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란 단어를 네이버사전에서 찾아보니, 두 번째 의미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하느님, 하나님 또는 부처님의 은총" 하나님의 은총이라. 정의하기 쉽지 않다. 내가 볼 때, 이 '은혜'란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드물어 보인다.
그들은 과정이 어떻든 자기 삶에 이익이 된 것을 가리켜 이 '은혜'란 단어를 사용한다. 임대한 아파트의 전세금이 오른 것으로 은혜받았다고 하나, 오른 차액만큼 힘겹게 돈을 마련해야 하는 임차인의 안타까운 처지를 생각하지 못한다. 갭(Gap) 투자로 다주택을 보유하여 큰 이익을 얻은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께 복과 은혜를 받았다고 여길지 모르나, 전월세 집마저 구할 길이 없어 발만 동동 굴리는 이들의 말 못 할 고통을 깨닫지 못한다. 큰 병원에서 일하는 지인의 도움으로 수술이나 검사일정을 앞당기게 된 것을 하나님 은혜라고 말하는 이도 보았다. 하지만 나보다 훨씬 급한 조치가 필요한, 소위 '백'이나 '라인'이 없는 이들은 누군가 입은 특혜로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왜 순서가 빨리 오지 않느냐며 초조하게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내게 '은혜'라고 고백할 만한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불행'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은혜'란 말을 함부로 사용하면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자가 된다.
교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과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곳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은혜 중 하나다. 하지만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이 혜택을 누리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진다. 고위직에 있는 성도가 같은 교회 청년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입사혜택을 부여하면 타 교회, 혹은 교회 다니진 않으나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비그리스도인 청년들에게 그 회사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악한 기업일 뿐이다.
지진이나 건물 붕괴 등의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을 은혜로 여겨,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다며 간증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고인의 유족으로선 특정한 이에게만 기적을 베풀고 특혜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저주하며 믿지 않을 것이다. 일부 그리스도인이 남발하는 이 얄팍한 은혜의 개념이 결국 비난의 손가락을 교회로 향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이 땅에서 구현해야 할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기득권을 이용하여 특혜를 누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예수 믿는 사람만이 얻는 특혜를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은 은혜의 개념을 지나치게 싸구려로 만드는 무지한 처사다.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시는 분이다(마 5:45). 하나님은 반칙이나 편법을 쓰지 않으신다. 오히려 경멸하신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으로 온 인류에게 구원의 은혜가 주어진 것처럼, 은혜는 철저히 자발적 희생과 헌신을 전제로 한다. 나의 희생과 헌신으로 누군가 은혜를 입는다. 반대로 내가 알거나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 때문에 난 은혜를 누린다. 이처럼 은혜는 선순환한다. 내 집 앞에 쌓인 눈을 쓰는 지발적 희생과 헌신 때문에 익명의 행인은 안전함의 은혜를 누린다. '이 돈으로 무얼 할 수 있을까?'라며 후원하는 적은 돈이, 누군가에겐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도움이 된다.
내가 만난 하나님은 모든 자녀의 입가에 미소가 가득하길 원하신다. 반대로 어느 한쪽이 얻은 이익 때문에 다른 한쪽이 손해 보아야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에게 은혜란, 모든 이가 이익을 얻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