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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자본가 Oct 18. 2016

# 11. 금융 문맹이 초래한 서울대생의 비극

대한민국의 모든 고등학생이

대학진학을 하는 현실 속에서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수능’이라는 관문을 하나 넘게 된다. 






사실 대학을 진학하지 않으면 볼 필요가 없는 시험인데 

모두가 대학을 가려고 하다보니 

거의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수능이라는 시험을 준비하고 치르게 된다. 


마치 성인식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치러야하는 의식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수능의 목적은 대학진학이다. 


하지만 대학교가 우후죽순 생기면서 

대학교 정원 입학숫자보다 

학생숫자가 부족한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즉 공부를 못해서 대학을 가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수능에서 몇점을 맞든 

본인이 희망을 하면 

대학교에 진학을 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렇다보니 

더 이상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목표가 되지 못한다. 


어느 대학교에 들어가느냐가 목표가 되어버렸다. 


마침 대학교들도 높고 낮음의 순서로 쭉 한줄로 줄을 서 있다.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

  





모든 고등학생들이 가고싶어하는 학교는 

당연히 대학서열의 최정점에 서있는 서울대학교가 되고 

성적에 따라 목표대학은 서열대로 쭉 나뉘게된다. 


교수가 꿈인 아이도, 

변호사가 꿈인 아이도, 

가수가 꿈인 아이도, 

연기자가 꿈인 아이도, 

공무원이 꿈인 아이도 

모두 일단 수능을 봐서 좋은 대학을 가고자 노력을 하기 때문에 

수능이라는 시험은 어떻게보면 

대한민국 아이들이 맞이하는 사회의 첫 벽이 된다. 


그동안은 부모님의 울타리 안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대로 하면서 살아왔다면 

수능을 통해 생전 처음으로 

거절이라는 것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너는 이 대학에 올 수 없어’ 라고.

  


그렇다보니 사회에서도 좋은 대학을 나오면 

어느정도 인정을 해주는 분위기다. 




아무리 찌질해보여도 ‘서울대학교’를 다닌다고하면 

고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님은 

그 서울대학생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하면서 

자녀 교육에 대해서 상담을 받는다. 


아무리 허우대가 멀쩡해도 

지방의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대학을 나오면 

그 사람이 가진 능력이나 노력 등이 평가절하된다.

  


이렇게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에 따라 

피해를 보기도하고 이득을 보기도 하니 

그 중요성에 대해서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은 모두 인지하고 있다. 


인지하다못해 자녀들에게 

무조건 좋은 대학을 가야한다는 강요로 이어진다. 


그렇게 부모님의 말씀을 몇 년간 듣고 자란 아이들은 

대학교를 가기 전까지 

자신의 인생목표는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된다. 


당연히 그 아이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공부를 한다. 

좋은 대학교에 가면 뭐든지 해결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말이다. 


강남 대치동의 아파트 가격이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는 것도 

이러한 욕망의 가격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걸고 

수능이라는 제도로 승부를 한 아이들 사이에는 

대학이라는 것으로 자신의 계급 아닌 계급을 만든다. 


자신보다 낮은 대학에 다니는 아이들을 대할 때는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생각한다든가, 


자신보다 더 좋은 대학에 다니는 아이들을 대할 때는 

자기 스스로 움츠러들기도 한다. 


승자와 패자가 만났을 때 느끼는 그 감정말이다. 


모든 것을 걸고 승부를 한 만큼

 ‘내가 너보다 낫다’ 

‘너는 나보다 못하다’라는 경계가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대학교의 과잠이나 인터넷 훌리건 등으로 사회에 표출된다. 





대학교의 과잠은 

자신이 다니는 대학교와 학과명이 기재된 야구점퍼를 말하는데 

학과활동을 하면서 단체로 점퍼를 맞춰 입고 다닌다. 

소속감과 정체성 등을 점퍼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 


쉽게말하면 패거리문화라고 볼 수 있다. 


훌리건은 인터넷 상에서 

자신이 다니는 대학교를 치켜세우고 

다른 대학교를 까내려가는 인터넷 유저를 말한다. 


댓글이나 게시글로 타학교를 비방하거나 

자신의 학교를 내세운다는 측면에서 

키보드 워리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결국 과잠이든 훌리건이든 패거리 문화이다. 


‘우리는 너희와는 다르다’는 의식에서 표출되는 행위이다. 


수능점수라는 잣대로 그어진 

승자와 패자의식이 이러한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보면 참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난다. 


한때 승자였던 자가 패자가 되고 

한때 패자였던 자가 승자가 되는 일이다. 


수능에서 승리한 자들이 승승장구해서 대학교를 졸업하면 

인생 전체에서 승자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질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보다 못한 대학을 나온 아이가 

시간이 지나고보니 

자신보다 더 좋은 차와 더 넓은 집에서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일들 말이다. 


분명 자신은 그 아이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좋은 대학교에서 학위도 가졌는데 

막상 시간이 지나고보니 

더 잘사는 사람은 자신보다 공부도 덜 하고 

대학교도 어줍잖은 곳을 나온 그 아이가 더 잘 살더라라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학교공부와 사회에서의 성공은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결론내려버린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니까 말이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현상을 마주했을 때는 

그냥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방법이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의문을 갖는 순간 

풀리지 않는 고민의 늪으로 빠져들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았다. 

정말 좋은 대학과 성공 간의 상관관계가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대체 왜 그토록 좋은 대학에 진학하려 애쓰는 것일까? 

단지 학교로 이어진 인맥 때문에 좋은 대학을 가라고 하는 것일까?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갔다는 것은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한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건 못하는 학생이건 

공부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기 싫은 것이다. 


간혹 1000명 중에 1명 정도로 

공부가 좋다는 사람도 있을 수는 있지만 

그건 아주 예외적인 사례이므로 다루지 않겠다. 


그 하기싫은 것을 참고 해냈다는 것은 

인내력, 끈기, 자기통제력, 집중력, 성공을 향한 집념, 욕망 등 

모든 것이 그것을 해내지 못한 사람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사람은 당연히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사회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즉 학업성적과 사회에서의 성공 간의 연관 관계가 높지 않다고 결론내리기는 힘들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서울대생이 지방대생보다 못사는 일이 

왜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가 교육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학교 교육이 노동자 교육이기 때문이다. 

대학교의 목표가 더 이상 진리탐구가 아니라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대학교 교수들은 기업체를 찾아다니며 

자신의 학생들을 채용해달라고 부탁하는 일은 

이제 비일비재하다. 


매년 대학교에서는 

자신들의 학교 졸업생이 얼마나 취업했는지를 공개하며 

그 수치를 가지고 새로운 신입생들을 유혹한다. 


우리학교에 들어오면 너도 취업할 수 있다고 말이다. 

좋은 대학과 그렇지 않은 대학을 나누는 기준은 

더 이상 인류사회의 새로운 지평을 여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얼마나 더 좋은 기업에 학생들을 많이 보내느냐로 바뀌었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당연히 대학 교육도 그렇게 바뀐다. 

대학교 졸업요건으로 논문이 아닌 토익점수를 요구하고, 

인턴이라는 것으로 한학기 수업을 안들어도 학점으로 인정해준다던지, 

취업을 했다고 하면 수업을 안들어도 수업을 들은 것으로 해주는 일들은 

이제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되었다. 


대학교에 입학한 신입생들도 

이러한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1학년 때부터 취업준비를 하고 있다. 


그래도 서울대학교와 같이 좋은 대학교를 다니면, 

자신의 노력에 따라 어느정도 괜찮은 기업에 입사를 할 수 있다. 

학벌의 최정점에 있는 만큼 

그래도 취업시장에서 어느정도 우위를 가져가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학벌의 변두리에 있는 지방대는 여지가 없다. 

아무리 뛰어나도 학교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다른 길을 찾게 된다. 

자신이 직접 창업을 한다든지, 아니면 다른 아이들이 꺼리는 영업직을 하게된다. 

  



바로 여기서 하극상이 일어난다. 

얌전히 학교공부에 충실하며 좋은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은 

이 사회가 원하는 1등 노동자가 되어 

국가경제 발전과 회사의 성장에 기여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끼지 못한 지방대생 아이는

자의든 타의든 모험을 하게 된다. 


남들이 다 뜯어말리는 사업이나 장사 같은 것 말이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모두 성공하진 못하지만 

반드시 성공하는 사람은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자신보다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직장을 다닌다고 모두가 경제적으로 어렵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꾸준한 월급이 나오는 만큼 

갑작스런 부 역시 형성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저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해오는 것을 미덕으로 배운 서울대생은 

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모을 때도 꾸준히 일정금액을 적금에 들어 부를 형성하려고 한다. 


주식이나 부동산 같이 위험한 투자는 

절대적으로 지양하고 부모님 말씀대로, 


학교에서 배운대로 그저 꾸준하게 저축을 하는 것이다. 


금융 문맹이 가져온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열심히 일을 해도 구조적으로 부를 축적할 수가 없는 덫에 걸린 것이다. 

회사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회사의 오너를 포함한 주주만 돈을 벌고 

자신은 자신의 성과만큼 보상받지 못하는 것이다. 


대체 학교에서 배운대로 성실하고 묵묵하게 살아온 

이 사람은 무슨 죄가 있는 것일까?  


만약 죄가 있다면, 금융에 대한 무지가 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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