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까지, 네 명의 여성 아티스트

by the cobalt




유수한 미술관 순회전이 서울에서 선보이면서 미술사책에서만 볼 수 있었던 작품들을 해외에 나가지 않고도 자연스레 만날 수 있는 시대다. 게다가 웬만한 미술사 교양 수업만큼 수준 높고 전문적인 도슨트 프로그램까지, 원화를 직접 마주한 채 한눈에 미술사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전시 환경이 마련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로버트 리먼 컬렉션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더현대 서울 Alt 1 톨레도 미술관 명작 전 <렘브란트에서 고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샌디에이고 미술관에서 온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까지>, 포괄적인 미술사 서사를 내세우며 성황리에 진행 중이다. 그중에서도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 전을 찾았다. 르네상스 시대 여성화가인 소포니스바 앙귀솔라, 인상주의 화가인 수잔 발라동과 메리 커셋, 그리고 마리 로랑생으로 이어지는 여성화가들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였다.


고야, 엘 그레코, 드가 등 이름만 들어도 친숙한 남성화가들 사이에서, 미술사 안에서 여성화가들의 계보를 조금이라도 느껴봄직한 전시는 찾아보기 힘들다. 언급한 세 전시의 제목처럼 몇 세기에 걸쳐 변화한 미술사를 훑는 동안 여성의 이름을 하나라도 발견하기가 힘들다. 1970년 페미니즘 사상이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린다 노클린은 (아마도 처음으로) 이렇게 물었다.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 노클린은 이 물음에 심도 깊게 탐구하면서 재능, 천재성, 위대함과 같은 단어에 덧씌워진 신화를 걷어내며, 예술이 개인의 타고난 능력만이 아니라 제도적·교육적·사회적 조건 속에서 길러진 결과임을 설파했다. 여성에게 닫혀 있던 교육, 전시, 후원의 구조 속에서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부재했던 것은 필연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비록 한 점씩밖에 오지 않았으나 앙귀솔라, 발라동과 커셋, 로랑생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특별하게 여겨지는 전시였다. 여성들에게 모든 예술적 교육이 닫힌 상태에서 그들은 어떻게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을까?



서명할 수 없었던 이름, 소포니스바 앙귀솔라(1532-1625)


이번 전시에 온 그림은 앙귀솔라가 그린 펠리페 2세의 초상이다. 이탈리아 크레모나 귀족으로 태어난 앙귀솔라가 어떻게 스페인 왕의 초상을 그릴 수 있었을까? 16세기 이탈리아에서 화가가 된다는 것은 대개 어린 나이부터 공방에 들어가 엄격한 도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일이었다. 공방은 단순한 기술 교육의 공간이 아니라, 남성들만의 공동 숙식과 신체 관찰, 사교와 네트워크가 뒤엉킨 장소였다. 누드모델을 대상으로 한 해부학 수업은 여성에게 금기였다.


이런 시대에 몰락한 귀족가문에,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것은 소포니스바에게는 행운이었다. 딸들에게 라틴어, 문학, 회화 등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회화에 소질을 보이자 1546년경 여동생과 함께 베르나디노 캄피(Bernadino Campi)의 문하로 보내졌다. 아마도 캄피의 아내에게 보살핌을 받으며 수업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해부학, 야외를 나가야 하는 풍경화 수업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이러한 제한적 상황에서 앙귀솔라는 초상화에 집중하며 자신의 전문분야로 발전시켰다. 이후 베르나디노 가티(Bernardino Gatti)에게 부드러운 명암과 심리적 깊이를 지닌 초상화로 나아갔다.



IMG_8728.jpeg 소포니스바 앙귀솔라, <스페인 왕자(펠리페 2세 추정)의 초상, 1573.



미술 수업을 마친 뒤 고향 크레모나로 돌아온 소포니스바 앙귀솔라는 여동생들에게 회화를 가르치며, 가문 내에서 미술 교육을 이어가는 역할을 맡았다. 그녀는 자신의 배움을 개인적 성취에 머무르지 않고, 가족 안에서 공유하며 여섯 자매 중 엘레나, 에우로파, 루치아도 화가로 활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소포니스바 앙귀솔라, <체스 게임>, 1555. The National Museum in PoZnan. ArtStor digital library.



<체스 게임>은 이번 전시에는 오지 않았으나,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앙귀솔라의 작품이다. 소포니스바의 세 자매, 그리고 보모를 그린 이 그림은 최초의 여성 그룹 초상화다. 마냥 즐거운 자매들과의 시간을 그린 것 같지만, 당대 인식으로는 꽤나 도발적인 그림이다. 체스는 이성적, 전략적 사고와 권력구조와 위계 등 남성에게 허락된 세계를 상징한다. 보모와의 대비를 통해 자매들의 높은 신분, 위계를 드러내며, 주도적으로 말을 움직이는 모습이 앙귀솔라 자매들이 누렸던 환경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오른편 인물 미네르바가 말을 잃은 상황에서 허망하지만 침착하게 언니인 루치아를 바라보며, 왼쪽 자매는 여유롭게 관람자를 바라본다. 6세 정도인 막내 유로파는 말을 잃은 언니를 웃으며 바라본다. 각각의 인물을 의 성격이 느껴질 정도로 생동감 있고 심리적으로도 밀도 높은 그룹 초상화이다.


딸들에게 특별한 문화적 환경을 제공했던 앙귀솔라의 아버지는 미켈란젤로, 이사벨라 데스테 등 권력 있는 사람들에게 딸의 그림을 보내며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그 결과 앙귀솔라가 여성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쌓아가게 되면서 스페인 왕실까지 진출한 것이다.


앙귀솔라를 스페인 궁정화가라고 칭하기도 하지만 앙귀솔라는 공식적으로 스페인 왕비 엘리자베스 발루아의 여성수행원(lady-in- waiting)이었다. 당시 14세에 불과했던 왕비를 예술교육과 도움을 주는 역할이었던 것이다. 이후 왕비의 딸들의 가정교사로도 있었으니 앙귀솔라가 여동생들의 교육을 담당했던 것이 빛을 발했다고 할 수 있다.


스페인에서 앙귀솔라는 많은 초상화를 남겼고 그중 <필리페 2세의 초상>이 있다. 필리페 2세는 1527년생으로, 앙귀솔라보다 연배가 많다. 그런데 왜 중년의 필리페 2세를 어린아이로 그렸을 까? <펠리페 2세의 초상> 속 펠레페 2세는 총명한 눈동자, 어딘지 모르게 근엄하고 성숙하지만 맑고 순수한 표정의 펠리페 2세의 어린 시절 모습을 상상해 그린 작품이다. 절대왕정 통치자의 정당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인간적이고 순수한 모습을 재구성한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그린 앙귀솔라의 그림과 달리, 스페인에서 그린 앙귀솔라의 작품에는 앙귀솔라의 서명이 없다. 이는 앙귀솔라의 스페인 왕실에서의 그림은 '비공식적'인 그림이었기 때문이었다. 여성화가의 그림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몇백 년이 더 흘러야 했을까?



나의 재산을 나의 시녀에게 메리 커샛 & 마리 로랑생


19세기 예술의 중심지 파리는 각지에서 몰려든 예술가들의 다양하고 실험적인 도전이 만연한 곳이었다. 이런 혁신적인 분위기에서도 해부학 수업에 여성 화가들은 여전히 배제되었다. 노클린의 글처럼, "교육과정에서 궁극적인 단계의 수업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주류가 되는 중요한 미술품을 제작할 가능성을 사실상 박탈당함을 의미했다." 제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앙귀솔라처럼,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파리의 여성들이 있었다.


메리 커샛은 미국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미국 상류층 여성에게 교양수업 같은 예술수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녀의 가족들은 이런 급진적인 결정에 반대했으나 커샛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파리로 건너온 카시트였지만 당대 파리에서조차 여성이 외부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공식적 교육 기관이 아닌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가 운영하는 개인 화실에서 교육을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술집, 카페, 현대적인 거리, 극장 등을 활보하며 현대적 장면들을 그릴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여성화가들은 자신 주변인물이나 개인소유 별장, 정원등을 그리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IMG_8767.jpeg 메리 커샛, <푸른 보닛을 쓴 시몬느>, 1903.

카시트가 여자 아이는 소위 말하는 '여자아이 다움'의 전형성이 없다. 앙귀솔라의 자매들처럼, 어떤 전형적인 틀에서 벗어난 아이의 개성, 고유함을 포착한다. <푸른 보닛을 쓴 시몬느>는 아이답지 않은 성숙함도 보이고, 어딘가 상념에 잠긴 듯하다. 쾌활함이나 귀엽거나 사랑스러운, 그 나이 때 여자 아이에게 '요구'되는 어떠함에서 벗어나 있다.


mary cassat.jpg 메리 커셋 <파란 안락의자의 소녀>, 1877-8.


드가 친구의 딸이라고 <푸른 의자 위 아이> 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보고 있다면 서둘러 다리를 모아주고 치마를 끌어당기고 '똑바로 앉아야지'라고 한마디 할 것 같다. 아이는 어딘가 풀어져 있고 나른하다. 특히 상류층 아이에게 요구되었을 절제와 규범을 생각하면 여자아이의 자세는 더욱 도드라진다. 커샛은 "아이들은 무척 자연스럽고 진실하지요. 아이들에게는 숨은 의도가 없다"라고 쓰며 아이들을 그리길 좋아한다고 썼다. 여성의 역할을 내면화하지 않은 아이들의 모습이기에, 어쩌면 더 특별하고 고유해 보이는 것인지 모른다.

Nana_Manet_1877.jpg 에두아르 마네, <나나>, 1877.

마리 로랑생의 <나나>는 이와 대비된다. 파리 매춘부의 삶을 그린 에밀 졸라의 소설 <나나>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에두아르 마네의 <나나>를 보면 남성이 보는 매춘부의 전형을 보여준다. 늙은 신사 그리고 거울 앞에서 치장을 하고 있는, 어리고 아름다운 매춘부 나나. 어떤 거리낌도 없이 그 시선을 즐기는 듯 산뜻하게 웃고 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로랑생의 <나나>는 음침하고 우울하다. 잘록한 허리와 풍만한 힙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마네의 <나나>와 달리 로랑생의 나나는 그 어떤 성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있지 않다. 그저 삶이 찌들고 어느새 표정이 없어진, 어느 불운한 여성이 있을 뿐이다.

IMG_8783.jpeg 마리 로랭생, <나나> 1920.

메리 커셋과 마리 로랑생은 현대 여성의 개별적인 목소리를 화면 안에 담고 있다. 마치 그녀들의 삶을 색채로, 선으로 기억하려는 듯,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독신이었던 커샛과 결혼은 했으나 평탄치 않은 결혼생활로 아이가 없었던 로랑생은 성공한 여성화가로서 모은 유산을 조카나 가족이 아닌, 자신의 가정부에게 주라는 유언을 남겼다(로랑생은 자신의 가정부를 양녀로 삼았다). 이는 평탄치 않은 여성화가로서의 삶을 가장 잘 이해하고 헌신한 다른 계급의 이름 없이 노동하는 또 다른 여성에 대한 인정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빛나는 삶 뒤에 이름 없이 노동하고 헌신하는 또 다른 여성의 존재를.


내 초상화는 내가 그린다, 수잔 발라동

미혼모의 딸로 태어난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 1865–1938)은 일찍이 생계형 직업에 뛰어들었다. 재봉사, 그릇닦이, 서커스 곡예사등의 일을 했다. 앞서 살펴본 앙귀솔라, 메리 커샛이 가족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상류층 여성이었고 미혼모의 딸로 태어났으나 국회의원이었던 생부로부터 충분한 양육비와 학비를 지원받은 마리 로랑생과 구분되는, 그야말로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몸이 다쳐 곡예사일을 할 수 없게 된 발라동은 모델일을 시작한다. 르누아르, 푸뷔 드 샤반느(Puvis de Chavannes) 등의 모델이 되었으며 미혼모로 아들을 낳기도 했다.

suzanne_valadon_1963.10.60.jpg 오구스트 르누아르, <수잔 발라동>, 1885.

자신의 인생만큼이나, 발라동의 작품은 거침이 없다. 발라동은 당대 유명한 화가들이 그리는 자신의 모습에 반기를 든 듯,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자신의 인생만큼이나 거침없이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그림에 가능성을 발견한 드가와 툴루즈 로트렉의 도움으로, 발라동은 자신의 작품세계를 더욱 과감하게 확장시켜 나갔다.

IMG_8786.jpeg 수잔 발라동, <창문 앞에 있는 젊은 여인>, 1930.

르누아르가 그린 발라동의 모습과 발라동의 여성을 비교해 보자. 발라동이 60이 넘어서 그린 창문 앞에 있는 여인>은 발라동의 젊은 시절 얼굴과 닮아있다. 르누아르의 그림에서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온 듯, 밝고 순수한 여성의 표본인듯한 모습과 <창문 앞에 있는 젊은 여인> 속 다부져 보이는 여성은 같은 사람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다. 발라동은 화가로서 성공해 국립 미술가 협회 살롱(Salon de la Société Nationale des Beaux-Arts)에서 전시하면서 제도권 내에서 입지를 확인했다. 상업적으로도 성공해 파리 근교에 작은 성을 사기도 했다. 60대가 지난 무렵 발라동은 위의 그림처럼 자화상이라고 칭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젊은 시절과 닮은 여성의 모습을 자주 그렸다. 자신의 힘으로 투지와 대담함으로 여성화가로서 성공한 그녀가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남성화가의 모델로 존재했던 그 시절을 재구성하려는 듯 보인다.


누드모델로 계산된 각도에 따라 남성화가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 했던 과거와 달리 수잔 발라동의 '젊은 여인'은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편안해 보인다. 자신의 장소에서 여유로운 오후를 만끽하듯 편한 옷을 입고 창밖의 자연을 의식한다. 밖을 향해 열린 창문처럼, 그녀의 미래도 그렇게 호기롭게 열려 있는 듯하다. 마침내 누군가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그리는 주체'로 발돋움한 것이다.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까지', 수많은 '거장'이라 일컬어지는 화가들 사이에서 네 명의 여성 아티스트는 조용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딸과 함께 본 소포니스바 앙귀솔라, 메리 커셋, 마리 로랑생, 그리고 수잔 발라동이기에 더욱 의미 있는 전시가 되었다. 그녀들은 모두 제약, 한계에 둘러싸인 채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힘껏 벽을 밀고 비교적 쾌적한 공간을 후대의 여성화가들에게 유산으로 남겼다. 나는 딸에게 어떤 유산을 물려줄 수 있을지를 되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참고도서

그리젤다 폴록, <메리 커셋, 현대 여성을 그린 화가>, 에이치비 프레스, 2025.

린다 노클린,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 아트북스, 2021.

정하윤, <찰나의 회화, 영원한 감각>, 아트 에센스, 2025.

프랜시스 보르젤로,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 2017.

GA Books, <Marie Laurencin: The Bliss of Colors> 전시도록, 2017.



https://www.studiointernational.com/index.php/suzanne-valadon-review-centre-pompidou-paris

https://www.messynessychic.com/2021/10/15/renoirs-art-model-was-the-greatest-painter-you-never-heard-of/

https://artherstory.net/sofonisba-anguissola-portraitist-of-the-renaissance-at-rijksmus eum-twenthe/

https://www.theguardian.com/uk/2005/oct/17/gender.arts https://www.dailyartmagazine.com/sofonisba-painter/

https://www.theguardian.com/film/2025/jul/21/sofonisbas-chess-game-review-anguissola-the-game-of-chess-renai ssance-art-documentary

https://www.nga.gov/stories/articles/mary-cassatt-brings-girls-and-women-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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