시간이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달. 자유-평등-박애를 외친 프랑스 대혁명. 브루주아 계급의 등장 등으로 대표되는 근대의 시작은 수천년 동안 지속된 봉건적 질서에 비춰 강렬했지만 앞날은 불투명했다.
그런 근대의 태동기에 미국은 세워졌다. 그것은 하나의 실험국가였다.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땅을 차지한 덕에 그들에게는 수천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지배계급이 없었다. 유라시아 대륙과 단절된 덕분에 외부의 위협요소 역시 적었다. 독립전쟁이라는 당면과제는 국민들의 결집력을 불러일으켰다. 이 모든 상황적 요소는 자유주의와 연방제를 토대로 한 민주정치체제의 시도를 가능하게 했다.
우리는 지금 이 실험국가의 성공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험의 초창기를 상상해보자. 주기적인 선거는 그 자체로 혼란스러움을 내포할 수 밖에 없다. 장기적인 계획 설정이 불가능함은 물론이고, 옳은 정책보다 표를 얻기위한 정책이 우선 될 것이란 걱정이 앞선다. 선거가 끝난 뒤에도 마찬가지다. 다음 집권을 위해서 어렵고 난해한 문제들은 미뤄둔다. 대신 그때그때 나타나는 문제들에 집중하며 풀어나가는게 고작이다. 근시안적이다. 원근감이 부족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또한, 사적소유권과 인간의 기본권을 인정하기 때문에 국가사업을 위한 희생과 헌신을 강요할 수 없다. 이는 국가 차원의 개발계획과 정책수립을 하는데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 외교부문에서는 어떠한가. 마찬가지의 이유로 선거 득표에 반하는 외교정책을 펴는데 많은 제약이 따른다. 이것 역시 외교문제에서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될 수 있다. 이렇듯 민주주의는 산만하다. 그리고 중요한 문제들이 표류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단점이면에는 유연함과 투명함이라는 장점들이 내재되어 있기도 하다.
책은 위와 같은 민주주의의 특성을 토크빌이라는 인물의 통찰을 빌려 풀어나간다. 토크빌은 프랑스의 정치학자로 미국에서 행해진 자유민주주의의 실험을 목도했던 사람이다. 그는 앞서 말한 민주정치체계의 약점과 결함 그리고 강점을 꿰뚫어 보았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의 통찰은 민주주의의 태생적 한계와 본질에까지 닿아있었다. 저자는 역사의 실제 사례를 통해 토크빌이 말한 민주주의의 약점과 강점, 태생적 한계와 본질을 함께 살펴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역사의 실제 사례는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굵직굵직한 사건이다.
'1차세계대전-세계대공황-2차세계대전-수정자본주의-쿠바미사일 사태-신자유주의-소련붕괴'.
이미 고등학교때부터 배워왔고 익숙하게 들었던 사건들이다. 책에서 강조하는 점은 이 모든 사건들이 민주주의의 운명을 가를만큼 큰 위기였다는 사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그 과정에서 커다란 결함들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특유의 유연함으로 위기들을 잘 극복해왔다는 점. 그리고 그 위기관리 능력으로 체제경쟁에서 승리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토크빌의 통찰을 빌려 이야기한 민주주의의 특성들이 주효했다는 것이 책 전반의 내용이다.
이제 민주주의는 '역사의 종말'을 선언할 만큼 그 가치와 능력을 현실에서 증명해냈다. 여전히 세계에는 민주주의 외에도 다양한 정치체계들이 시도되고 있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강력하다. 심지어 서브프라임 사태를 통해 자본주의의 심각한 헛점을 목도하고 전지구적 경제위기를 겪었음에도. 더 나아가 지금의 세계질서가 완전히 붕괴될뻔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아끼지 않고있다. 그리고 어떤 위기가 오더라도 민주주의가 주도하는 지금의 세계에는 그 해결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래서 저자는 민주주의가 '덫'에 빠졌다고 한다. 민주주의는 본디 위기를 포착하고 피하는데 뛰어나지 못하다. 다만 위기관리에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역사에서 스스로 증명했다. 이제는 이 위기관리 능력에 의심을 갖는 사람이 없다. 어떠한 위기가 닥쳐도 잘 이겨낼 것이라고 믿는다. 바로 자만의 덫이다. 이 덫에 빠진 민주주의는 앞으로 더 큰 위기가 올때까지 해결해야 할일들을 미뤄두고 묵혀둘 것이다. 그 때 인류가 마주해야 할 위기는 과연 돌이킬 수 있을 만큼의 것일까?
저자는 상상력을 발휘해보자고 한다. 서브프라임 사태를 통해 드러난 ‘신자유주의 질서‘의 한계를 대안이 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에 대해서. 그리고 서로의 민주주의를 배우자고 한다. 각국의 민주주의가 본디 같을 수 없으므로 서로의 장점들을 학습해보자고 말이다. 인류가 돌이킬 수 없는 위기를 맞기 전에.
어려웠던 책이었다. 볼륨도 컸고. 그래도 너무 좋게 읽은 책이었다. ‘자만의 덫’이라는 짧고 강력한 메시지도 좋았고, 결론 도출에 이르는 서사도 좋았다. 하지만 상상력을 발휘해보자는 저자의 마지막 말은 어렵게만 다가온다.
신자유주의 질서를 대신하기 위해 지금보다 더 ‘큰 정부‘ 의 등장이 가능할까? 기술의 발달로 인해 전과 같은 뉴딜정책으로는 고용창출이 충분하지 않다. 무역과 금융, 기업의 규제는 초거대 다국적 기업 앞에서 당위를 잃어가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는 빈부격차의 심화를 내포할 수 있다. 줄어가는 생산인구와 늘어나는 기대수명. 전지구적 환경문제까지. 아직도 ‘역사의 종말’은 오지 않은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