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 그래서 욕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
오늘, 우리가 살아 숨 쉬고 활동하고 있는 현재의 그 어느 순간, 바로 지금.
* 등장인물
기동찬 연출가
황홀석 극작가
나바보 배우 1
기가찬 배우 2
한할례 여배우 1
박지예 여배우 2
나강패 무대감독
* 무대
무대는 배우 1이 운영하는 소극장 무대와 연극 연습실을 주로 보여주고 있으나 극의 내용에 따라 지하철역, 사무실, 술집 등으로 변화가 용이한 열린 무대.
* 극중 시간흐름
연극 <모독2> 공연 준비부터 연습, 그리고 마침내 막이 오르기까지의 내용이 전개되지만, 시간의 흐름은 때론 순행되고 때론 역행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시간대가 혼재되어 있다.
어둠 속에 잔잔한 음악이 흐르면서 배우들이 대사를 토해내기 시작한다. 사이. 조명 들어오면 배우들이 네 개의 의자에 앉아 연극 <모독2>를 공연하고 있다.
배우 2
(마치 공연이 오래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대사를 시작한다.)
그러면 무한히 멀었던 여러분과 우리 사이의 간격이 조금 좁아집니다. (모독이란 단어에 필요 이상의 힘을 주어 발음한다) 모독을 받아 몸이 빳빳하게 굳어지는 여러분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들을 모독하는 게 아니고, 여러분들이 말하는 모독적 언사를 사용할 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당황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리 경고를 받았으니까, 모독을 받아도 감당할 수가 있을 겁니다. 너, 라는 말 자체가 이미 모독적인 거고 보면, 우린 서로 너니 나니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아주 트자.
배우 2가 말을 이어나가는 사이, 배우 1 슬며시 퇴장한다.
여배우 2
(갑자기 소리를 빽 지른다.) 야 이 씹새끼들아. 그러니까 우리들이 욕하려는 주체는 바로 너희들이란 거다. 너희들 뻔뻔스러운 낯짝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지만 그건 잠시 미루기로 하고, 우선 너희들이 욕을 먹어야 하는 까닭과 우리가 하려는 욕설의 변증법적 고찰을 먼저 시작하겠다.
여배우 1
(사회자가 된다.) 국제욕설협회, 영어로 I, M, C (영어식 발음으로 잔뜩 혀를 굴리며) 인터내셔널 모독 센터 회장으로 재직 중이시며 국제욕잘하기협의회 이사장, 유엔욕설분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신 조질래 욕문학 박사님을 모시고 욕과 사회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야유와 욕설로 조질래 욕문학 박사님을 환영해주시기 바랍니다.
배우들 모두 기립한다. 야유와 욕설을 보낸다. 배우 1 박사 가운을 걸치고 차트 몇 장을 들고 등장한다.
배우 1
씨비새끼리, 조비새끼리, 바비새끼리. (매우 특유한 억양으로 욕설 비슷한 인사를 한다.)
여배우 1
박사님 좀 전에 매우 독특한 인사를 해주셨는데, 그게 어느 나라 인사말입니까?
배우 1
씨비새끼리~ 이 말은 우리 욕설학회에서 제정한 새로운 욕 인사로써 세계 공동으로 채택하고 있는 인사말입니다. 밤새 안녕하십니까, 란 뜻이고 조비새끼리, 는 날씨도 추운데 몸조심하십시오, 바비새끼리, 는 밥 먹었어요, 란 뜻입니다.
여배우 1
그럼 본격적인 강연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조질래 박사님의 화려한 경력과 세계적인 활동사항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리포터를 부른다.) 공돌이 리포터.
배우 2
네 화끈한 리포터, 물불 안 가리는 리포터, 공돌이입니다. 조질래 박사님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일찍이 서울시 달동네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욕을 밥 먹듯 얻어먹고 살았으며, 나이가 들면서는 뒷골목 생활에 빠져들어 국내 욕계의 촉망받는 양아치로 성장하였으며, 약관 18세의 나이로 뜻한바 있어 미국 양키 유니버씨티 씨빌라이제이션학과에 유학, 세계 욕 학계의 거두들 아래서 욕문학 수업을 받았으며, 이후 모스코바에서 개최된 씨발라이프시키 욕 콩쿠르에 나가 영예의 황금아가리상을 획득, 세계 욕계에 화려하게 데뷔했었습니다. 그렇게 세계 욕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중 촛불혁명으로 민주정권을 자임하는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쌓이고 쌓였던 욕계의 적폐청산이 진행되면서 국내 욕 시장 경기가 싸늘하게 얼어붙게 되자 급거 귀국, 화려했던 욕산업 전성기를 되찾기 위해 온몸을 바쳐 정욕적으로 활동욕을 발휘하고 계십니다. 이상 욕쌈삘딩 십팔층 한국욕잘하기협회 사무실에서 욕 잘하는 리포터 공돌이였습니다.
힘찬 박수소리. 녹음을 통해 들려온다.
배우 1
(박수소리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옛말에 욕은 하나의 언어적 유희이며 언어의 삼촌이며 언어의 약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양약은 고구이나 이어병이요, 쌍욕은 고이이나 이어행이라, 라는 말도 있습니다. 잘 키운 방위 하나 열 현역 안 부럽다. 그렇습니다. 잘 써먹은 욕 한마디 나라 경제 확 살린다, 인 것입니다.
여배우 1
양약은 고구이나 이어병이요, 쌍욕은 고이이나 이어행,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을 낫게 하는데 직방이고 쌍욕은 귀에 거슬리지만 바른 행동을 하게 한다. 뭐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잘 키운 방위나 나라 경제 얘기는 좀 오버 아닐까요?
배우 1
무슨 개소리를? 터진 아가리라고 아무렇게나 씨부렁대면 다 말인 줄 아시오?
여배우 1
(발끈한다.) 아니 개소리라뇨? 박사님이야 말로 아가리 한 번 찢어져 봐야 그 째진 아가리 닥치겠어요? 이래 뵈도 나 서울대 나온 사람이에요. 정의니 나발이니 보다 자기 이익부터 챙기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명문대학, 서, 울, 대! (눈치 보다가) 아니 연세대, 아니 고대, 한양대, 경희대, 서울예술대학, 그냥 전문대. (목소리 점차 작아지다가 갑자기 큰소리로) 그래 나 고졸이다. 그래서 뭐?
배우 1
본래 지성이라는 게 방구랑 같아서 몰래 뀌어도 냄새가 나기 마련인 것을. 척 보면 앱니다, 인데 무슨 고학력 코스프레야. 그냥 닥치고 잘 들어보세요. 욕은 남을 흠집 내고 욕보이는 말을 가리키는 국문학용어. 한민족대백과사전.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닙니다. 욕은 훨씬 심오하고 심층적이며 심리적인 겁니다. 최순실 특검 조사 받을 때 순실이가 그랬죠. 지금 특검은 민주특검이 아닙니다, 저희 가족까지 몰살하려는 사악한 놈들입니다, 이때 환경미화원 아주머니가 한마디 하셨죠? 염병하네. 얼마나 속 시원하니까? 직업적, 생활적, 경제적으로 약자처럼 보인다고 무시하면 잘대 안 됩니다. 오늘의 훌륭한 대한민국, 다 그런 분들이 만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 방위도 잘 키우면 현역보다 나을 수도 있고 제대로 욕을 구사하면 나라 경제가 확 필 수도 있는 겁니다.
여배우 1
하지만 이제 방위 없어졌잖아요? 뭐라더라? 공익요원?
배우 1
그러니까 내말이. 잘 키운 공익 하나 나라 경제 꽃 피운다. 자자 시간 없으니까 아무튼 잘 들어보세요. 일찍이 미국의 대통령 케네딘가 머시깽이가 말했습니다. 조국이 내게 욕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조국을 위해 해줄 욕을 먼저 생각해라. 이런 속담도 있습니다. 욕 한대로 거두리라, 가는 욕이 강해야 오는 욕도 좆같다, 개처럼 욕하고 정승처럼 욕먹는다. 뭐 이렇게 욕은 상호 커뮤니케이션 통로로써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욕. 영어로는 요옥~ 이 아니고 어뷰즈 랭귀지, 또는 슬랭, 얄링, 좆따라 마이싱. 불어로는 죠까망, 독어로는 죠또비히, 러시아어로는 죠진스키. 또 일본어로는 죠또가네, 빠가야로, 칙쇼 등등. 자 그럼 이제 서설은 그만 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재빨리 덧붙인다.) 아니 그 전에 먼저 준비한 차트를 보여 주시죠.
배우 1 차트를 꺼내자 배우 2 재빨리 달려와 손으로 받아 든다. 차트에는 ‘한국인이 즐겨 쓰는 욕설 베스트 파이브’라고 쓰여 있다.
배우 1
(차트 제목을 읽는다.) 한국인이 즐겨 쓰는 욕설 베스트 파이브. 우선 5위부터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차트 위 5번 테이프를 벗긴다. 썩을 년, 18, 이라고 적혀있다.) 썩을 년. 네 한국인이 즐겨 쓰는 욕설 베스트 파이브 5위입니다. 모두 십팔분이 선택해 주셨네요. 썩을 년. 네 아주 좋은 욕이죠. 주로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하는 욕으로 알고 있지만 여성끼리도 자주 쓰는 매우 친숙하고 서민적인 사랑스러운 욕입니다. 여자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거나 바람이 났다거나, 한심하게 외제 빤스만 골라서 사 입는다거나 할 때, 썩을 년, 이렇게 욕들을 하곤 하죠.
여배우 2
(조용히 앉아 있다가 갑자기 질문한다.) 박사님, 그런데 여자가 고무신 거꾸로 신었는데 왜 욕을 해요? 그럼 운동화 거꾸로 신으면 얻어맞겠네요?
배우 1
네, 그렇습니다. 이렇게 황당한 질문을 하는 년들한테 썩을 년, 하고 써먹으면 됩니다. 다음은 4위를 살펴보겠습니다. (테이프를 벗긴다. 개새끼, 28, 이라고 적혀있다.) 개새끼. 네 아주 훌륭한 명욕입니다. 욕계의 삼대성인이라 불리는 중국의 고자, 견자, 욕하자 세분께서 이 욕을 개발하신 이래 불후의 욕설이 되어 수천년간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아주 대중적인 욕입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세계 인구의 75%가 사용하고 있는 욕설의 스테디셀러입니다. 우리말로 개새끼, 영어로 썬 오브 비치, 중국어로 꼉쨔, 일본어로 가이꼬, 불어로는 걔뮹, 이태리어로는 특이하게 멍딸리나라고 불리는 개새끼.
여배우 2
(조용히 입으로만 따라 한다.) 썬 오브 비치, 꼉쨔, 가이꼬, 걔뮹, 멍딸리나!
배우 1
(흐느끼는 척한다.) 너무 아름다운 이 욕설을 들을 때마다 저는 짙은 감동을 느낍니다. 자 다같이 한번 외쳐봅시다. 개새끼. (사이) 한 번 더, 개새끼. (사이) 목소리가 작다. 다시, 개새끼. (사이) 다음은 3위를 볼까요? (테이프 벗긴다. 개 같은 년, 38, 이라고 적혀있다.) 개 같은 년. 썩을 년, 개새끼 보다 한 단계 강도 높은 좋은 욕이죠. (갑자기 관객을 향해) 이런 개 같은 년이. (잠시 노려본다. 사이) 그렇습니다. 이런 욕을 들으면 당장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발랑발랑 뛰면서 기분이 아주 좆같아집니다. 그런데, 이분은 말짱하시네요. 자의식이 대단하신데요. 이런 관객 같은 분을 우리 욕설학회에선, 미친 년, 이라고 합니다. 삼십팔분이 개 같은 년을 찍었네요. 그럼 2위는 뭘까요? (테이프 벗긴다. 니미 뽕, 98, 이라고 적혀있다.) 니미 뽕! 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아주 훌륭한 욕입니다. 무려 구십팔분이나 선택했는데요.
여배우 1
박사님, 니미 뽕이 무슨 뜻이에요? 니기미는 알겠는데 니미 뽕은 모르겠는데요.
배우 1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니미는 니기미의 준말입니다. 니기미는 니네 엄마가 아주 복잡한 언어학적 단계들을 거치면서 변한 것입니다. 그리고 뽕은 뽕나무를 의미합니다. 해석하면 니네 엄마 뽕나무, 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게 어째서 욕이 되느냐고요? 옛날에는 한코장이니 한번줘파크니 하는 러브호텔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대개 눈 맞고 배 맞은 연놈들이 뽕나무 밭에서 그 짓을 많이 했어요. 니미 뽕은 그런 풍습에서 유래된 욕입니다. 즉 니네 엄마 뽕나무 밭에서 씹한다, 뭐 그런 의미로 만들어진 아주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욕입니다. 이와 비슷한 욕으로는 니기미 좆, 니미럴, 니미 씨팔 등등이 있습니다. 뭐 또 다른 질문 없습니까? (주위를 둘러본다) 없으면 대망의 1위를 살펴보겠습니다.
여배우 2
저 박사님, 니 좆 크네 역시 니미 뽕과 같은 종류의 욕인가요?
배우 1
그건 욕이 아니잖아요. 니 자지 크다는데 그게 왜 욕입니까, 칭찬이지. 날 두고 하는 소리 같네. 자 1위를 보겠습니다. (테이프를 벗긴다. 헐, 118, 이라고 적혀있다.) 헐! 네에, 모두 백 십팔분이 선택하신, 한국인이 가장 즐겨 쓰는 욕설 베스트 파이브 1위, 헐이 선정되었네요. (말을 이어 나가려는데 여배우 1이 말을 끊는다.)
여배우 1
에이 헐이 무슨 욕이라고. 그건 다소 황당한 상황을 맞았을 때 내뱉는 일종의 감탄사, 그냥 관용구 아닙니까? 바로 지금 같은 경우에 하는 말, 허얼!
배우 1
(이명박 성대모사) 허허, 헐이 욕이 아니라고요? 헐이 욕이라는 말 처음 들어보셨다고요? 게다가 1위라니 용납하실 수 없다고요? 다스는 누구 거냐고요? 헐, 그건 나한테 물어보면 안 되지.그거 미리 알았으면 쇠고랑 차고 깜빵 갔겠어요? 지금은 간신히 도망쳐 방구석에서 띵까띵까하고 있지만. (다시 조질래 박사 톤으로) 헐이 무슨 욕이냐고, 욕 치고는 강도가 약한 게 아니냐고,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본래 훌륭하고 좋은 욕은 점잖고 격조도 있는 법입니다. 후진 욕들이 괜히 강도가 세고 거칠고 경음화 된 것들이 많습니다. 이런 말 들어보셨지요? 빈 수레가 요란하다. 바로 그겁니다. 본래 세계 최고의 욕들은 얼핏 듣기에 품격 있는 것처럼 들리는 겁니다.
여배우 2
그런 헛소리는 처음 들어봅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배우 1
그런 게 여기 있습니다.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고 다른 손가락을 구부리는 손가락 욕을 보여준다.) 얼마나 품격 있습니까? 빡큐, 마더 팍, 선 오브 비치! 애써 발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조용히 보여주면 됩니다. 그래도 욕인 걸 다 압니다. 그걸 욕이라 하자고, 최고의 욕설이라 칭하자고 사회 구성원들이 묵시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미국 뒷골목 걷다가 무심코 이런 행동 보였다간 바로 총 맞는다고 합니다. 그런 만큼 조용하면서도 품격 있으면서도 치명적인 욕, 욕의 바이블이라 할 것입니다.그리고 여기에 비견할 만한 국내 최고의 욕, 바로 헐~입니다.
배우 2
그래도 좀 그런데요. 자꾸 들어도 욕 같지 않아서.
배우 1
진짜 허얼! 예를 들지요. 2016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본격적으로 밝혀질 당시 광화문에서 촛불문화제가 시작된 거 다 아시죠? 거기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이 뭔지 아세요? ‘헐! 이게 나라냐?’였습니다. 국정농단 사태를 피하기 위해 느닷없이 헌법 개정의지를 피력했을 때도 ‘헐!’하고 외쳤습니다. 이게 긍정의 목소리로 들립니까? 단순한 야유 같습니까? 불통의 시대에 종말을 고하고 소통의 시대를 열어젖히는 민중의 포효! 대한민국을 송두리째 바꿔버리겠다는 열망을 담은, 네 대한민국 최고의 욕이었습니다. 이렇게 욕은 때때로 시대정신을 선도하기도 합니다.
여배우 2
그러고 보니 지난 국회에서 소위 민식이법이라 명명된, 어린이보호구역 내 신호등과 과속단속카메라 설치 의무화 등 어린이 교통안전을 강화하는 내용의 법률안이 여야 합의로 법사위까지 통과해 본회의 의결만 남겨둔 상태에서 갑자기 야당서 필리버스터를 들고 나오면서 법률 통과가 좌절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헐! 그랬군요. (배우들 모두 큰 소리로) 허얼!
여배우 1
그럼 미국 대통령이 대한민국은 부자나라니까 방위비를 더 내라, 그것도 아무 근거도 제시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려 6배 가까이 많은 50억 달러를 내라, 이랬을 때 외친 헐! 도 같은 의미였군요. (배우들 모두 큰 소리로) 허얼!
배우 1
그렇습니다. 헐은 참으로 훌륭하고 대단한 욕입니다. 겉을 봐서는 쌍스럽지도 않습니다. 덕분에 한국인이 가장 즐겨 쓰는 욕설 베스트 파이브 1위에 선정되는 것은 물론 대한민국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9조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스스로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는 한 욕할 자유가 있다.
배우들
허얼!
배우 1
이렇게 세상 모든 욕에는 욕의 품격과 등수, 발생 배경과 역사, 그리고 철학이 있는 법입니다. 개똥에도 철학이 있다는데 하물며 인류 역사와 함께 해온 욕설의 경우에야 오죽 하겠습니까? 예를 들어 여자들에게 하는 욕도 종류가 다양하단 말입니다. 걸레 같은 년. 이런 년은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다주는 년이야. 씹할 년은 동네방네 다주면서 나한테만 안주는 년. 황당한 년, 이년은 주지도 않으면서 줬다고 소문내고 다니는 년. 또 우라질 년, 이년은 저기 남미대륙 브라질 옆에 우라질이라고 있는데 거기서 이민 온 년들에게만 쓰는 욕이에요. 아셨어요?
여배우 2
그럼 갈보 같은 년은 무슨 뜻이에요?
배우 1
갈보 같은 년. 그건 미국에서 건너온 욕인데 왜 알죠? 외국 여배우 중에 쫙 빠진 그레타 갈보라고?
배우 2
그레타 가르보 아닙니까?
배우 1
영화에서 한 양키 새끼가 물었습니다. 올라타 갈보? 그러자 그년이 이렇게 대답했지요. 그래 타 갈보. 이렇게 갈보 같은 년은 바로 그 여배우 그래 타 갈보한테서 유래된 겁니다. 그런데 그 욕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아무도 안 먹겠다는데 아무 놈 앞에서나 가랭이 쫙쫙 벌리는 년을 지칭하는 욕으로 전이된 겁니다. 웃기죠?
배우들
(서경석 이윤석 흉내를 내면서) 아니 그렇게 깊은 뜻이.
배우 1
(관객을 향해) 욕은 이렇게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따라 종류가 나뉘기도 하지만, 계절에 따라서도 종류가 다양합니다. 이를테면 봄에 하는 욕으로는 싸가지 없는 새끼, 또는 싸가지 없는 년이 있습니다. 봄에는 새싹이 나야하는데 그 싸가지가 없다는 것이니 아주 한심한 새끼란 말이겠죠. 여름에는 복날 개 패듯 팰 새끼, 가을엔 덜 떨어진 놈, 낙엽이고 열매고 모두 떨어지는데 혼자서 안 떨어지고 있으니 오죽 한심한 놈이겠어요. 그리고 겨울엔 이런 얼어 죽을… 등등. 다음은 우리 사회의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있는 지역주의에 근거한 욕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차트 준비.
이 때 객석에서 극작가가 갑자기 크게 소리친다.
극작가
나바보, 이 씹끼. 아가리 닥치지 못해.
무대와 객석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역시 객석에 앉아있던 연출가가 극작가를 말리는 척한다.
연출가
어니 황 작가. 앉아. 이따 공연 끝나고 말해도 되잖아?
극작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글쎄 더 이상 못 참겠다니까요.
배우 1
(잠시 사태 파악을 한 후 관객들에게 말한다.) 저 관객 여러분 오늘 관객분들 중에 몹시 과격한 분들이 몇 분 참석하신 모양입니다. 모독 공연에 어울리는 참 멋진 일이네요. 저분들도 멋지고요. 하지만 지금 중앙방송 진행 중이니까 잠시 지방방송은 까주셨으면.
극작가
(완전히 열 받은 목소리) 뭐라고? 야 나바보. 너 내가 내 작품 공연하지 말라고 경고했지? 그런데 작품료 한 푼 안내고 그냥 막을 올려? 그것도 니 맘대로 내 작품에 칼질해서 완전히 좆같이 만든 다음에. 씨팔 엿 같아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나바보, 당장 막 내리고 이리 나오지 못해?
객석 뒤쪽에서 무대감독이 등장한다.
무대감독
지금 누가 공연 중에 지랄 떠는 거야? 죽을래?
극작가
뭐라고? 지랄? 어떤 씹새끼야? (무대감독을 본다) 오라. 너 나바보 떨거지로구나. 이 깡패새끼가 어디서 좆지랄이야. 너 죽고 싶어?
무대감독
극작가면 다야? 작품 넘겼으면 그걸로 끝이지, 공연하는데 나타나서 지금 뭐하는 거냐고?
연출가
어이 무대감독, 좀 조용히 못해. 지금 당신이 낄 데가 아니잖아? 그리고 어이 나형. 나바보씨. 황 작가 지금 무진장 열받았나본데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막 내리지? 관객들 입장료는 모두 환불해주고.
배우 1
이런 씨팔 누군 땅 파먹고 장사하나? 그 얘긴 이따 공연 끝나고 하자니까. (사이. 관객들을 향해) 여러분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뜻하지 않은 불상사가 발생해 공연을 여기서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군자대로항이라고, 연극제작하면서 저런 떨거지들 하곤 아예 상종을 말아야 하는데…
극작가
뭐 떨거지? 씨발놈아 처음부터 작품 써달라고 한 게 누군데 이제 와서 오리발이야, 오리발이. 그리고 아무리 돌대가린 줄 알았지만, 이 빙신새끼야. 군자대로항이 아니고 군자대로행이야, 행. 뭘 좀 제대로 알고 써. 알았어?
배우 1
그게 언제 바뀌었나?
여배우 2
나 대표님. 오늘 공연 쫑이에요?
배우 1
나도 몰라. (퇴장한다)
배우들 고개를 저으며 모두 퇴장한다.
극작가
야 나바보. 이 치사한 놈 어딜 도망가. 남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려면 작품료를 내야할 거 아냐. 내 돈 떼먹고 잘 넘어갈 줄 알았어. 어림없는 소리 하덜덜덜 말어. 좆같은 새끼야.
연출가
황 작가. 그만해. 자 그만 나가자고. (관객들한테 자리 좀 비켜달라고 하며 극작가를 데리고 나간다)
극작가
(객석 사이를 빠져나가다가 갑자기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간다) 여러분 잠깐만요. 여러분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오늘 공연 완전히 망치게 되었네요. 하지만 전 진짜 억울합니다. 혹시 시간이 있으신 분은 제 억울한 사연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시간 없으신 분들은 그냥 나가세요. (조명 꺼진다) 야 불 안 켜? 여기 확 불질러 버린다. 조명실. 박기사. 너 진짜 죽을래? (조명 들어온다) 여러분 제 이야기 좀 들어보시고 저 좀 도와주십쇼.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연극이나 지나가는 해프닝이 아니고 실제 상황임을 분명히 알아주십쇼. 바로 한 달 전이었습니다. (초인종이 울린다.) 그날 대학로에서 서너차례 얼굴을 마주쳤던 중견연출가 기동찬 선배가 작업실로 절 찾아왔습니다. 프리랜스 작가인 저의 작업실, 바로 수유리에 있는 십팔평짜리 연립주택의 작은 방이었습니다. (퇴장했다가 연출가와 함께 등장)
극작가
기 선배님. 어떻게 저희 집엘 다 오시고… 진짜 뜻밖인데요.
연출가
황 작가 요즘 바빠?
극작가
바쁘긴요. 나가면 돈이니까 그냥 집구석에 처박혀 방콕하고 있는 것이지, 요즘 완전히 파리채 신셉니다.
연출가
파리채?
극작가
집구석에서 파리만 잡고 있다고요. (의자에 앉으며 연출가에도 의자를 권한다)
연출가
(앉으며) 아 난 또. 그럼 잘됐네. 나하고 술이나 한잔 하지. (들고 있던 양주병을 탁자위에 올려놓는다. 탁자 위에 있는 전화기를 보고) 집에 전화기가 있네? 아직도 이런 거 쓰는 사람이 있나?
극작가
뭐 핸드폰 비용 좀 아끼려고. 하하. 그런 대낮부터 술은 무슨… (하지만 반가운 낯빛이다)
연출가
술꾼이 밤낮이 어디 있나. 잔이나 가져오지.
극작가
(잠시 퇴장했다가 잔과 얼음을 들고 등장) 하여튼 기 선배님 술에 대한 열정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연출가
(잔에 술을 따른다) 술뿐이야? 연극은 아니고?
극작가
연극이야 선배님 밥줄인데 열정 없다고 그거 놓치시겠어요. 죽으나 사나 일단 고우부터 하고 보는 거죠. 그런데 대낮부터 술 마시자고 예까지 찾아오실 리는 없고…?
연출가
우리 그런 술친구 사이 아닌가? (하다가) 사실은, 황 작가, 나바보 알지?
극작가
개그맨 나바보? 왜요?
연출가
응. 이번에 작품 하나 의뢰받았거든. 그런데…
극작가
나바보가 연극 올린대요?
연출가
그 친구 돈 많이 벌었잖아. 소극장도 하나 있고.
극작가
바보랑아트홀, 알죠.
연출가
모독을 올렸으면 하던데…
극작가
모독이요? 잘됐네. 그건 선배님 오리지널 아닙니까? 연출 맡아 달래요?
연출가
내가 했던 거 식상하다면서 좀 재미있게 바꿔줬으면 하더라고. 모독을 패러디해서 코미디를 만들어 보자는 거지. 제목은 모독2 정도로 하고.
극작가
하긴 모독 나온 지가 벌써 오십년도 넘었겠네. 선배님이 초연무대에 올린지도 꽤 됐죠?
연출가
꽤 됐지. 사실 몇 년 전부터는 공연 올려봐야 관객도 별로 없고 모독도 이제 막 내릴 때가 됐지.
극작가
최근에도 그거 올린 적 있었나요?
연출가
지난번 극단에서 올렸다가 파리채만 흔들다 막 내렸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황 작가 이번에 나 좀 도와주지.
극작가
제가요? 뭘요?
연출가
원작대로 공연 했다가는 관객 하나 없는 빈 무대에서 공연할 게 뻔하고, 그래서 나 형 하고 얘기된 게 모독2를 새로 쓰자고 합의 봤거든. 나바보가 자기네 클럽에서 올렸던 코미디 몇 편 건네준 게 있고, 내가 거기다 살 좀 붙여봤는데, 이거 장난이 아니라서 말이야.
극작가
나바보가 작품료 많이 준다고 하던가요?
연출가
(약간 당황) 돈은 그냥…
극작가
(지나가는 목소리로 툭 던진다) 한 이 삼천 준답디까?
연출가
뭐 연출료 포함해서 그 정도…?
극작가
(순발력 있게) 선배님 저 대학 다닐 때 선배님이 연출한 모독보고 엄청 감동받았습니다. 그 후 선배님 작품 흉내내갖고 대학무대에 올렸었거든요. 저 대학 연극반 출신인 거 아시죠? 그래서 하는 얘긴데, 사실 저도 그 모독이란 작품 나름대로 고쳐서 무대에 올리면 좋겠다고 생각해둔 게 있었거든요.
연출가
그래? 그게 뭔데?
극작가
형님 이렇게 하시죠. 지금부터 제가 주제, 스토리, 플롯 등을 간단하게 말씀드릴 테니까 내 제안이 맘에 들어 그 일을 내게 맡길 거라면 형님이 받는 돈 가운데 조금만 떼어, 네. 한 오백 주시고, 내 얘기가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고, 어떻습니까?
연출가
그런데 실은 내일 모레까지 대본 가져다주기로 했는데…
극작가
상관없습니다. 나 원래 손 빠르잖아요. 우선 얘기 듣고, 오케이 사인나면 오늘밤부터 쓰기 시작하면 내일 저녁쯤이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힐 테니까.
연출가
그래? 역시 번개 손 황 작가야. 연극계의 케이티엑스, 아니 극작계. 내가 여길 찾아오길 잘 했군. 그럼 어디 간단하게 설명해봐.
극작가
내가 대학 연극반 출신이란 거 아까 얘기했죠. (조명 서서히 어두워진다) 그 때 내 후배가 하나 있었는데, 얘가 별로 알려지진 않았는데, 하여튼 개그맨입니다. 얼마 전 자살한 추무로가 바로 걥니다. (무대 완전히 어두워진다) 연극 시작을 그 친구 얘기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신파조로) 여기 한 개그맨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코미디에 나왔던 친굽니다.
무대 한가운데 핀 조명. 배우 2 고개를 숙이고 심각한 표정으로 서있다. 사이. 은은한 음악.
배우 2
(큰소리로 외친다) 메밀묵 사려어~ 찹쌀떠억.
여배우 2 등장. 리포터의 모습이다. 배우 2를 발견하고 반갑게 다가가 묻는다.
배우 2
메밀묵 사려어~ 찹쌀떠억.
여배우 2
(마이크를 들이댄다) 저 아저씨,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티비씨 라디오, 그것이 참말로 알고싶당께 프로에서 나온 리포터 박지옙니다. 저희 프로그램에서는 이번에 메밀장수들의 특이한 어법의 근원을 알아보려고 노력중입니다. 메밀묵 아저씨. 메밀묵 사려, 찹쌀떡 이거 어디서 배우셨어요?
배우 2
(근사하게 외친다) 메밀묵 사려어~ 찹쌀떠억. 이거요?
여배우 2
네. 찹쌀떠억. 그거요.
배우 2
이거 학원서 배운 것인디.
여배우 2
학원이요? 그 학원이 어디에요?
갑자기 무대 환해지면서 학원이 된다. 화이트보드 앞에 배우1 서있다. 화이트보드 위에는 메밀묵 사려어~ 찹쌀떠억, 에 대한 악보가 그려져 있다. 배우1 관객들을 상대로 열심히 강의한다.
배우 1
자 다같이 따라 해보세요. 메밀묵 사려어~ 찹쌀떠억. (배우들 따라 한다. 배우1 관객들을 향해) 학생들은 왜 따라하지 않아요. 내 강의에 무슨 불만 있니? 다시 한 번 다같이. 메밀묵 사려어~ 찹쌀떠억. (사이) 사러어억이 아니고 사려어. 리듬감을 갖고 멜로디를 음미하면서 잘 좀 해봐요. 저 뒤에 앉은 대머리. 아니 메밀묵 사, 찹쌀떡. 지금 누구한테 시비 거는 겁니까? 그렇게 위협적으로 외치면 누가 떡 사먹어요. 빵 사먹지. (혼잣말 비슷하게, 그런 객석에 다 들릴 정도로) 지갑에 29만원 밖에 없으면서 골프는 잘도 치러 다니는 새끼가. 씨발 메밀묵 사려어~ 그거 하나 똑바로 못해! 좆같은 대머리 새끼가. (분위기 바꿔서) 자자 부드러우면서도, 상쾌하면서도, 리드미컬하면서도… 시원하게, 메밀묵 사려어~ 찹살떠억~
여배우 2
저 잠깐만요. 강사님 질문이 있는데요.
배우 1
질문? 질로 들어가는 문? 여자 거시기? (아주 작은 소리로) 보지?
여배우 2
그게 아니고요. 전 그것이 참말로 알고싶당께 프로에서 나온 리포터 박지옌데요. 지금 그거 강사님 개발하신 건가요? 메밀묵 사려어~ 찹쌀떠억. 그거요.
배우 1
아 메밀묵 사려어~ 찹쌀떠억. 이거?
여배우 2
네. 메밀묵 사려어~ 찹쌀떠억. 그거요.
배우 1
에또 메밀묵 사려어~ 찹쌀떠억, 으로 말씀 드릴 것 같으면 메밀묵 사려어~ 찹쌀떠억, 은 내가 계룡산에서 15년, 지리산에서 12년, 북한산에서 석 달, 관악산에서 두 달, 남산에서 두 달하고도 13일 동안 연구한 게 아니고, 우리 옆집 아저씨한테 배운 것인디?
여배우 2
옆집아저씨요?
장면 바뀐다. 배우 1, 배우 2 장기를 두고 있다.
배우 2
(메밀묵 사려어~ 찹쌀떠억, 하는 톤으로)
여보게 뭐하나아~ 장받어.
배우 1
아 잠깐 잠깐. 이거 한수만 물려주지.
배우 2
(역시 같은 톤으로) 그렇겐 죽어도오 못하지.
여배우 2 등장
여배우 2
저 잠깐만요. 여기 옆집아저씨라고 살고계신가요?
배우 1
누구? 옆집아저씨? (배우 2를 가리키며) 옆집아저씨라면 바로 이 영감탱인데. 그런데 왜 그러슈?
여배우 2
(무척 반갑게 묻는다) 할아버지가 바로 메밀묵 사려어~ 찹쌀떠억, 을 발명하신 훌륭한 할아버님이십니까? 도대체 어떻게 그런 훌륭한 음조를 창안하셨는지 그것이 참말로 알고싶당께요.
배우 2
(역시 같은 톤) 난 원래 그래요오~ 말투가.
여배우 2 놀라서 기절한다.
극작가
(등장하면서) 바로 이 코미디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코미디에 등장했던 그 개그맨 후배가 얼마 전 자살했다고 말하는 거죠.
연출가
(극작가를 따라나오며) 진짜 죽었어?
극작가
뉴스 못 봤어요? 개그맨 추무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은근과 끈기와 약간의 개인기를 무기로 어렵사리 입지를 굳혀나가다가 연극에도 진출했는데, 그 작품이 블랙리스트에 등재되면서 일감이 사라지고 사정당국으로부터 은밀한 내사까지 받게 되자 그만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참 아까운 친구였는데, 운도 지지리도 없지, 하필이면 연출가가 리스트에 오른 작품에 출연했다가 그런 비극적인 취후를 맞다니. 바로 그 추무로, 장차 충무로 진출에 대비하여 예명까지 비슷한 추무로로 지었던, 아아 지지리 목도 없는 개그맨 추무로가 바로 제 대학후배라는 거 아닙니까. 자식 그깟 일로 죽을 것까지는 없었는데. 진짜 자살해야 할 놈들이 수두룩한데 바보처럼 죽다니.
연출가
(깜짝 놀라며) 나바보가 죽었어?
극작가
아니 나바보가 왜 죽어요. 그런 바보가 자살할 줄이나 아나요. 그게 아니고 바보새끼처럼 왜 스스로 명줄 끊었냐, 이거죠. 하여튼 이렇게 추무로 얘길 끄집어낸 다음 배우들이 모두 나와 추무로의 죽음을 추도하는 공연을 시작한다고 너스레를 한바탕 떤 다음, 본격적인 공연을 시작하는 겁니다.
연출가
(생각에 잠긴 척한다.) 뭐 크게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뭐
극작가
(말을 자르며) 내일 모레까지 대본 만들어야 한다면서 나 아니면 무슨 대안이라도 있어요?
연출가
그런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스토리는 들어봐야지
극작가
그 전에 우선 약속부터 하셔야죠.
연출가
약속?
극작가
기동찬 선배님이 받는 고료 중에 기본 오백 땡겨 주시고, 흥행에 성공할 경우 cnb가로 일정 금액을 할당해 주신다는 약속.
연출가
그건 내가 장담 못하는데. 제작자랑 얘기해봐야 하는데, 그러지 말고 먼저 제대로 된 작품이나 만들어 줘. 작품의 완성도가 어느 정도 돼야 협상이고 뭐고 시작하지. 시간도 부족한데 먼저 설레발부터 떨었다가 나중에 아예 나가리 되는 수도 있으니까.
극작가
제가 누굽니까? 대한민국 최고 극작가 황홀석 아닙니까? 금강석도 아니고 타산지석도 아닌 황홀석. 황홀한 돌맹이 황홀석. 작품은 제게 맡기고 선배님은 나바보한테 가서 확실하게 계약이나 맺어 두세요.
조명 어두워진다. 음악이 흐른다. 사이. 조명 밝아지면 나바보의 연습실. 배우들 극중극을 연습하고 있다.
*극중극 부분
여배우 1 흐드러져 있고 배우 1 바지지퍼를 올린다. 아래 대사들은 피터 한트게 작품 <관객모독>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배우 1
지금까지 이 무대 위에서
배우 2
(바깥에서 큰소리로 부fms다.) 현실이… (들어온다.)
여배우 1
있었던 것도 연극이 공연됐던 것도 아닙
배우 1
니다.
여배우 1
순수한 연극이 공연됐더
배우 1
라면 (서둘러 라면 먹는 모습을 흉내 낸다.)
배우 2
시간 따윈
배우 1
문제 삼지 않았을 겁니다.
여배우 2
놀이가 순수하게 진행될 때엔 시간은 의식되지 않는 법이니까요.
배우 2
이 무대 위에서 순수한 연극이 상연됐더
배우 1
라면
여배우 1
오직 관객의 시간만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연극 속에
배우 2
현실이 (껴안는다.)
배우 1
(둘 사이에 끼어든다)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곳엔 항상 두 종류의 시간이 있어 왔습니다. 관객의 시간인 당시들의 시간과 (칼을 빼들며) 가상의 사실이었던 상연중의 시간
배우 2
이 두 가지의 시간이 늘 있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여배우 1
불구
배우 1
하고 시간은 상연되어지지 않았습 (칼로 남 1을 찌른다)
여배우 1
(비명) 니다!
무대감독이 이 장면을 좀 더 잔인하게 반복하도록 시킨다.
여배우 2
(놀란다) 어떤
배우 1
(당황한다) 연극에서도 시간은 재연되어질 수 없습니다.
여배우 2
시간은 거부할 수도 회수할 수도 없습니다. 시간을 상연할 수 없습니다.
배우 2
(죽어간다) 시간은 사실
여배우 1
적인 겁니다. 시간은 다만 사실적인 것만을 상연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상연될 수 없는 것이
배우 2
므로 (죽는다)
여배우 2
또한 현실도 상연될 수 없는 겁니다.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연
여배우 1
극만이! (경악)
배우 1
연극입니다. 시간이 함께 상연되는 연극은 연극이 아닙니다. 시간과 무관한 연
여배우 1
극만이! (오열)
배우 1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습니다. 시간과 관계없는 연
여배우 1
극만이! (통곡)
여배우 2
스스로 충족되는 연극입니다. 시간과 무관한 연
여배우 1
극만이! (광란 상태로 오열. 갑자기 퇴장)
여배우 2
시간을 상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이때 연출가와 극작가 연습 도중 등장하여 공연 연습을 지켜보다가 연습이 끝나자 박수를 친다.
연출가
(극작가를 배우 1에게 소개한다.) 나형 여기 이번에 도와준 황 작가. (극작가를 보며) 나바보씨 알지?
극작가
(나바보와 악수한다.) TV에서 많이 봤습니다. 영광입니다.
배우 1
(약간 거만한 자세로 임한다.) 영광은 무슨. 하여튼 잘 좀 부탁합니다. 기 선배님이야 워낙 모독 하나로 지금까지 먹고 살았던 분이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분이고, 그런데 황형은 무슨 작품…?
극작가
네. 아직 무명이나 마찬가집니다. 우리나라 연극판이 아직까지는 실력보다 나이를 우선하고 있으니까요. 여전히 실력 없는 노땅들이 자리를 꽉 잡고 늘어지니 우리 같은 젊은 축은 어디 낄 자리가 있나요.
배우 1
그래도 요즘 젊은 극작가들 작품도 대학로에 가면 심심찮게 눈에 띄던데…
연출가
(배우 2를 소개한다.) 알지? 가찬이.
극작가
아 기가찬 씨. 대학로에서 많이 봤습니다. 함께 자리하기는 처음이지만요.
배우 2
반갑습니다. 형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실력이 아주 빵빵하다고 칭찬이 이만저만 아니던데요.
극작가
빵빵은 무슨? 이제부터 빵빵해져야죠, 뭐.
연출가
그리고 여기 한할례, 박지예, 그리고 나형 동생 나강패 씨.
서로 인사를 나눈다.
배우 1
그래 새로 쓴 원고 가져왔어요?
극작가
기선배님에게 드렸는데요.
연출가
(봉투에서 대본을 꺼낸다.) 여기 가져왔어. 황 작가가 쓴 거 내가 조금 손 좀 봐왔는데… (극작가를 힐끗 살피며) 괜찮지?
극작가
괜찮죠, 뭐. 원래 그러기로 했던 건데. 선배님이 어련히 알아서 잘 고쳤을라고요.
배우 1
(대본을 받아 배우들에게 나눠준다.) 그럼 어디 한 번 읽어볼까. 자 다들 앉어. 멍청하게 서있지 말고. 공연 이제 한 달밖에 안 남았어.
모두 앉아 대본을 읽기 시작한다.
배우 1
삶은 곧 섹스라고 믿고 있다. 머리 속에는 이상적인 여성과의 기묘한 섹스적 환상이 항상 자리 잡고 있다. 물건은 항상 서있고, 삶의 활력이 기이할 정도로 넘쳐난다. 언제 어디서나 행위가 가능한 최고의 숫컷, 준비된 바람둥이, 신토불이 카사노바. 섹스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심지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행위의 경험은 일천하고 실천보다 꿈을 좇는 이상주의자, 또는 미친놈.
극작가
그 부분은 등장인물 캐릭터 설명인데…
배우 1
그냥 읽어. 성격 파악부터 해야 하니까.
극작가 머쓱해지고 배우 2 대본을 읽는다.
배우 2
세상을 CF적인 것과 CF적이지 않은 것으로만 구분하는 CF중독자.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CF일 뿐이라고 굳게 믿으며, CF를 만드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CF를 보는 사람과 안보는 사람, CF를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 등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이분적사고의 소유자. 흑백논리자. 언제가 CF감독이 대통령이 될 날을 꿈꾸는 무정부주의자. CF모델이 되고 싶지만, 결코 그 꿈이 이뤄지지 않을 것임도 이미 알고 있는 비관론자.
여배우 1
알고 보면 세상은 나와 나 아닌 것의 집합일 뿐이라고 믿고 있다. 공집합이 되지 않기 위해 승냥이처럼 분주하고 여우처럼 영악하게 살지만, 나 아닌 것과 연결된 고리는 고작 PC통신. 우울한 골방에서 은밀한 채팅을 즐기고, 가끔 번개(채팅 도중 갑작스럽게 만나는 행위)에 나가지만 스스로 엮은 고립의 족쇄를 죽을 때까지 풀지는 못할 것임을 이미 인식하고 있다. 스스로 아름다운 독신을 꿈꾸지만 세상은 별 볼일 없는 노처녀라 부르고 있다.
여배우 2
연극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개혁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지만, 그것을 위해 스스로 노력할 필요는 없다고 인식한다. 과학적 논리와 명철한 철학적 인식을 바탕에 깔고 세상을 이해하려 애쓰지만 본능적으로 삶에 대한 애착이 부족하여 그녀의 모든 노력은 공허한 울림에 그치고 만다. 그래도 좋다고 생각하며 쉬지 않고 연극론을 설파하는 그녀를 세상에선 진정한 예술가, 철학자, 위인, 심지어 성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무대감독
내건 아무런 설명이 없는데
배우 1
넌 쨔샤 원래부터 깍두기 같은 역할이야. 잠자코 듣기나 해. 뭐해? 계속해서 읽지 않고?
여배우 1
대표님 읽을 차롄데요.
배우 1
(머쓱한 표정으로 읽는다.) 역시 2편은 좀 싱겁죠? 그렇습니다. 형만한 아우 없다고, 세상의 모든 2편은 싱겁기 마련입니다. 미워도 다시 한 번 투, 장군의 아들 투, 조스 투. 아무래도 1편의 명성을 토대로 저예산, 저정성, 저상상력으로 쉽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2편, 3편은 원조보다 재미가 없습니다. (읽다가 갑자기 화를 낸다.) 이게 뭐야? 2편은 뭐고 원조는 또 뭐지?
극작가
어 그게 아닌데. 원래 그 앞에 나바보 씨가 써준 멋진 사나이 꽁트가 있었는데?
연출가
내가 뺐어. 처음부터 코미디로 나가면 좀 웃길 거 같아서.
배우 1
그게 무슨 소리야? 원래 코미디인데?
연출가
글쎄 코미디도 처음부터 너무 웃기면, 좀 웃기잖아.
배우 1
그게 무슨 소리냐고요? 코미디가 웃겨야지 그럼 울려요?
극작가
그러게요. 연극 공연되고 십분 안에 뭔가 터뜨려 줘야지 안 그러면 관객들이 외면할 텐데. 그리고 그렇게 앞대가리만 탁 끊어가지고 느닷없이 2편이 뭐고 1편이 뭐고 하면 관객들이 무슨 소린지도 모를 것이고.
연출가
그건 연습하면서 조금씩 고치면 돼. 자 어서 읽기나 해봐.
극작가와 배우 1 불만스러운 표정
배우 1
(떨떠름한 표정으로 읽는다) 그래서 원조 보쌈, 원조 족발, 원조 이동갈비가 아류보다 더 맛있고 인기도 더 높은 것 같습니다. 하나 같이 진짜 원조다, 골수 원조다, 원조교제다 이렇게 간판 달고 교제하고 그러는가 봅니다. 이렇게 누구나 원조를 좋아하고 1편보다 나은 2편이 없다지만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 터미네이터 투가 그랬고 여러분이 지금 보고 계신 모독 투 역시 그렇습니다. 독일 극작가 피터 한트게 선생의 독특한 연극 양식을 채용했지만 그의 독일 관념론적 상상력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토종 신토불이 연극으로 다시 태어난 우리의 연극 모독 투. 보시면 알게 되겠지만 진짜 무지무지 재밌습니다. 작품 좋고 연출 좋고 배우 좋고 관객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꿩 먹고 알 먹고 (톤을 바꿔서) 모독 투를 보러 오신 관객 여러분,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배우 2
환영합니다. 여러분.
여배우 1
(장미희 흉내를 낸다) 아주 아름다운 밤입니다. 영광스런 밤입니다.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여배우 2
연극보기에 좋은 밤입니다. 환영합니다.
배우 1
죽는다는 것은 살아있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시작부터 재수 없게 무슨 죽는 얘기냐고요? 얼마 전 잘 아는 후배 하나가 죽었습니다. 그리 유명하지는 않지만 한 때는 방송관계자들로부터도 매우 촉망받던 재주 많은 개그맨이었습니다. 좀 뚱뚱한 게 흠이었지만, 요즘 잘 나가는 개그맨 치고 마른 개그맨 없잖습니까? 그런데 그 친구가 갑자기 자기네 집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린 것입니다. 그 친구 부업으로 일본산 식자재 수입회사를 운영했다는데, 쪽바리 새끼들이 아무런 근거도 명분도 없이 취했던 수출금지령으로 인한 일제 불매운동의 여파는 아니었는지.
여배우 2
(느닷없이) 아참,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서로 인사나 합시다. (스스로 대사를 내뱉고도 이상하다는 표정)
배우 1
인사? 갑자기 인사는 또 뭐야?
연출가
그렇게 하나 하나 내용 트집 잡지 말고 우선 읽기부터 하라니까.
배우 1
읽어.
여배우 2
여러분들은 뭔가를 기대했겠죠? 어떤 분위기를 기대했을 거고, 다른 세계를 기대했을 겁니다. 물론 다른 세계를 기대하지 않았을 수도 있죠. 어쨌든 여러분들은 뭔가를 기대했을 겁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질서 속에 앉아 있습니다. 얼굴들은 한 방향을 향해 돌리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관객입니다. 모두들 자유롭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할 뿐입니다. 여러분들은 우리가 말하는 걸 보고 듣습니다. 여러분들의 숨결은 차츰 우리의 호흡에 맞춰 닮아갑니다. 우리의 연기에 맞춰 숨을 쉽니다. (갑자기 고함을 친다) 야. (사이) 이렇게 제가 고함을 치면 여러분은 놀랍니다. (미친 듯이 웃는다) 제가 이렇게 미친년처럼 웃으면 여러분은 저게 돌았나,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과 우리는 이렇게 가까워집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갈 것입니다.
배우 2
앞으로 우리는 여러분을 소홀히 취급하진 않을 겁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도 개나 소의 관점에서 판단해선 안 됩니다. 개나 소나 경제민주화를 말하고 양극화를 반대한다지만 누구나 고통분담에 참가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 역시 남이 사는 대로 따라서 살진 않을 겁니다. 남이 가는 대로 따라가지도 않을 겁니다. 그랬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겠죠. 잘나가는 가수들 콘서트나 마구 부수고 때리는 할리우드 영화를 즐기러 가셨겠죠. 여러분들은 아주 훌륭한 관객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주성과 주체성이 넘치는 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은 남이 웃긴다고 웃는 것도 아니고 울린다고 울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이 웃기면 웃을 거고 남이 울리면 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무감각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훌륭한 증거입니다. 한마디로 살아있다는 증거겠죠.
여배우 2
자,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시작했군요. 그러니까 여러분과 우리가 금세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위기를 좀 바꿔보죠. (다른 배우들을 바라본다.)
배우 1
그 여자의 귀에 입김을 호 불었더니 그 여자 얼굴이 뻘겋게 달궈지면서 여드름 같은 것이 사방에서 뾰족하게 일어났어. 전기충격을 받아서 감전된 것처럼 말이지. 난 그렇게까지 될 줄은 모르고 겁이 나서 얼른 옷으로 얼굴을 덮고 그 자리를 빠져 나왔어. 아랫도리는 뻣뻣해졌는데, 난 그쯤에서 꿈을 깨고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바깥으로 나왔지. 거리를 걸어가는데 온통 여자들 다리하고 궁둥이 밖에 보이지 않더군. (몹시 불만스런 표정)
여배우 2
여기선 연극의 본질 따윈 취급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책임질게 없어요. 여러분의 호기심은 채워지지 않을 겁니다. 우리들에게서 여러분들에게 번득이듯 전달될 섬광 같은 어떤 요소도 없습니다. 흔히 긴장했을 때 들리는 바스락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이 무대가 세상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단지 세상에 속해있을 뿐이죠. 그러나 우리들은 배우이고 여러분들은 관객이라는 입장으로 여기에 있습니다. 각자 다른 영역에 속해있다는 뜻이죠. 사실 우리는 각자의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여배우 1
알고 보면 세상은 나와 나 아닌 것들의 집합입니다. 여기 내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 아닌 여러분이 있습니다. 나와 여러분 사이에는 어떠한 동질성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우린 따로 떨어진 섬처럼 고립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나고 남은 남입니다. 내가 아니면 남이야 죽든 말든 죽이든 말든 다 상관없는 일이죠. 난 나만을 사랑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오늘 밤은 별로 아름다운 시간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알고 보면 그럴만한 가치를 지닌 사람도 여러분들 중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 땅에 살만한 가치 있는 인간이 도대체 몇이나 되겠습니까?
배우 2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잠깐 동안 씨에프를 보지. 깨끗하고 만화 같고 요술 같기도 해서 부럽게 바라보지. 갑자기 가슴이 뛰고 세상에 나가고 싶었어. 나가면 뭔가 기다릴 것 같거든. 그래서 나와 보니까 아, 아니나 다를까. 포근한 날씨, 아름다운 사람들, 기똥차더라구. 직장에 나갔어. 오늘은 내가 뭔가 다른 사람을 하나쯤 기쁘게 해줘야겠다. 우선 커피를 하나 뽑아줬지. 씨에프처럼 멋지게 주머니에 손을 넣고 쳐다보는 눈도 씨에프처럼 은은하게 웃음을 띄우고, 씨에프처럼 천천히 마셨어. 씨에프처럼 김이 모락모락. 기똥차게 하루가 시작되더라고.
배우 1
무대 위에서의 우리의 운명은 아이러닉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연극은 극적인 것도 충격적인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속 시원히 마음껏 웃지도 못할 겁니다. 여기서의 여러분들은 개체가 아닙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의 운명이나, 과거나, 외양이나, 개인적 사건 등은 문제가 안 됩니다. 여러분은 연극경험 그 자체일 뿐입니다. (읽다가 갑자기 대본을 내동댕이친다.) 그만. 도저히 안 되겠어. 이게 무슨 대본이라고. 너무 좆같잖아.
빠른 암전. 사이. 조명 들어오면 극작가 혼자 무대 한가운데 서있다.
극작가
사실 그 대본은 제가 봐도 엉망이었습니다. 기선배가 자기 맘대로 자르고 덧붙이고 고치고 한 겁니다. 제작자를 겸한 나바보가 대본이 맘에 안 든다고 화를 내자 기선배도 화가 나서 연습실을 뛰쳐나갔습니다. 자신의 연극 경력을 토대로 개그맨의 뒷골목 연극에 편승해 한몫 잡으려했던 자기 자신의 태도에 스스로 울화통이 터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 대본을 왜 연출가가 왜 맘대로 고쳤냐고요? 그렇게 손을 댐으로써 제게 줄 오백만원을 깎으려고 했나 봅니다. 하여튼 그 다음날 제 핸드폰과 전화통은 불이 났습니다. 기선배와 나바보 양쪽에서 모두 저를 찾았던 것입니다.
핸드폰과 유선전화벨 소리 동시에 울린다. 극작가가 핸드폰과 전화를 받으면 연출가와 배우 1이 무대 양 쪽에 나타나 동시에 통화가 이뤄진다.
극작가
(핸드폰을 먼저 받는다.) 네? 아 나바보씨?
배우 1
황 작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이번에 나 좀 도와줘.
극작가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물론 도와드려야죠. 그런데 뭔데요? 잠시만요. (하면서 전화를 받는다.) 네. 황홀석입니다.
연출가
황 작가? 나야. 다름이 아니고 나바보한테 혹시 전화 안 왔어?
극작가
아뇨. 왜요?
연출가
그 새끼한테 전화와도 절대 대본 써준다고 하지 마. 알았지?
배우 1
황 작가 내말 듣고 있어?
극작가
네. 물론입니다. 말씀하세요.
연출가
나바보가 우릴 이용만 해먹고 돈도 안줄 심뽀 같은데, 그러니까 그 새끼한테 넘어가지 말라고. 우리 쪽에서 개기고 있으면 지가 다 승복하게 돼있으니까 말야.
배우 1
솔직히 그게 대본이야. 관객들이 나바보 보러 올 때 웃으러 오지 심각한 개똥철학이나 들으러 오겠냐고. 그러니까 황 작가가 나 도와주면 기선배한테 주려고 했던 돈 이미 지불한 건 할 수 없고, 나머지는 황 작가 다 줄테니까. 알았지.
극작가
기선배한테 돈을 줬어요?
배우 1
그럼 줬지. 뭐 호텔 들어가서 희곡 써야한다고 해서 천이나 줬는데.
연출가
황 작가 지금 누구랑 같이 있어? 누가 무슨 돈을 줬다고 그러는 거야?
배우 1
천이나 먼저 줬는데도 그 따위로 나오는 거야. 그날 저녁 나한테 전화해서 뭐라 그랬는지 알아. 삼천만원 안주면 자기가 날 저작권법인가 뭔가로 고소하겠다는 거야.
연출가
그 새끼 아무래도 고소해버려야 하겠어. 모독의 원작가가 물론 난 아니지만 그래도 이십년 동안 이 기동찬 연극으로 이미 대학로에서 다 인정하고 있는데, 거저먹겠다는 거 아냐.
배우 1
천이나 줬는데 그게 거저먹으려는 거야. 참 기가 막혀서. 그러니까 기선배 제껴놓고 우리 둘이 한 번 만들어 보자고. 황 작가가 좀 고쳐주면 되잖아.
연출가
만약 나 빼놓고 둘이서 공연하려 들다간 큰 코 다칠 줄 알어. 알았어?
배우 1
솔직히 그게 기선배 작품인가. 독일 작품 아니냐고. 번역가한테는 한 돈백 찔러주고 내가 마무리할 테니까 황 작가는 그렇게 알라고. 알았지?
둘의 대사 이어지는 가운데 서서히 조명 어두워진다. 사이. 조명 들어오면 다시 연습실. 배우들 공연 연습중이다.
배우 2
투, 명, 인, 간
여배우 1
눈처럼 투명합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여배우 2
그 사람은 과학자였습니다. 그는 엉뚱하게도 투명인간이 되는 약을 만들겠다고 자신의 연구실에 틀어박혀 한세월을 전부 보내고 있었습니다.
배우 1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아르키메데스처럼 벌거벗고 거리에 나섰는데도 아무도 그의 존재를 몰라봤습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투명인간이 된 것이었습니다.
배우 2
그는 작은 공원의 벤치에 등을 기대고 편안히 누웠습니다. 바로 그의 맞은편에 한 쌍의 연인이 앉아서 훤한 대낮인데도 온통 서로의 몸을 더듬고 핥고,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그들 눈에 그가 보였다면 그렇게 과감한 행위는 하지 못 했겠죠? 하지만 그는 투명인간이니까.
배우 1
그러니 대낮부터 애인의 젖꼭지를 빨던, 남자친구의 거시기를 주무르던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얼마든지 인간이기를 아주 쉽게 포기하는 인간들 진짜 많지 않습니까?
여배우 1
조용히 젊은 것들의 행위를 보고 있노라니 그는 신체의 일부가 서서히 커지는 걸 느끼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오랜 만에 느껴보는 놀라운 느낌!
여배우 2
그는 물건이 빳빳하게 고개를 내밀고 서있는 상태 그대로 당당히 걸어갔습니다. 가다가 소변이 마려우면 아무데서나 쌌습니다. 어, 갑자기 허공에서 물이 쏟아진다, 하고 놀라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도대체 보이지가 않았으니까요. 그는 투명인간이니까요.
배우 2
투명인간을 씨에프에 등장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역시 옷을 입혀서 출연시켜야 하겠죠. 그런데 분장은 어떻게 하죠. 눈, 코, 입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분을 바르고 연지를 찍고 할까요. 투명인간 스스로에겐 자신의 모습이 보일까요. 자신 스스로도 보지 못한다면 그는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요?
배우 1
걱정도 팔자네.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도 잘만 처먹고 잘만 싸던데. 그렇습니다. 갑자기 투명인간은 왕성한 식욕을 느꼈습니다. 성욕보다 한 수 위라는 식욕! (혼잣말) 한수 아래였던가?
배우 2
아 배고프다. 아, 저기 마침 어묵 파는 아줌마가 있네. 가서 몰래 좀 먹고 가야지. 어차피 내 모습이 안보일 테니까 좀 놀라긴 하겠지만 투명인간도 먹어야 살고 금강산도 식후에 경이라는데.
배우 1
하지만 그가 어묵 한 꼬치를 집어 드는 순간. 아줌마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배우 1
아니 이 거지 새끼가 어디 남의 어묵에 손을 대.
여배우 2
노인은 놀랬습니다.
배우 2
아니, 제가 보입니까?
여배우 1
그럼 보이지 않고. 어이고 추접스러워라. 다 늙은 게 뭐 자랑할 게 있다고 빨개 벗고 설치노, 설치긴. 그 덜렁대는 거시기도 지금 거시기라고 달고 다니나. 오매 남사스러운 거. 확 갔다 개나 먹일란다.
여배우 2
순간 투명인간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슬펐습니다. 자신이 더 이상 투명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투명인간 약이 필요 없는 시대의 도래. 자기에게 피해만 안 끼치면 누구를 보더라도 투명인간처럼 보는 세상의 시각.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투명인간이 되어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배우 2
옆을 보십쇼. 곁에 앉은 사람을 한번 쳐다보십쇼. 뭐가 보입니까? 사람이 보입니까? 시력 좋으신 데요!
배우 1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까? 사람은 보여도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까? 겉은 보여도 속은 유리처럼 투명해 보이지 않습니까? 하긴 요즘 같은 세상에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투명인간들이죠. 진짜 사람이 사라진 시대. 21세기 투명인간의 시대.
한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극작가 감동스런 표정으로 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배우 1의 표정은 몹시 불만스럽다.
배우 1
황 작가. 잠깐 이리와 봐. (극작가 다가오자) 황 작가 나이가 몇이야?
극작가
올해 마흔인데, 왜요?
배우 1
나하고 동갑이네. 친구하면 되겠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여기 투명인간 신 말야.
극작가
투명인간 장면이 왜요?
배우 1
이거 꼭 넣어야겠어?
극작가
왜 맘에 안 드세요?
배우 1
좀 재미없는 거 같은데, 어이 할례, 자긴 어때? 이 장면.
여배우 1
글쎄요. 뭐 그런대로.
배우 1
박지예 자긴?
여배우 2
뭐 좋은 것도 같고 재미없는 것도 같고.
배우 1
그런 말이 어딨어? 강패는?
무대감독
좀 철학적인 것 같긴 한데 그게 또 투명인간 하면 영화가 떠오르고, 투명인간이 똥을 쌌는데, 그 똥이 보일까 안보일까?
배우 1
너한테 물어본 내가 바보지. 저거 동생만 아니면 콱 짤라버리는 건데. 기가찬?
배우 2
난 좋은데.
배우 1
그럼 결정됐네. 민주적으로 4대 1. 투명인간은 쫑. 황 작가 뭐 좀 재밌는 거 없어. 아무래도 작품이 여엉~ 기대가 너무 컸나?
극작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 어제까진 좋다고 해놓고 공연 며칠 남았다고 다시 쓰라는 겁니까?
배우 1
싫어? 그럼 케이비에스에 있는 후배 방송작가한테 한 번 맡겨볼까? 그래도 괜찮지?
극작가
글쎄요. 그런데 제 고료는?
배우 1
황 작가가 써준 부분이 사실 거의 없거든. 그리고 요즘 방송국도 상황이 안 좋은지 출연료도 박하고, 행사 같은 거 섭외도 잘 들어오지 않고 나도 죽을 지경이야. 그렇지만 뭐 황 작가 조금이라도 수고한 거 아니까, 그건 내 잊지 않을게. 공연 잘 되면, 우선 공연이 성공하고 봐야지 뭐. 그럼 오늘은 여기서 그만 마치지 뭐.
빠른 암전. 사이. 조명 밝아오면 극작가와 연출가. 연출가 계약서를 읽고 있다.
연출가
계약서. 극단 바보나라 (이하 “갑”이라 칭함)과 연출가 기동찬, 극작가 황홀석 (이하 “을”이라 칭함)은 2020년 모월 모일 모시 이 계약을 맺는다. 제 1 조 계약의 목적. 가. 갑은 대학로에 위치한 바보랑아트홀 등 극장에서 피터 한트게 원작 <모독>을 개작한 <모독2>를 제작 공연하기 위하여 을에게 그 집필을 의뢰한다. 을은 제작자 갑의 요구에 응한다. 나. “모독2”의 저작권은 “모독2”의 개작에 참여한 기동찬, 황홀석이 공동으로 소유한다. 단 “모독2”의 저작권을 소유한 2인 중 1인 이상 반대할 경우 갑은 “모독2”를 공연할 수 없다. 등등 불라불라불라… 나바보가 여기다 싸인을 하긴 할까?
극작가
안하면 공연 못하게 해야죠. 뭐.
연출가
글쎄?
조명 서서히 어두워졌다가 갑자기 밝아진다. 극작가 홀로 무대 위에 서있다.
극작가
이렇게 된 겁니다. 여러분. 나바보는 끝내 싸인을 하지 않았고 공연은 이렇게 올라간 거죠.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억울하지 않습니까?
배우 1
(무대 뒤에서 나타난다)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그까짓 돈 주면 될 거아냐. 누군 수천억도 꿀꺽 꿀꺽 삼키는 세상인데 그까짓 작품료 좀 떼어먹었다고 징징 짜긴. (돈뭉치를 던진다. 돈이 허공에 흩어져 날린다)
배우들 모두 나타나 가짜 돈을 객석에 뿌리면서 욕설을 하기 시작한다. (이하 대사들은 공연 당시 시대상황에 따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불합리한 사건을 발췌 재구성해도 된다.)
배우 2
(마치 공연이 오래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대사를 시작한다.)
그러면 무한히 멀었던 여러분과 우리 사이의 간격이 조금 좁아집니다. (모독이란 단어에 필요 이상의 힘을 주어 발음한다) 모독을 받아 몸이 빳빳하게 굳어지는 여러분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들을 모독하는 게 아니고, 여러분들이 말하는 모독적 언사를 사용할 뿐입니다. 이 모독은 누구를 지적한 게 아닙니다. 다만 우린 음률성을 조성해봤을 뿐입니다. 여러분들은 당황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리 경고를 받았으니까, 모독을 받아도 감당할 수가 있을 겁니다. <너>라는 말 자체가 이미 모독적인 거고 보면, 우린 서로 너니 나니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아주 트자.
여배우 1
어느 시골에서요. 한 농부가 하루는 조를 수수해서 한창 껍질을 벗기고 있었는데요. 갑자기 대문 앞에 빚쟁이가 지나가더래요. 그래서 막 뛰어나가려는데, 그 아내가 여보 조까다 말고 시방 어디가유? 하니까 농부가 지금 조깔 새가 어딨어, 빚쟁이 잡으러 가는데. 라고 했대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배우 2
(잠자코 듣고 있다가) 좆같은 년이 좆같은 말만 하니까 진짜 좆같네.
여배우 1
뭐라구, 씹새끼야!
배우 1
(크게) 씹, 새, 끼. 씹새끼의 씹, 성숙한 여성의 성기. 씹하자, 성교하자의 속된 말. 씹거웃, 성숙한 여자의 씹두덩에 나는 털. 동아 새국어 사전 1,436 쪽. (관객을 하나 가리킨다.) 뭘 보고 있어, 이년아. 지금 니 얘기하는 거야. 돌대가리 같은 씹할년. (몹시 흥분한 상태. 진짜 화난 것처럼 연기한다.)
여배우 2
다음의 단어를 외우시오. 새, 개, 돼지, 나쁜, 빌어먹을, 염병할, 씹, 환장할, 미치고 펄쩍 뛸, 우라질, 병신, 바보, 좆… 그리고 뒤에 새끼 또는 년을 붙여보시오. 당신들은 아주 훌륭한 욕들을 완성했습니다. 알았냐? 이 새, 개, 돼지, 나쁜, 빌어먹을, 염병할, 씹, 환장할, 미치고 펄쩍 뛸, 우라질, 병신, 바보, 좆새끼들아.
배우 2
욕은 먹는 새끼도 좆같지만 욕을 하는 새끼도 좆같은 거야. 이걸 욕철학적 관점에서 욕의 상호성, 또는 욕의 씨너지효과라고 부르지. 욕은 충격적일수록, 일반성을 벗어날수록, 상식 밖의 내용일수록 더 효과가 크지. 또 여러 욕을 한꺼번에 모아 왕창 내뱉게 되면 더더욱 효과가 있지. 알겠지? 이 개좆 빨다 새똥 맞아 좆뿌러질 우라질 씹새끼들아.
여배우 2
여기 혹시 끝에 사자 붙은 직업 가진 사람 있습니까? 판사, 변호사, 검사, 의사, 간호사, 세무사, 공인회계사, 법무사, 수의사, 약사, 한의사, 장의사, 기사, 기술사, 요리사, 대학강사, 박사, 석사, 기공사, 기능사, 개장사. 하여튼 사자 붙은 새끼들 모조리 사형시켜야 돼. 사자 붙은 놈치고 사기 안치는 새끼 하나도 못 봤거든. 변호사는 판사, 검사한테 뇌물주고 죄인 무죄석방 시키고 의사, 간호사는 환자 생명 담보로 돈 뜯어내고, 약사 한의사는 서로 돈 더 먹겠다고 지랄발광을 떨고, 세무사, 법무사, 공인회계사 새끼들은 세금 떼먹을려고 눈깔 까뒤집고 복날 개새끼들처럼 핵핵거리고, 박사 석사 새끼는 실력은 좆도 없는 게 돈 내고 교수직을 사고 팔고, 에이 쓰레기차 피할려다 똥차에 치어죽을 새끼들. (관객을 향해) 그러니까 니네들도 자식 출세시킨다고 사자 붙은 직업 가지라고 억지공부 시키지 마 씹새끼들아.
여배우 1
특히 검사, 이 새끼들이 문제야. 전직 검찰 차장 사건 알지? 성접대, 돈접대 받을 만큼 다 받은 거 알면서도 불기소 처분했잖아. 결찰이 기소 의견으로 증거와 함께 보냈고, 피해자 증언도 있는데, 한마디로 지 새끼 감싸기라 이거지. 아 진짜 더러운 새끼들, 이러려면 검찰 조직 아예 없애버리는 게 낫지.
무대감독
더 웃긴 건 마약 사들고 들어오다 공항에서 딱 걸린 전직 국회의원 딸을 불구속기소한 거야. 전직 장관 딸은 무슨 표창장 받은 거 갖고 아주 때려죽일 것처럼 난리 브루스를 추는 놈들이 뽕쟁이를 불구속 기소하다니! 씨발, 이게 나라냐?
배우 1
요즘 젊은이들 중에 조상 탓하는 친구들이 그렇게나 많다더라. 할아버지 잘난 놈들 다했던 친일파 왜 안했어요? 악질 순사질이라도 했으면 후손들 지금 이렇게 개고생 안했을 텐데, 그게 뭡니까? 하필이면 독립운동을 하시다뇨!
배우2
우리 아버지도 해방 후에 빨갱이 좀 신나게 때려잡던지 직업군인이라도 하시던지, 하필이면 민주화운동 하시다가 집을 아예 풍비박산 내시다니. 민주화운동 하던 김에 삼김 눈에 들어 국회의원 따까리라도 좀 하시던지.
극작가
공안검사 하려면 머리가 좋아야 하고 공부도 잘해야 했으니 그런 거까진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순경으로 시작해 고문기술자는 할 수 있었을 거 아닙니까? 어려운 시대에 자식 제대로 키우시려면 그 정도 기술 하나는 갖고 있었어야죠. 그런데 고문기술자는 개뿔, 고문당해 빙신 되셨으니.
여배우 1
(관객 하나를 째려보면서)
야. 너! 그런데, 아까부터 입술을 씨익 찡그리고 몹시 씨니컬한 표정을 짓는데, 그래 넌 깨끗하다 이거냐? 최순실이고 다스고 너하곤 상관없다 이거야? 좆 까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너 같은 새끼들 때문에 나라 요절나는 거야, 이 무관심탱이들아.
여배우 2
호화 혼수 안 해왔다고 칼 들고 설치는 새끼들. 나중에 니 딸도 똑 같이 당하는 수가 있어. 공정치 못한 욕심탱이들.
무대감독
그저 수입품만 좋다고 이태리제 브래지어, 영국제 빤스, 프랑스제 콘돔만 사서 쓴다는 년들. 내친 김에 보지도 외제로 성형수술하지?
배우 1
회식한다고 고기 실컷 먹고 다시 냉면 시켜 먹다가 반 넘게 남기는 새끼들. 그러다가 배 터지는 수가 있어. 평생 빌어먹을 회식충들아!
연출가
어떤 새끼는 아직도 전두환 새끼 멋있다고 하더라. 뭐 소신 있는 놈이라고? 적어도 전두환 시절엔 경제가 호황 아니었냐고? 에라 이 잡놈, 잡년들아. 그게 전두환이 잘한 거니? 노동자, 농민, 국민들이 잘해서 그렇게 된 거지!
극작가
매일 광화문에 모여 태극기 흔드는 할머니 할아버지, 겨울철에는 나오지 마세요. 감기 걸려요. 얼마 전에는 우리 어머니도 광화문에 나가시더라고요. 심심하대나 뭐라나. 그래서 말했죠. 종북좌파 극작가 아들 두신 분이 그런데 왔다 갔다 하시면 안 됩니다. 그럼 용돈 안 드립니다.
여배우 1
그런데 니들 왜들 그러고 벌쭉거리며 앉아 있냐. 똥 쌌냐? 똥 싸고 뭉개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거냐. 화가 났으면 말을 해. 입이 없냐, 아가리가 없냐?
무대감독
이 새끼들 진짜 웃긴다. 온갖 쌍욕 다 들으면서도 웃고만 있네.
여배우 2
아 알았다. 우리 연극 원래 이렇게 돈 받고 사람들 불러다 실컷 욕하는 연극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지? 아냐, 씹새끼들아. 오늘 밤 대본 조금 전에 다 고쳤어. 지금 대본에도 안 나온 욕먹고 있는 거야, 이 식충이들아. 그리고 뭐 공감을 느끼러 극장에 온다고? 극장에 와서 강한 공감대를 형성한다고? 공감대는 관두고 니 성감대 관리나 제대로 해라 이 고자새끼들아.
여배우 1
나 참 살다 살다 돈 내고 욕먹으러 오는 새끼들 처음 보네. 헐.
여배우 2
이 새끼들 욕을 먹지 않으면 좆도 안서는 고자새끼들 아냐? 허얼.
배우 1
그래도 군소리 없이 욕먹을 대로 다먹어준 고마운 새끼들이긴 하네. 고마워 씹새끼들아. 허얼!
배우들
(모두 함께 크게 외친다.)
허얼!
급히 막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