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에 대해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사람을 향해 소위 신실하다는 분들은, “뭘 그렇게 염려해. 믿음이 부족하니까 불안하지. 기도해, 기도!”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다”라고 정의할 수 없다.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거나 염려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정의한다면,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그리고 바울 같은 위대한 그리스도인들 역시 신실하지 못한 이들이 된다.
창세기 15:1은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민수기 21:34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와 그의 백성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나니 너는 헤스본에 거주하던 아모리인의 왕 시혼에게 행한 것 같이 그에게도 행할지니라.’”라고 말한다. 모세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수아 1:9을 보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호수아게도 말씀하실뿐더러, 심지어 바울에게도 말씀하신다.
사도행전 27:24은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여호수아, 그리고 바울 등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까? 어려운 질문인가? 아니다. 너무 쉽다. 이유가 무엇일까?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감정의 영역이다. 어떤 상황에 대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감정이니, 내가 그 감정을 어찌할 수는 없다. 그런데 내가 조정할 수 없는 감정의 영역에 대해 왜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라며 조정할 수 있을 것처럼 말씀하실까? 그것은 시선을 달리하라는 것이다.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 문제를 뛰어넘는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리라는 것이다. 나를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나를 도우시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두려움과 불안함이 평안과 확신으로 바뀐다.
불안 앞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의 정의가 무엇일까? “염려할 수 있지만, 두려움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그 문제를 뛰어넘는 하나님께로 끊임없이 시선을 향하므로 담대하게 이 문제와 직면하기로 작정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두려울 수 있다. 불안할 수 있다. 우린 신이 아니다. 로봇이 아니다. 사람이니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그의 신앙 수준을 판단해선 안 된다. 그러나 두려움에만 빠져있어서 늘 우울한 상태로 있는 것은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두려움과 불안함에 매몰된 채로만 머물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최근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나의 모습에 불안하고 염려했었다. 그러나 나의 문제를 놓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내게 “네가 기도하고 있으니 가장 큰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셨다. 정말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 그렇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불안하다면 기도하라. 만약 우리가 기도하고 있다면, 이미 가장 큰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