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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룬아 Dec 07. 2015

타투이스트 꽃 인터뷰

그림으로 하는 이야기 04

문자로 받은 비밀스러운 주소를 따라 번잡한 옷가게들 사이에 낀 건물 옥탑으로 오른다. 사무실 현관을 가리고 있는 발을 헤집고 들어서니 왼쪽 구석에 침대로 생각되는 기다란 가구가 하나 놓여있고, 그 옆 장식장 안에는 갖가지 색상과 형태의 해골 모형이 즐비하다. 거뭇거뭇한 곰팡이가 슨 벽에도 해골 그림이 몇 장 붙어있고, 사이사이 빈자리는 올드스쿨 스타일의 핀업걸 일러스트가 메꾸고 있다. 푸르스름한 단면의 유리 상판이 얹혀진 테이블에서는 짜장면을 점심으로 때운 흔적이 남아 있고, 베란다로 나가는 문 옆에는 투명한 콜라병이 담배꽁초로 다시 새까맣게 채워져 있다.

약 7년 전 방문했던 타투샵의 전경이다. 물론 여전히 홍대의 골목을 채우고 있는 샵들의 모습이지만, 우리나라의 타투씬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도 발전해왔다. 결국 나는 우드 블라인드 사이로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다섯 평 남짓한 작업실에서, 오크나무 침대에 앉아 픽사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며 시술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의 타투샵은 더이상 유별난 곳이 아니게 되었다.

1층의 카페에서 커피를 사 들고 올라간 오피스텔 역시 편안했다. 한쪽에는 그리다 만 캔버스가 이젤에 얹혀 있고, 창가에는 오크나무 침대와 아쿠아 빛 작업대가, 그리고 곳곳에 화분과 꽃이 놓인, 꽃다운 나이의 타투이스트 작업실을 방문했다.

어떻게 불러야 하나요? 플라워님이라고 하는 게 맞나요?


플라워는 영어로 아이디를 만들다 보니 생긴 거고, 꽃 또는 꽃님이라고 불러요. 도이님(타투이스트)께서 광년이 컨셉을 제안하셔서 '꽃'으로 짓게 됐어요.


실제로 꽃 작업을 많이 하시던데요.


이름 따라간다는 말이 맞나 봐요.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이름을 짓고 나니 꽃 작업만큼은 최고로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공부도 하게 되고, 작업도 많이 하게 됐어요.


꽃을 좋아하시는 거로 생각했어요. 직접 꽃을 만지는 일보다는 그림으로 표현하는 게 적성에 맞나 보다.


특별히 꽃을 좋아한다기보다는, 자연물을 좋아해요. 고등학교 때도 특히 자연물을 잘 그렸어요. 하지만 입시에는 정물을 그려야 해서 힘들었죠. 그렇게 힘들게 진학한 학교에서는 제품디자인 전공을 했고요. 디자인 과를 졸업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얘기를 믿은 거예요. 디자인이 뭔지도 모르고 들어간 학교는 충격적이었어요. 마치 공대에 다니는 기분이었거든요. 그래서 학교 밖에서 서양화 그리는 언니들 쫓아다니며 배우려고 했어요.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마음이 컸을 텐데, 타투의 길로 들어선 이유가 있나요?


그림을 그리려고 작업실을 얻었는데, 공간이 생기니까 욕심도 같이 생기더라고요. 마침 바늘이(타투이스트, 단짝친구)가 타투를 하고 있어서, 무작정 배워봤어요. 이미 큰 타투를 새긴 친구들이 있어서 사이사이에 티 안 나게 연습도 했죠. 그러다 보니 타투를 해달라는 친구들이 생기고, 손님도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타투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계기가 있어요. 학교 다니면서 짬 날 때마다 했는데, 손님 작업에 실수를 한 거예요. 하트 모양의 레터링 도안이었는데, 시술이 끝나고 보니 마지막 단어가 빠졌더라고요. 정말 무서웠어요. 하트 안에 단어를 추가하는 방법으로 보완했고, 결과적으로는 마음에 들어 하셨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그래서 휴학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3개월 동안 도이님 작업실에 있다가 독립했어요.


서울 살기 괜찮아요?


올라올 때 느낌이 왔어요. 아, 이제부터 내가 발을 딛고 살아야 할 곳이구나. 단짝도, 스승님도, 엄마 같은 목사님도 모두 서울에 있어요. 전 힘들면 도망치는 사람이었어요. 특히 엄마 품으로. 서울에는 엄마가 없잖아요. 그래서 교회에 많이 의지했어요. 하나씩 차근차근 이겨내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뭐가 제일 힘들어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퇴보하진 않을까, 그게 가장 두려워요. 제자리에 머무는 것도 퇴보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타투를 시작하는 분들도 점점 많아지니 조급해지고요. 남들보다 더 빨리, 많이 해야 살아남을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에 무작정 달렸어요. 하루도 쉬지 않았어요. 그러다 주일에는 작업하지 않는 게 어떠냐는 조언을 받았고, 작은 것을 위해 큰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아서 요즘에는 일요일에 쉬어요. 자신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해요.

타투씬이 많이 개방됐죠. 장단이 있을 것 같아요.


타투에 대한 인식이 변하면서 관심이 많아진 게 좋기도 하지만, 그만큼 경쟁도 심해졌어요. 주변에 미술 하는 친구들도 한 번씩은 해보고 싶어 하니까요. 하지만 그림을 잘 그린다고 타투도 잘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조금 다른 감각과 기술인 것 같아요. 실제로 타투에 뛰어들었다가 힘들어서 포기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도이님이 항상 그러셨어요. 평생 타투할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선 고객들과의 관계도 중요하고, 제 페이스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고, 다방면으로 관리를 잘해야 하죠.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는 불법이다 보니 언제나 약자의 입장에 있다는 사실이 불안하게 해요. 부모님이 가장 걱정하시는 것도 그 부분이에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법 앞에서 당당할 수 없는 것.


부모님이 개방적이신가 봐요.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제 몸에 있는 문신도, 타투이스트 활동에 대해서도 숨기고 지냈는데 하루는 도이님이 말씀드리라고 하셨어요. 그러면 부모님과 짐을 나눌 수 있게 되는 거라고. 결국 보여드렸는데,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셨어요. 지금은 인스타그램 가입하셔서 제 활동 다 보시고, 댓글도 제일 많이 달아주세요. 매일 오던 전화도 요즘엔 뜸하네요. 마음이 편해지셨나 봐요.


타투할 때 가장 신경 쓰는 건 뭐에요?


도안이요. 도안이 잘 나와야 결과도 좋아요. 시술 자체는 기술이라, 하면 할수록 익숙해지고 점점 늘어요. 이제는 연필로 그리는 것과 별다를 게 없어요. 하지만 도안은 달라요. 종이에 그렸을 땐 예뻐 보여도 막상 몸에 대보면 느낌이 다르거든요. 도안 때문에 예약을 미룰 때도 간혹 있어요. 정말 좋다고 생각되기 전에는 시술해드릴 수 없거든요.


타투에도 파가 있다면서요. 굳이 나누자면 이레즈미나 올드스쿨 등의 작업을 하는 '정통파'가 있고, 요즘 많이 하는 그래픽적이고 간결한 느낌의 '감성파'가 있다고 들었어요. 정통파가 감성파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부분도 있다고요.


제가 하는 작업을 감성타투라고 부르더군요. 그리고 그것도 타투냐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정말 실력 있는 타투이스트들은 경계하지 않아요. 다른 스타일의 작업으로 받아들일 뿐이지. 작업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장사로 생각하니까 못마땅한 거예요. 그리고 장르로 분류한다 해도 타투이스트마다 각자의 색깔과 퀄리티가 있는 걸요. 저 또한 취향이 있으니 선호하지 않는 스타일도 있지만, 실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다양성을 인정해야 시장이 활성화되는 건데 말이에요. 위협적으로만 느껴졌던 타투에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것도 '감성타투'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해요. 타투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는데, 처음 시술을 받으려는 사람들에게 해줄 조언이 있나요?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확실하게 아는 것이 중요해요. 타투이스트 실력이 좋다고 해서 모든 걸 해줄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요즘엔 SNS로 작업을 보기 쉬우니까, 많이 찾아보고 원하는 스타일을 찾아가세요. 그리고 한가지 도안을 고집하기보다는 주제나 요소, 스타일 등을 알려주고 도안을 맡기는 게 좋아요. 그럴 때 작업자 능력의 최대치가 나오는 것 같아요. 자신이 작업 받을 타투이스트를 믿는 게 중요하죠.

그리고 도안은 절대 반복하지 않는 게 철칙이에요. 모든 작업은 제 것만이 아니라 함께 상담한 고객의 것이기도 하니까요. 내 도안을 누군가가 똑같이 하고 있다면 기분 좋겠어요?


작가이기 전에 서비스업이잖아요. 까다로운 작업이기도 하고. 고충이 많을 것 같은데.


경력이 쌓이고 작업 퀄리티가 높아지면 가격대를 높이게 돼요.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가 아니라, 낮은 가격으로 다작하는 것보다 높은 가격으로 작업량을 줄이는 게 결과가 좋거든요. 하나의 작업에 더 집중할 수 있고. 하지만 금액 때문에 고객층의 연령대가 높아지면서 저의 어린 나이(23)가 걸림돌이 되었어요. 작업을 미리 보고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신뢰하지 못하거나, 만만하게 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거든요. 참 많이 울었어요. 그런데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작업이 쌓이니까 조금씩 없어지더라고요.


그 사이에 자신감이 더 붙기도 했겠죠.


맞아요. 외국 고객이 꽤 많은데, 그분들은 제가 어린 걸 알고는 더 좋아하세요. 이 나이에 이렇게 작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신기해하고, 특별한 작업을 받았다고 생각해주니 참 감사하죠.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는 않으실 건가요?


디자인은 그만두고 서양화로 편입하고 싶어요. 이젠 제가 뭘 하고 싶은지, 뭘 해야 하는지 알겠어요. 졸업을 해야 한다기보다는,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은데 배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점점 들어요.


타투라는 샛길로 빠지긴 했지만 개인 작업을 계속 이어가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가늘더라도 끈을 놓지 않는 건 중요하거든요.


정말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하지만 순수예술만 해서는 생활비를 벌 수도 없고, 세상에 알려지기도 너무 힘들잖아요. 저만의 메리트를 가져보려고 시작한 타투가 삶에서 이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줄 몰랐어요. 샛길이라고 하기엔 너무 재미있고, 적성을 찾은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린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제 꿈이죠. 타투도 평생 하고 싶은 일이지만, 힘든 시기가 분명히 올 거예요. 타투라는 작업이 주는 허무함이 있어요. 손님들이 왔다 가면 작업실에 혼자 덩그러니 남고, 작업은 누군가와 함께 떠나죠. 몸에 그리는 그림이라 제약도 많고요. 그런 구멍들을 채워주는 게 바로 서양화예요.

하늘을 자주 그려요. 누구나 가끔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잖아요. 그 순간을 표현하고, 공감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물감으로 표현하는 게 쉽지 않네요. 원래는 편안한 느낌의 하늘을 그리고 싶었는데, 자꾸만 그림이 어둡게 나와요. 제 심리상태가 그대로 전달되나 봐요. 이 그림들을 끝내야 할지, 폐기해야 할지.


마음에 안 든다고 버리지 말고, 자신의 변화를 그림으로 남기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작업이 쌓이면 흘러온 시간이 한눈에 보이겠죠. 타투도 마찬가지고요. 타투와 회화 작업 사이의 관계는 어떤가요?


타투나 유화나 톤이 비슷해요. 가벼운 느낌을 좋아해서, 블랙을 쓰더라도 무겁지 않게 표현하려고 해요. 차이점이 있다면, 그림 그릴 때는 물감을 던지고 뿌리면서 속도감 있게 작업하는 편인데, 타투는 최대한 섬세하게 하죠. 그러다 보니 그림을 그리는 패턴도 조금씩 정리되는 것 같아요. 러프한 그림이야말로 막 그리는 것 같아 보이지만 정말 좋은 감각을 필요로 하는지라, 이 상호작용이 좋다고 생각해요.


어떤 작가가 되고 싶으세요?


감동을 주는 작가요. 제가 느꼈던 감동을 전달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타투에서도 제 상태가 드러나요. 편안한 마음으로 작업하면 결과가 더 좋거든요. 마음가짐을 관리하는 게 프로로서 가져야 할 자세인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작가', 이 대목에서 난 부끄러워졌다. 나도 지난날 어느 시점에서는 그런 미래를 상상했던 것이 확실한데, 어느새 그런 건 순진한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거다. 때 묻지 않은 감정과 손을 가진 그녀의 그림을 몸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사뭇 부러워졌다. 가장 순수했던 때의 작품을 평생 가져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녀는 시들지 않는, 그리고 결국엔 주인과 함께 흙으로 돌아갈 꽃을 심는 타투이스트였다. 또한 노을과 구름으로 시작되어 추억으로 끝나는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작가였다. 영원히 싱싱한 꽃처럼,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변화무쌍한 하늘처럼 남겨질 그녀의 자취를 따라가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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