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나이 서른아홉, 곧 사십 세가 된다.
삼십 대는 이뤄놓은 것이 없는 것 같아, 젊음이 다 가버릴 것 같아 초조한 마음에 쫓겼다.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초조하고 불안해서 개가 자기 꼬리를 잡으려 빙빙 돌듯 뚜렷한 목적도 없이 분주한 기분이었다. 사십 세로 접어드니 그런 초조함은 외부적인 가치들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기대, 사회적 기대, 나이에 대한 압박.
거기서 더 나아가면, 결국 나에게 행복을 주는 것에 집중하는 현명함이 생긴다. 이때쯤이면 주위의 잔소리가 사라지는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십을 가까이에 앞둔 사람에게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아마 자신의 습관대로, 살아온 행적에 따라 어느 정도 '삶'이란 것이 구축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제야,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나의 순수한 내재적 동기에 의해 움직일 수 있는 나이다. 가야 할 학교도, 반드시 통과해야 할 시험도 없고 아마 눈치 볼 상사도 몇 명 안 남았을 거다. 지금까지 보여준 삶의 행적이 매우 화려하지 않은 한,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거는 기대가 없달까. 웃프지만 그것이 주는 자유로움이 있다. 나도 나에게 거는 기대란 게 딱히 없어서, 뭔가를 배워도 그저 그 순간에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더 즐겁다. 목적 없이 배우는 것의 즐거움을 깨닫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저 깊숙한 곳에서, 온전히 나에 의해 기인한, '하고 싶은 것'들이 고개를 든다. 마흔 쯤 되면 꽤나 현실적이 되기 때문에 그 하고 싶은 것들이 그렇게 대단하거나, 화려한 것들이 아니다. 해보지 않은 운동을 한다던가, 시간이 없거나 해야 하는 의무들로 가득해서 읽지 못했던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등의 작고 소소한 것들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해 나가는 일이, 그리고 그로 인해 조금씩 달라지는 내 주위의 사람들이, 그리고 나의 모습이 새롭다. 소중하다.
시간, 삶이 얼마나 허비하기 아까운 것인지,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되는 나이 이기도 하다. 내가 이제 젊지 않음을 매일같이 각인시켜 주는 흰머리, 주름과 같은 신체적인 것들 때문만은 아니다. 이제는 젊은 시절처럼 막연히 당연히 있는 줄 알았던 시간은 사십 세쯤 되면 여러 가지 의무들에 얽매여 있고, 나에게 주어지는 몇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복리의 법칙처럼 쌓이고 불려져서 그 모이고 쌓인 시간들이 어느 순간 나의 일부분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야심 많던 나의 십 대에게 지금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 아이는 아마 매우 속상할 것 같다. 그렇게 '무언가가 되기를' 열심히 악착같이 열망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안정적이고 행복해서, 십 대 이십 대를 준다 해도 지금을 선택한다면 그 아이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지금의 만족도 매일같이 좀 더 나은 나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애썼던 젊은 시절의 내가 만든 것이니까.
돌이켜보면, 대단한 여성이 되기를 열망은 했으나 나의 선택은 절박할 만큼 관계와 인생의 풍요를 선택했다. 일과 직업에 몸을 던져야 할 20대에 결혼을 했고 아이들로 인해 나의 삶은 정신적으로 빈 공간이 채워졌다. 감정의 색채도 다양해졌다. 나의 '열망'과 나의 선택으로 인해 만들어진 환경이 너무나 달라서 삼십 대 초반에는 우울함도 있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이 아까웠고 쉽게 포기가 안 돼서 침울했다.
이제야 깨닫게 되는 것은 열망과 선택은 다르다. 열망은 막연히 누구도 할 수 있는 것인데 선택은 여러 가지 중 하나를 절박하게 골라야 한다. 나는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충족시킬 수 있는 독립적인 여성이길 '열망'했으나 사랑, 안정적인 관계, 나의 가족을 이루는 일을 더욱 절박하게 필요로 했다. 내가 매순간 선택했던 결과들이 나의 삶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현재도 헛되이 보낼 수 없다. 미래의 나의 모습도 오늘 내가 선택한 것들이 씨가 되고 싹이 나고, 꽃이 움트고, 피어난다는 것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