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내내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지만, 나는 특히 요즘 지금의 나를 알아가는 동시에 지난날의 나와 직면하는 시간을 자주 갖게 된다.
그중 제법 큰 파이를 차지하는 게 hsp와 ADHD인데, 요즘 ADHD가 관심받으면서 패션 ADHD가 많아졌다고 비아냥대는 사람들도 많다지만... 진단만 받지 않았을 뿐, 나는 꽤 제법 성골 ADHD에 속하는, 본투비 고지능 ADHD가 분명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무리 미리 시작해도 일을 절대 미리 할 수가 없고, 막판에 울면서 '이게 될까?ㅠㅠ'했는데 갑자기 말도 안 되는 미친 폭발력이 솟아나서 '이게 되네?' 했는데 심지어 남들보다 웬만해서 잘해왔던 것이라든지. 그래서 그런 능력치와 텐션을 항상 발휘하면 나는 정말 개쩌는 사람일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지만 그게 참 잘 안 되었던 것이라든지.
한 번 꽂히면 진짜 도른 사람처럼 몰입력이나 능력치가 돌아버리지만 꽂히지 않은 것에는 놀라우리만큼 관심도 흥미도 없다든지. 그래서 앞에 말한 능력치가 여기서는 시도 때도 없이 발현될 때가 있다든지.(심지어 의외로 누구랑 잘 싸우지도 않는데, 싸우겠다고 마음먹고 꽂히면 지는 일도 없다...)
학창 시절 생각해 보면 시험 공부할 때 칠판이나 교과서를 장면으로 통째로 외워버렸던 것이나, 목소리, 장면의 감각 같은 것으로 기억했던 것이라든지(기억이 대체로 이미지나 영상인 편)
드라마 과몰입해서 기다리지 못하고 몰아보고 감정 이입돼서 몸살 난다든지(?). 반대로 재밌다고 생각한 드라마는 연출 세팅의 디테일까지 기억하도록 막 10번씩 돌려봐도 볼 때마다 재밌다든지.
심지어 그 무엇보다 '왜'가 중요해서 '왜'가 납득되면 말도 안 되게 쿨하게 넘어가지만 '왜'가 납득되지 않으면 납득할 때까지 괴로워하거나 집착한다든지.(보통 둘 다 좀 이상하긴 했다.)
그럴 생각은 1도 없는데 지각을 자주 한다든지(말도 안 되는 시간감각..)
역시 그럴 생각은 1도 없고 정말 정리하고 싶은데 정리를 더럽게 못한다든지.(시도할 때 생각했던 것과 결론이 너무 다르다.)
당연히 산만하고 집중을 잘 못해서 덤벙대거나 말이 듬성듬성 기억난다든지.(인데 또 놀라우리만큼 전체 맥락은 잘 구성한다.)
청각이 매우 예민하다든지(해서 멀티를 못한다. 특히 어려서부터 공부할 때 절대 음악 듣기는 불가... 특히 가사가 있는 음악은 아무 생각을 안 해도 될 때 들을 수 있다.)
무엇을 하다가도 관심이 생기는 게 있으면 그걸 당장 꼭 해야만 한다든지.
그래서 생각이 예상 못하는 데로 튄다든지(그런데 고지능과 맥락구성력 덕분인지 그게 여태 엄청난 창의력인 줄 알았다. 결과가 그랬으니까.)
이렇게 그냥 '나'를 구성해 왔던, 숨 쉬듯 '나'의 특성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고지능 ADHD의 전형적인 특성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은 매우 기분이 오묘했는데, 동시에 어릴 때부터 나에게는 자연스럽고 당연했지만 남들은 이상하게 생각했거나 오해했던 것들에 대해서, 그렇기 때문에 받아왔던 갖은 오해와 그로부터 비롯된 자괴감과 그것을 벗어나며 갈매나무를 바라보기로 한 마음과 같은 외로움 같은 것들이 비로소 퍼즐 하나를 맞추듯이 하나의 세계로 통합되며 이해가 되는 듯했다. 그간은 그냥 산만해서, 게을러서, 의지가 없어서, 상대를 우습게 생각해서(?), 비염 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져서(??), ENFP라서, 쌉P라서(?!?!?) 같은 다양한 단편적인 이유와 오해들로 점철되어 닿을 수 없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자괴감처럼 느껴지던 것들이 이해되면서, 어린 시절 도치가 애잔해졌다. 네가 참 고생이 많았구나... 요즘이라면 얼른 발견해서 치료도 받았을 수 있었을 텐데, 그저 자기가 잘못했으리라 생각했던 어린 도치. 세상의 많은 것들이 이름을 갖게 되고 드러나게 되는 일은, 어쩌면 무언가를 틀 안에 규정해 버리는 면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뭉뚱그려져 있던 오해들을 명확히 분리해 내서 무언가를 구원하기도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히 진단을 받고 치료까지 받지 않고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교권침해 건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을 때, 문득 생각이 나서 이 김에 ADHD 검사를 받아볼까 했더니 의사 선생님이 진단명 하나 늘려서 뭐 하시게요..?라고 하셨기 때문이고(사실 의도는 잘 모르겠다.)
두 번째는 근데 이게 꼭 나쁜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질병인지 알기 전에는 잘만 살았어~ 같은 낡은 말을 하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사실 이게 ADHD일까를 생각하기 전까지는 좀 괴로울 때도 있었지만 이게 그냥 나라고 생각을 하고 살았고, 나는 제법 꽤 괜찮고 멋있는 점도 많은데 이게 꼭 나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고지능'ADHD라서 일까. 딱히 막 사고를 치고 다닌 것도 아니고, 크게 남에게 해를 끼치고 산 거 같지는 않다. 내가 손해를 본 것들은 있을 거 같고, 원인을 몰랐던 나의 다소 특이해 보였던 점들의 원인을 알게 되었고 그간 쉽지 않았던 일들의 일부 원인을 찾은 것 같지만, 원래 모든 일은 양면적이라 그런 면이 가져다준 나만의 특별함이 또 있기도 하다. 해서, 좀 더 생각해 봤을 때 지금의 나를 일부 지불하고서라도 반드시 고쳐야 할 무언가가 있더라면 마음먹고 고쳐볼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그냥 지금의 이런 내가 좋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좋은 점은, 내가 그렇기 때문에 역시 그런 아이들의 독특하고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들이나 오해받기 쉬운 행동들을 어느 정도는 더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보통의 ADHD들은 보통 사람들의 기준에서 자주 벗어나기 때문에 눈에 튀고 의도치 않게 눈밖에 나기도 쉽다. 나도 그랬다. 다만 크게 티가 안 났을 뿐이다. 스레드에서였나? ADHD 대해 쓴 글 중에 가장 직관적으로 공감 갔던 글은 "ADHD는 마치 다리가 부러진 것과 같아서 보통은 절뚝거리며 걸어오면 상대가 아, 다리가 불편하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데, 와중에 고지능 ADHD는 다리가 부러졌음에도 불구하고 남들보다 빨리 뛰고 있기 때문에 남들은 아무도 그가 다리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티는 덜 나고, 더 이해받기 어려우며, 더 태만하고 게을러 보이거나 일부러 그러는 거 같아 보인다."였다. 아까부터 '고지능'이 의심스러우셨던 분들이 계신다면(ㅋㅋ) 바로 이 부분에서 나를 고지능이라고 칭한 것이니 오해 마시기 바란다.
어쨌든, 의도치 않게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이해의 폭이 넓어진 덕분에 우리 반 진성 ADHD학생과도 생각보다 마음을 열고 소통할 수 있게 되었는데, 2년 전에 옆반 학생이었던 그 아이는 생각보다 이해받지 못할 행동들을 했고, 역시나 이해받지 못하는 거 같았다.
올해도 절친한 친구와 같이 우리 반이 되었는데, 그 친구가 나에게 "쌤, 포기하세요. 1, 2학년 담임쌤들이 쟤를 어떻게 포기했는지 알려드릴까요?" 해서(셋이 있는 자리였다. 오해 ㄴㄴ) 당연하고 무심하게 "아니 알고 싶지 않아, 난 포기 안 할 거니까." 했던 게 3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 나는 알고 있기도 했고. 물론 당연히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3월부터 ADHD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서, 그 아이에게 "내가 너를 보면 딱 나 같아서 하는 말인데..!"라고 말했는데 너무 진심이었다. 정말 그랬으니까. 아이는 이동 수업 시간에 잠을 자다가 다음 시간을 못 들어가기도 했다. 멋쩍게 걸어오는 그 아이에게 "왜 자다가 수업을 못 들어갔어?" 했는데, 그 애가 머쓱하고 익숙한 듯이 "그냥요." 했다가 그날 나에게 아주 개털린 일이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 부정적인 행동들이나, 룰을 어기는 행동들을 일부러 하는 것은 아닌 것을 알아서 잘하라고 하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면 웬만하면 조금이라도 인정해 주곤 했기 때문에 '그냥'이라는 말이 "저는 원래 이런 사람인데요?"라는 말 같아서 크게 혼을 냈다. 마음대로 안 되는 걸 당장 바꿀 수 없지만 '노력'이라도 하라고. 아이는 성격도 좋고 넉살도 좋고 머리도 좋은 아이라 '노력'하는 모습은 꾸준히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마저도 꾸준히 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 애가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나는 안다. 노력하는 만큼 막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확실한 건 아이의 표정은 많이 밝아졌고 태도 또한 많이 편안해졌다.(라고 그 아이를 아는 선생님들이 놀라서 말씀해 주셨다.) 나와도 제법 공감대를 나누고, 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면서 많은 가능성을 보여주어서 나도 조금은 걱정을 덜었다.
그렇게 1년을 보내다가 수능이 임박하니 얘가 수능에 늦어서 못 들어갈까 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건 순환논증의 오류에 갇히게 되는데, "수능 날은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한다면 평소에는 학교를 우습게 봤다는 말밖에는 안 되고, 그래서 정말 의지로 안 되는 일이라면 수능날이나 논술 시험 날도 보장할 수가 없다. 그래서 진지하게 논술 시험 다 마치는 날까지는 어떤 변명도 필요 없이 일찍 등교하기로 했다. 물론 끗발이 자꾸 떨어지고 있지만, 그때마다 멱살이라도 잡아 올려서 수능 날은 꼭 늦지 않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아이도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이 또 보여 짠하다.
그런 아이가 어제, 학교에 작은 행사가 있어서 하던 사람들은 마저 좀 더 하고, 15시 10분에 가야 하는 사람들은 소리 없는 종례 하기로 이야기했고, 이 아이는 병원에 가야 하는 일이 있어 본인이 하던 일은 14시 40분에 접고 기다리가 15시 10분에 나가면 된다고 말했는데, 그걸 또 띄엄띄엄 듣고 14시 40분에 학교를 나가버린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럴 애가 아닌데 갑자기 사라져서 심장이 쿵 내려앉았는데, 너무 놀라 전화를 했더니 태연하게 받았다. 다행스럽긴 한데, 복잡한 감정으로 심장이 막 뛰었다. 너 지금 무슨 짓이냐고 당장 학교로 오라고 화를 냈다. 당황하며 얼른 돌아오겠다고 했다. 사실 돌아오면 다시 가야 할 시간이지만, 이 부분은 짚어야 했다. 아이는 얼른 돌아오겠다고 했다.
아이가 돌아오는 동안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잠시 생각했다. 처음에는 좀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이었는데, 문득 얘가 그러고 싶어 그런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렇다고 이게 잘못하지 않은 일은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하지만 정말로 잘못 이해했고, 그렇기 때문에 고민하거나 꾀부릴 생각 없이 바로 돌아오겠다고 하는 아이, 돌아오며 마음 급할 아이를 생각하니 또 마음이 짜르르했다.
아이는 날도 쌀쌀한데 땀을 훔치며 돌아왔다. 나는 이래서 이 아이를 좋아한다. 비록 말을 제멋대로 듣기는 했지만, 잘못을 인지한 순간 꾀부리고 빠져나갈 생각을 하기보다는 좋지 못한 소리를 들을 줄을 알면서도 제깍 돌아왔다. 조용한 곳으로 아이를 데리고 갔다. 아이는 같은 일은 아니지만 이런 종류의 일이 제법 잦았다. 그렇다고 해서 좋지 않은 말을 듣는 게 좋은 일은 아니라서 아이의 표정이 무거웠다. 학년 초에 아이는 잘못하고 오해받고 혼나는 일이 익숙해서 내게도 일단 변명이 길었는데, 이제는 내가 무엇을 보고 왜, 어떤 지점을 지적하는 줄을 알기 때문에 나에게는 주절주절 변명도 하지 않는다. 그 부분은 적어도 자신이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 변명해야 할 오해를 한 겹 벗어두고 잘못한 점만 직면하면 된다는 점을 체득한 아이의 현명함이자 믿음일지도 모른다. 와중에 익숙하게 죄송한 표정이 마음 아팠다.
내가 언제 14시 40분에 나가도 된다고 했냐며, 왜 말을 듣고 싶은 대로 듣냐고 타박을 한 후, 나는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바로 안 바뀌어. 평생을 노력하며 살아야 해. 내 의도는 일부러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일은 잘못되고, 타인은 오해를 해. 그러면 너무 힘들고, 그게 쌓이면 너를 잡아먹고, 그래서 너도 힘들잖아. 그치? 그러니까 나는 원래 이렇다고 생각하고 자꾸만 자포자기하면서 뒷걸음질 치지 말고. 딱 직면해. 그리고 노력해. 너는 잘못한 걸 안 순간 돌아와서 직면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이제 그보다 한 턴 앞에서 직면하고 노력하자. 이거 인생 난이도 높아지는 일인 거 내가 알아서 그래."
부정할 수 없는 나의 이야기지만, 담임교사로서 학급 아이에게 꺼내는 게 마냥 쉬운 일은 아닌 나의 약점이라면 약점이라서 좀 더 진심으로 꺼내면서 목이 조금 메었다. 아이의 눈 밑이 촉촉하니 젖어들더니 눈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펑펑 울지도 않고, 조용하게. 그러나 좀 서러운 표정으로.
그렇게 나도 눈물을 좀 쏟고, 아이도 좀 울었다. 그리고 병원에 가던 아이를 다시 보냈다. 아이는 내일 당장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을 나도 안다. 그리고 아마 아이가 내 진심을 다 알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조금은 이해를 받았던 기억이, 자신이 의도치 않게 했던 많은 일들이나 고치기 어려웠던 일들에 가려진 채 낙인찍히거나 미움받으며 스스로도 본인은 그런 사람이라고 믿었던 날들에서 조금은 벗어나, 노력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아주고자 했던 이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사실 본인은 오해로 점철된 그 껍데기 안에 든 괜찮은 모습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발견할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내 기질도 제법 쓸모가 있다. 내가 이런 모서리에 있지 않았더라면 모서리의 존재를 몰랐을 것이다. 모서리에 서있기 때문에 위태로움과 불안함을 이해하고, 좀 더 넓게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난 참 아주 전형적인 선생님처럼 근엄하고 점잖고 차분한 사람은 못 되지만, 그런 내가 선생이 되어서 좀 다행인 것도 같다는 생각. 나의 기질 또한, 다 의미가 있었다는 그런 생각.
아마 당신의 어떤 면들도, 다 의미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