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사슴들의 이야기" 서평
세상은 날 천대하는데, 난 세상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냥 돌아보지 않으면 될 것을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곳에 늘 무언가를 두고 온 느낌이 날 힘들게 했다.
작은 사슴들의 이야기 중에서
수원에 살면서... 그래도 남쪽 여행을 꽤 했는데... 완도, 보성, 여수, 순천, 남해, 사천, 통영, 부산... 길게 머물지는 않았지만 여름휴가로 혹은 방학을 이용해서 방문했던 곳이다. 소록도는 남쪽 어디 즈음에 있는 것일까? 궁금해서 네이버 지도에서 검색해봤다.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 소록도의 주소이다.
수원에 살면서 남도 쪽을 방문하기가 쉽지 않아서(물리적 거리가 있다 보니...) 한번 갈 때 큰 맘먹고 가게 되는데... 어째서 소록도는 그간 방문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간 여행했던 남쪽 지역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지도상의 위치를 확인하고 나니, 한번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 학부모님이셨고, 같은 나이의 아들을 키우는 동병상련(?)을 함께 겪는 엄마이기도 하고, 그리고 내가 꿈꿔온 작가의 삶을 의연하게 살아내는 박지연 작가님의 책을 선물 받았다. 소록도 이야기를 쓰신다던데? 학교 도서관 선생님이 지나가듯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곧바로 연락드렸더니, 이 책을 직접 가져다주셨다. 한 손에 가볍게 들리는 handy 한 size의 책이다. 이 작은 책에, 얼마나 묵직한 사연들이 담겨있을까... 어떤 무게의 이야기들일까... 집에 오자마자 단숨에 읽어버렸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책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자연스럽게 그 과정들을 떠올려 보게 되었다. 책에 실린 인물들은 한센병에 걸려 소록도에서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일부일 뿐일 텐데...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한센인들이 직접 겪은 모진 세월들 중에 가까스로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기억의 한 조각일 텐데... 실제 인터뷰 과정은 어땠을까? 오래전 겪었던 일이라도 해도 쉽게 아물 수도 없고, 누군가가 보듬을 수도 없는 성난 상처일 텐데... 말하는 사람만큼이나 듣는 사람에게도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이 책은 한센병을 앓게 되면서 가족과 떨어져 소록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담았다. 부잣집 막내딸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지만 한센병에 걸린 이후, 자신의 병으로 가족들이 비난당하고 손가락질당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견디기 어려워 소록도로 들어온 장인심 할머니... 한센병으로 세상과 등지고, 소록도로 들어왔는데... 한센병에 걸린 게 내 잘못도 아닌데 자신을 더럽다고 비난하는 사람들... 나를 천대하는 세상을 속 시원하게 끊어낼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럼 비난의 고통과 상처도 덜할 텐데... 마주 보고 서면 온통 날이선 눈빛들 뿐인데도... 장인심 할머니는 "세상에 무언가를 두고 온 느낌이 날 힘들게 한다"라고 했다.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숨을 쉬고 살아가고 있다면 마음먹는다고 해서 나를 둘러싼 세상을 쉽게 끊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같은 하늘 아래 숨을 쉬고, 같은 땅을 밟으며 살고 있는데... 어떻게든 나란 존재는 세상과 연결이 되어 있는데... 비난받는다고 해서 쉽게 끊어낼 수 있었을까? 그래서 소록도에서 만난 하나님은 장인심 할머니에게 삶의 큰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만난 하나님은 특별했다.
세상이 우릴 버릴 때 유일하게 사랑한다고 먼저 다가오신 분이 그분이셨다.
작은 사슴들의 이야기 중에서...
두 번째 사람은 소록도 브라스 밴드 트럼펫 연주자인 김진원 씨이다. 역시 한센병에 걸려 엄마와 누이동생을 떠나 소록도로 오게 되었다. 땅덩어리 작은 나라에서 간척사업은 숙명인가 보다. 몸도 성치 않은 한센병자들이 간척사업에 동원되어 죽고 다치게 되었다. 병든 몸으로 사는 것이 가족과 형제에게 큰 죄를 지은 것 같아, 어떻게든 소록도에서 잘 살아남아야겠는데... 간척사업으로 바다를 메꿔 땅이 생기면 한센인에게 주겠노라고... 한센인들의 약한 마음을 노략질하며 강제 노역에 동원시키다가 사고가 난 것이다. 변변한 장비도 없고, 기술도 없이... 몸으로만 때워야 하는 위험하고 힘든 일이었다. 사고가 나서 죽어도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을 누가 거들떠보기라도 할까 싶은 인간의 악한 마음이 한센인들의 불행의 시작이었을까... 트럼펫을 연주하고 싶었지만 손이 무뎌 마음으로만 악기를 동경했던 친구를 위해 나무 트럼펫 목걸이를 만들어 걸어주었는데... 채석장이 붕괴되는 사고의 현장에서 친구를 잃었다. 사고가 났고 사람이 죽었고, 간척사업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한센병은 유전병이 아닌 나병균에 의해 전염되어 나타나는 감염병인데... 한센병에 걸린 환자가 아이를 낳으면 유전이 된다고 믿었던 무지함이 한센병을 앓는 이들을 또 다른 고통을 주었다. 책 속 박 권사님은 첫째 아이를 강제적으로 낙태했다. 부부가 아이를 가졌는데 그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엄마가 한센인이라는 이유로 강제로 뱃속의 태아를 낙태시켰다. "차가운 가위가 아기집을 휘저을 때 살겠다고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도망 다니던 태동이 난 잊히지가 않아..."
첫 아이를 갖고 이미 아이를 낳은 선배 엄마들이 말하는 태동을 언제 즘 경험할 수 있을까... 꽤나 궁금했다. 초산부는 20주 정도 되어야 느껴진다는데... 나는 16주 정도 되니... 뱃속 아기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성별 검사 전(미국에서는 그 당시 불법이 아니었다) "가을아, 아빠야." 하면 뱃속이 꿀럭... 마치 아빠 손을 걷어차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의 태동..."여보, 아들인가 봐. 아빠를 경계하는 것 같지 않아? 내가 부를 때는 이런 태동 아닌데..." "그런가? 아들인가? 내가 아빠라서 질투하는 건가? 크하하하하하하" 이런 말도 안 되는 추측을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아기를 기다리던 그때 참 행복했다. 죽을 것 같은 입덧(6-7개월까지 화장실 변기를 끌어안고 살았던 1인... ㅠㅠ 아기를 낳는 것보다 입덧이 더 두렵다 ㅠㅠ)도 곧 만날 아기를 생각하면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기곤 했다. 그런데 한센인 부부에게 임신은 결혼 후 가장 설레고 기대되는 순간이 아닌... 절망과 한탄의 순간이 되었다. 책 속 박 권사님은 첫째 아이를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고, 다시 둘째를 임신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아이를 낳았다. 비록 그 아이를 직접 키울 수 없어 할머니에게로 보냈지만, 박 권사님 부부가 둘째 아이를 만난 순간은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써져있다. 한센인들이 낙태에서 해방된 건 불과 17년 전인 2002년이라고 한다. 세상에나... 월드컵이 한창이던 그때... 그때까지 한센인들은 강제 낙태를 종용받았다니...
이 책은 한센인들의 아픈 삶을 따뜻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한센인들을 향한 작가의 마음과 시선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마지막 장기진 할아버지 이야기는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1916년 일제 식민지 시절, 조선 총독부가 소록도 자혜병원으로 정식으로 개원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한센병 환자를 강제 분리·수용하기 위한 수용 시설로 사용되면서 소록도의 아픈 역사가 시작되었다. 장기진 할아버지는 일제시대, 소록도에 가면 3년 안에 한센병을 고칠 수 있다는 일본 순사의 거짓말에 속아서 소록도로 들어오게 되었다. 인간의 죄성은... 힘이 없고 약한 사람에게 왜 광적으로 폭발하는 것일까... 장기진 할아버지가 겪은 일이 정말 한센인들의 삶이었던 것일까? 따뜻한 문체로, 담담하게 쓰인 행간에서도 장기진 할아버지가 겪었던 책 속의 사건을 잠시 떠올리면 어느새 소름이 끼치고 몸서리가 쳐졌다. 그저 생각만으로도 이런데...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들을, 모진 세월을 살아내셨을까... 무뎌진 손으로 산을 파는 강제노역은 기본이고,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아 힘든 노동에 쓰러지면 게으름을 피운다고 구타를 당해야 했다.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일을 해도, 일본 관리자 눈밖에 나면 감금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해야 했고, 그 악랄함이 얼마나 극에 달했던지... 장기진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던 다른 한센인이 일본 감독 관리자를 칼로 찔러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이후 일본인들의 무력 행사는 날로 심해졌고 장기진 할아버지도 감금실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고, 고문 끝에 죽어간 동료들 사이에서 장기진 할아버지는 살아남았다.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이 되었고 소록도도 일본의 탄압에서 벗어나는 것 같았는데... 소록도 자치회를 만들겠다고 한 날, 자치회 대표로 뽑혔던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이 아닌 한국 사람들에 의해 구덩이에 밀려 떨어져 불태워 죽임을 당했다. 불태워지고, 길거리에서 매를 맞고 죽은 사람이 84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책 속에서 장기진 할아버지는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자살했을 거라고... 예수님 때문에 살아갈 힘이 있었다고 하셨다.
책을 손에 든 순간부터...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가슴이 무거울 줄이야... 이들의 억울하고 처절했던 삶을... 누가 위로할 수 있을까... 누가 보듬을 수 있을까... 이 분들이야 말로 살이 찢기고 온몸의 피를 쏟아냈던 예수님의 고통을 가장 잘 이해했던 사람들이 아닐까... 차라리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은 고통 때문에 이 분들에게 예수님이 절실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절실했던 이 분들의 삶이 너무 안타까워, 마음이 저리고 씀벅인다.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도 힘들다도 말하는 내 안일함이 부끄러워 말을 이을 수가 없다.
다음 휴가는... 소록도다. 한센인들의 고통의 흔적을 눈에 담고 마음에 새겨야겠다. 우리 아이들과 함께 가서 그 아픔의 시간을 함께 나눠야겠다. 그저 가보는 것으로 한센인들이 지나왔던 처절한 고통의 시간을 백만분의 일도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같은 하늘 아래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겪었던 이들이 있었는데... 한센인들의 고통을 알지 못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내 죄책감을 덜어내는 요식행위라 해도... 어쨌든 가봐야겠다. 이들의 아픔과 고통이 잊히지 않도록, 각인하고...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도 이들의 아픔을 마음에 담아낼 수 있도록, 그래서 힘이 없고 연약한 이들이 고통받는 현실을 직시하고 연약한 이웃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질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가르쳐야겠다. 우리 인생의 씨름은 예수님처럼 연약한 이들과 함께 살아내는 과정이기에...
선영이 어머니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책무를 다시금 점검합니다. 우리의 삶의 무게가, 내 가족의 울타리에만 쏠리지 않도록, 마음의 균형을 되찾을 수 있도록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선한 양심으로 뭇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움직이게 하는 글로 더 세상을 반짝이게 하는 작가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