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를 여는 글
이 글은 6년전 대학 교양수업에서 과제로 제출했던 것이다. 남다른 애착도 없고 딱히 만족스럽지도 않은 이 글로 브런치를 시작하는 것에 별다른 이유는 없다. 게으른 천성 탓에 새 글로 시작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면 이유이고, 과제 폴더를 정리하다 우연히 이 글을 봤다는 것이 그 두 번째 이유라면 이유다.
이 과제를 쓰던 무렵은 어떻게든 사람답게 살아보려 발버둥을 쳤던 시점이다. 당시 나에게 글쓰기보다 큰 위로가 있었던가. 싸이에 끼적이던 병맛같은 다이어리나 주마다 제출하던 4편의 짧은 글들은 힘들고 어렵기만 했던 그 시절의 내게 그루터기가 되어 주었다. 그러니 그 시절 글쓰기란 곧 해독제이자 진통제였고 어쩌면 존재의 이유였는 지도 모르겠다.
그 뒤로 한 동안 손에서 글을 놓고 살았다.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 차오르던 어떤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 메말랐기 때문이다. 무엇이 메말랐던 것일까. 지금의 난 그것이 희망이었다고 생각한다. 또 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희망이란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이며, 사랑이란 오래 참을 수 있는 의지와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메말라있던 것은 삶의 의미와 의지였을지도 모르겠다.
글씨는 이 세상에서 그 사람의 흔적을 진하게 생기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고 했던가. 글을 놓기 직전 의무감에나마 적어냈던 이 글에는 당시 꿈꾸던 사랑과 희망이 어렴풋이 묻어있다. 폴더 속 수많은 과제 중에서 유독 이 글이 눈에 띄었던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닌 인연이었을 수도 있다.
서른을 목전에 앞두고 나는 다시 글을 써보려 한다. 비록 부족한 글 솜씨지만 마음속 켜켜이 쌓여있는 응어리를 풀어내듯 글을 써보려 한다. 하나씩 하나씩 글을 쓰다 보면 훗날 그 흔적들이 성장의 마디처럼 남아있을 것임을 믿는다. 지금 다시 보는 이 못나디 못난 '일 포스티노를 보고 나서'라는 독후감이 지금의 메마른 삶에 죽비가 되어 줬듯이 말이다.
처음에 교수님께서 할리우드에 익숙한 템포보다 많이 느린 영화라고 했을 때 대충 어떤 느낌의 영화일지 감이 왔다. 이런 느낌의 영화는 ‘죽은 시인의 사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 처음 봤었는데 그 뒤로 이런 영화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 내 옆에서 같이 수업을 듣던 동생은 지루해 죽겠는 것처럼 보였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네루다를 만나 시인에 대한 꿈을 꾸게 된다. 그리고 시를 쓰게 되면서 사랑을 찾아 나서고, 사회주의의 꿈을 찾아 나서게 된다. 약간은 어리바리해 보이기도 하고, 순수해 보이기도 하는 주인공을 보면서 영화를 보는 내내 얼굴에 미소가 끊어지지 않았다. 주인공과 내가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적극적이지 못한 듯한 성격, 정체되어버린 삶, 좋아하는 여자에게 어쭙잖게 다가가는 모습, 첫눈에 반한 사랑 그리고 시를 써보고 싶다는 마음.
이 영화는 헐리우드의 풍부한 시각효과와 박진감 넘치는 사건 전개에 익숙해져 있는 내게 ‘정화’되는 기분을 들게 해줬다. 분명히 작은 영화지만 생각해볼거리가 많은 속이 꽉 찬 영화이다.
공산주의자인 네루다는 체포영장이 기각되자마자 작고 아름다운 섬을 떠나 칠레로 돌아가게 된다. 사회주의를 꿈꾸는 사람이었고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설레고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네루다를 기쁘게 했던 것은 자신의 시가 더 간절히 읽힐 수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니었을까. 그에게 시란 시를 쓴 사람 것이 아니라, 그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시란 어떤 것이었을까.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고등학교 때 문학공부를 하면서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서정적인 감정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서정주의 시들, 도란도란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한 백석의 시, 나와 많이 닮았다고 느꼈던 윤동주의 시나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오는 김소월의 운율감. 남들에게는 어렵고 난해했을 시문학은 자연계열에 진학한 나에게 하나의 소소한 일탈이었고 작은 유희이기도 했다.
숨 막히던 재수 시절 나는 일 포스티노에 나오는 섬과 같은 곳에서 주인공의 우상 네루다처럼 자연을 즐기며 시를 쓰는 상상을 하면서 숨을 골랐다. 아름다운 햇살이 내리쬐는 곳에서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시원한 바다를 배경으로 시를 쓰는 인생은 나에겐 꿈과 같은 일이다. 물론 그 꿈은 여전히 꿈으로만 남아있지만 말이다.
얼마 전 투표가 있었던 만큼 영화를 보면서 정치와 관련된 생각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주인공의 마을에 수도를 놓아주겠다면서 당선이 되어놓고 다시 말을 바꾸며 거드름을 피우는 인물이 낯설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무상급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경제성’과 ‘현실성’을 들어서 반대하던 사람들이 선거가 가까워지자 무상급식을 공약으로 내거는 모습이 떠올라서 일까.
돈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 어부에게 비싸다며 값을 깎아 물고기를 사려는 모습을 보며 만 명을 먹여 살릴 인재가 만 명분의 자본을 혼자 독식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현실이 떠올랐다.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적인 경제위기는 지금껏 우리가 최고의 가치로 믿어왔던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 속의 사회주의가 그 답은 아니지만 분명 지금의 자본주의는 수정이 필요하다.
조금 더 사람을 위하는 인간주의, 즉 휴머니즘의 회복이 필요할 것 같다.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는 것. 이것이야 말로 인류가 자본주의 속에 함께 꽃 피워왔던 민주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이 아닐까. 경쟁을 강요하고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내 몸을 갈아야만 하는 지금의 현실은 사람을 지치고 외롭게 만들 뿐이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시험일정 속에서 감상문을 작성하다 보니 또 불안하기도 하지만 머리가 상쾌해지는 느낌이다. 일 포스티노는 작고 아기자기한 영화인데 그 속에 생각할 것들이 많다. 시, 꿈, 사랑, 사회문제 등등. 주인공은 보잘것없고 순박하기 그지없는 집배원이다. 그런 그가 시인과 만나고 사랑을 하며 사회문제들을 겪으며 나아가는 것은 '어떻게 하면 사람이 사람답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닐까. 시와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활동부터 사랑이라는 타인과의 관계, 정치인과 경제라는 큰 틀 안에서의 논의가 별개인 것 같지만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일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