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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종만 Oct 29. 2024

끝이 다시 시작이 되는
안나푸르나 트레킹

글·사진 함종만(작가)

여행이라 부르기엔 가볍고 모험이라 하면 과해 보인다. 네팔 포카라에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걷는 거리만 100km 넘는 길을 왕복하는, 영어로 트레킹(Trekking)이라 부르는 행위. 우리 말로는 자연 답사 여행, 도보여행 등이라 하는데, 트레킹에 비해 조금 어색하다. 하지만 명칭이 중요한가? 무엇이라 하든 감동과 추억이 덜하지 않다. 명칭보다 중요한 건 해보았느냐는 것이다. 나는 해보았다. 2024년 10월 4일부터 12일 사이 ABC 트레킹을 시도했다. 그 후기다.     


마침내 안나푸르나

  낮은 언덕에 올라서니 멀리 성채 같은 게 얼핏 보였다 사라졌다. 어느새 차오른 안개가 지워버린 저곳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가 분명할 텐데,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있던 게 없어진 건 아니다. 잠시 가려졌을 뿐이다. 


삽시간에 세상을 지워버린 지독한 안개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MBC)를 출발한 지 한 시간여 만에 도착했다. 아니 도착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이미 다녀온 이들이 입을 모아 그랬다. 코앞인 듯싶지만 보기보다 멀다. 과연 그랬다. 눈에 잡힐 듯하면 멀어지고, 코에 닿을 듯하면 다시 달아났다. 결국 ‘나마스떼’, ‘웰컴’이란 문구가 적힌, ABC 입구 안내 간판까지 50분 넘게 걸렸다. 

  지난 나흘 내내 걷다가 쉬다가 다시 걸은 걸 생각하면 찰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기대가 컸던 만큼, 그동안의 여정이 길었던 만큼 50분은 짧지 않았다. 그렇지 않던가. 가능성이 적으면 희망도 줄지만, 실현 가능성이 커지면 희망이 현실이 되고, 그럴수록 조바심은 배가 되지 않던가.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고, 식탁에 앉았을 때가 가장 배고프며, 결승점을 코앞에 둔 선수가 가장 힘든 법이다.

  그래서였을까. 부족한 산고로 인해 격하게 숨을 토해내면서도 하나둘 도착한 일행 모두 벅찬 감동을 숨기지 않았다. 마침내 결승점을 통과한 사람처럼 감동적인 표정이었다. 지켜보는 이들의 눈길이 어색하지도 않은지 모두가 보는 가운데 힘차게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나와 아내도 그랬다. 일행 중 하나가 건네준 태극기를 나눠 들고 팔을 치켜들었다. 


쑥스러움 탓에 차마 만세를 외치진 못했다


  아내와 달리 소리를 내어 만세를 외치진 않았다. 살짝 미소를 띠긴 했다. 낯선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만세를 외치기엔 제법 나이를 먹지 않았나 싶어서였다. 물론 편견이며 자칫 꼰대로 비치기 충분한 행동이긴 했으나, 그래도 창피한 건 창피한 것이다. 나보다 나이 든 분들이 목청껏 만세를 외치는 모습도 보였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분들 생각이고 그분들 몫이었다.

  나이도 나이지만 환호성을 지르기에 뭔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기대했던 풍광이 아니었다. 먼 듯 가깝고 가까운 듯 멀다는 MBC에서도 선명히 보이던 안나푸르나 설산 풍경이 모두 사라졌다. 믿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완벽하게 풍광을 지워버리는 지독한 안개라니. 마침내 안나푸르나, 어떻게 도착한 곳인데.


마침내 ABC 입구 안내 간판 앞에 선 가칭 ABC 원정대


  배정받은 방에 짐을 풀고 식당에 앉아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예비 배터리를 충전하는 동안에도 안개는 여전했다. 가슴속 버킷리스트 하나를 실현하기 위해 찾은, 갖은 고생 끝에 마침내 도착한 ABC에서 무자비한 안개의 침공을 받은 일행의 표정은 실망을 넘어 침통하기까지 했다. 먼저 도착해 기다리던 식사 담당 스태프가 따라준 생강차가 입에 쓰기만 했다.     


완벽히 압도하는 풍광

  그때였다. 식당 한구석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창밖을 보니 거짓말처럼 날이 개면서 유럽의 마터호른(4,478m), 쿰부 히말에 있는 아마다블람(6,812m)과 함께 세계 3대 미봉으로 이름난 마차푸차레(6,997m)가 가까이 다가섰다. 칭칭 감았던 구름이 흩어지면서 순수하고 청정한 마차푸차레가 온전히 자태를 드러내자 너도나도 스마트폰을 꺼내 들기 시작했다. 


안개가 사라지자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 마차푸차레


  마차푸차레는 힌두교의 3대 신 중 신도들이 가장 많이 받드는 시바 신에게 봉헌된 산으로 네팔인들이 신성시하는 산이다. 정상 부분이 물고기 꼬리를 닮아 ‘피시 테일(Fish's Tail)’이라 불리기도 하는 마차푸차레는 네팔어로도 물고기 꼬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아직 정상 등정은 한 번도 없었으며, 1957년 영국의 지미 로버츠가 이끄는 원정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정 시도를 했으나 정상을 50m 남겨두고 발걸음을 돌렸다고 한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등정 허가를 받은 까닭이었다. 그들이 약속을 지킴으로써 마차푸차레는 영원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산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네팔 정부에서 아예 등산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음이다.

  한참을 마차푸차레의 자태에 홀렸다가 이윽고 등 뒤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여태 숨어있던 안나푸르나 산군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가운데 늠름한 자태의 안나푸르나 남봉(7,219m)이 자리를 잡았고 그 너머 왼쪽에는 안나푸르나 제1봉(8,091m)이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있다. 1950년 모리스 에르조그가 이끄는 프랑스 원정대에 8,000m급 산으로는 처음으로 정상을 내준 산이었다. 

  1953년 텐징 노르가이와 에드먼드 힐러리가 에베레스트에 등정하기 전까지 3년간 인류 유일의 8,000m급 등정 기록을 내주었던 안나푸르나 1봉 반대편, 안나푸르나 남봉 오른쪽으로는 강가푸르나(7,455m)와 안나푸르나 3봉(7,555m)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마치 병풍처럼 ABC를 감싸 안은 안나푸르나 산군 너머로 구름 조각들이 빨려들 듯 넘어가는데, 참으로 장관이다. 보는 사람을 완벽히 압도하는 풍광.


병풍처럼 ABC를 둘러싼 안나푸르나 산군의 위용


  이제 알겠다. 왜 사람들이 안나푸르나, 안나푸르나 하는지. 평생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로 ABC 트레킹을 꼽는지, 힘들고 긴 여정 속에서도 다시 찾고자 하는 이들이 많은지, 어째서 안나푸르나인지. 바로 이 기분이었다. 완전히 압도당하는 기분. 이 정도라면 두 손 두 발 모두 들고 항복해도 좋다 싶은 감정, 그렇게 압도당하고도 입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는 그런 마음. 그저 웃음이 터져 나올 뿐이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안나푸르나를 오르다 사고를 당했던 한국인 산악인을 위해 세워놓은 추모비를 보러 가는 길, 아내를 비롯해 우리 원정대원 모두, 아니 일행 모두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안나푸르나 남벽에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다가 비운의 사고로 산이 되어버린 박영석, 신동민, 강기석 3명의 추모비 앞에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그것이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자꾸만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듯했다.     


황금색으로 변해가는 석양 녘 마차푸차레


내키지 않았던 발걸음

  문득 벅찬 감동 사이로 이곳에 도착하기까지의 길고 지루했던, 그리고 힘겨웠던 지난 며칠간의 여정이 떠올랐다. 그 이전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준비했던 과정도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처음 안나푸르나행을 결정한 것은 한 해 전인 2023년이었다. 거의 매주 만나 가벼운 산행을 즐겨온 대학교 동아리 친구 중 하나가 자신의 버킷리스트라며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제안했다. 나만 빼고 모두 흔쾌히 찬성했다. 나 역시 여행 자체에 반대한 건 아니었다. 가는 곳이 문제였다.

  2015년이었다. 당시 고등학교 동창들과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준비 중이었다. 회비를 모아 항공권을 구매하고 네팔 현지 교민을 가이드로 고용하고, 짐도 대충 꾸려놓고, 이제 떠나면 되었다. 그런데 출발을 닷 새 앞둔 4월 25일 네팔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규모 8.1, 진원 깊이 15km의 지진으로 네팔을 비롯해 인근 중국,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지에서 8,400명 이상이 사망하고 1만 6,000여 명이 부상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엄청난 규모였다. 알프스-히말라야 조산대에서 일어났던 지진 중 5번째로 강력한 규모의 지진이었다. 이 지진으로 카트만두시 전체가 남쪽으로 약 3m 이동했다고도 했다.

  지진으로 여행이 취소된 걸 두고 처음엔 안타깝다고 생각했으나 이내 마음이 바뀌었다. 알고 보니 천만다행이었다. 현지에서 지진을 접했다면 얼마나 위험했을 것인가.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심하면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었다. 당장 건물이 무너지고 비행장도 폐쇄되어 난민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실제로 오갈 데 없이 공항에서 며칠을 지낸 이들도 적지 않았으니까.

  주위에서는 우리를 보고 억세게 운 좋은 사람들이라 입을 모았다. 그 말이 옳았다. 가기 전에 재앙을 피할 수 있었으니 참으로 운이 좋았다. 그런데 이후 내게는 안나푸르나에 대한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게 생겼는지, 그곳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사라졌다. 아예 가고 싶은 여행지 명단에서 삭제되었다. 그래서 처음 ABC 트레킹 얘기가 나왔을 때 선뜻 찬성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런 걸 이유로 끝까지 친구들의 의견에 반대하긴 어려웠다. 실체가 모호한 트라우마라는 게 핑계치고는 약했기 때문이다. 마침 몇 년째 이어오던 명산 100 프로그램도 막바지를 향하면서 시원섭섭한 감정이 더하던 차였다. 결국 친구들의 권유를 마다하지 못해 받아들이는 형식을 빌려 함께 떠나기로 했다. 여기에 아내와 친구 여동생이 동참하면서 남자 셋, 여자 셋, 총 6명으로 구성된 가칭 ABC 원정대(실제로 그렇게 불린 적도, 명칭을 지은 적도 없으나 편의상 그렇게 부르기로 함)가 탄생했다. 


촘롱으로 이어지는 출렁다리 앞에서 (왼쪽부터 아내와 나, 이현수와 안홍식, 김혜정 혜련 자매)


  원정을 위해 별도로 준비할 건 없었다. 비용은 당시 공동으로 붓고 있는 적금으로 충당하면 될 것이고 체력은 매주 이어지는 가벼운 산행과 더불어 각자 알아서 관리하기로 했다. 몇 해 전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EBC) 트레킹을 다녀온 친구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추위와 고산증에 대해 잔뜩 겁을 주긴 했으나 모두 각오하고 있던 터라 크게 걸림돌이 되진 않았다. 그렇게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긴 여정 그리고 더딘 시간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카트만두 트리부반 공항까지 순수 비행시간만 6시간 반이 넘는다고 했다. 항공기의 출발 지연이나 연착도 잦아 8시간 정도 걸리는 게 보통이었다. 주 2회 인천공항을 출발하는 대한항공 직항 편이 그랬다. 홍콩이나 싱가포르 등을 경유하는 항공편을 이용할 경우, 도착까지 20시간 가까이 걸린다는 건 상식이었다.

  우리 원정대가 출발한 그날도 그랬다. 2024년 10월 4일 오후 1시 35분 출발 예정인 KE695편이 공항을 이륙한 시간은 3시를 훌쩍 넘겼다. 가을 여행 시즌에 접어들면서 인천공항을 이용하는 항공편이 늘어 출발이 늦어졌다는 기장의 사과방송을 세 차례 정도 들은 후에야 비행기는 활주로를 박차고 떠올랐다.

  다행인 건 네팔이 우리나라보다 3시간 15분 늦어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네팔과 우리나라 사이 3시간 15분의 시차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대부분 국가에서는 시차를 1시간 또는 30분 단위로 책정하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이례적인 시차는 네팔과 인도와의 분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950년대 인도와 분쟁을 겪은 네팔이 일부러 표준시를 인도보다 10분 빠르게 조정했다. 인도에 뒤지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이후 인도가 표준시 기준을 5분 늦추면서 두 나라의 시차가 15분으로 벌어지게 되었고, 우리나라와의 시차도 3시간 15분으로 변경되었다.

  오후 6시를 넘은 시간, 어두워지고 있는 트리부반 공항에 착륙했다. 시원찮은 에어컨 바람이 피로를 더하는 가운데 비자 발급과 입국 절차를 거치는데, 모든 과정이 참 여유로웠다. 좋은 표현으로 그랬다는 것이다. 참으로 더디고 느려터졌다. 발급비 30달러를 받고 도장만 찍어 주면 될 것을, 통하지도 않는 네팔어로 이것저것 묻지를 않나 힐끔힐끔 표정을 살피지를 않나.


해가 저물 무렵 도착한 카트만두 트리부반 국제공항


  입국 심사도 더뎠다. 꼼꼼하게 살피기보다 그냥 행동이 굼뜨고 느려 보였다. 기후와 민족성,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편견이겠지만 평소 ‘빨리빨리’를 신봉하는 민족의 후예로서 참으로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게 입국장을 빠져나와 짐을 찾으러 갔는데, 여긴 더했다. 일일이 사람 손으로 짐을 나르는 건지, 짐을 찾기까지 1시간은 족히 걸렸다. 실제로는 40여 분 걸렸으나 심리적으로는 그랬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네팔에서는 시간조차 더디 흐르는 듯했다. 어린 시절 유머가 떠올랐다. 우리나라 시계가 일본 시계보다 훨씬 빠르다는 거 알아? 우리 시계는 똑딱똑딱 이렇게 흐르지만 일본 시계는 똑이노딱이노 이렇게 흐르거든.

  마중 나온 가이드는 달랐다. 나중에 몽골 계통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을 만큼 한민족과 비슷한 외양에 성격도 시원시원, 행동도 빠릿빠릿했다. 한국에서 일했던 경험 덕분인지도 몰랐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나라 일터에서 잘리지 않고 버티려면 빨리 빨리는 기본이니까. 그렇게 이름을 아가씨(실제로는 아카쉬(Aakash Rai)였으나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라 밝힌 후 성큼성큼 앞장서는 가이드를 따라 냉큼 버스에 올라탔다.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치는 길

  이어지는 여정도 길기만 했다. 무려 5성급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이튿날 아침 일찍 다시 트리부반 공항으로 향했다. 8시에 출발하는 포카라행 쌍발 프로펠러 비행기는 시골 버스만큼이나 낡아 보였으나 사뿐하게 거대한 동체를 띄우더니 빠르게 서쪽으로 날아갔다. 


카트만두와 포카라를 이어주는 국내선 비행기


  운 좋게 오른쪽 좌석을 배정받은 나는 이내 넋이 나갔다. 둥근 차창 너머 낮게 깔린 구름 뒤로 우뚝 솟은 설산이 눈부셨다. 그렇지. 이게 네팔이지, 이래서 ABC에 가는 것이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다 보니 어느새 포카라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후 이어지는 여정은 역시나 길고 지루하고 힘겨웠다. 마침내 ABC를 찍고 내려올 때까지 내내.


운 좋게 오른쪽 좌석에 앉아 즐길 수 있었던 히말라야 설산 풍경


  전용 버스를 타고 포카라 시내 환전상에 들러 달러를 루피(NPR)로 바꾼 후 안나푸르나 트레킹 출발점 나야풀까지 가는 길은 그나마 수월했다. 우리나라 지방도로 수준보다 못한 길이었으나 지나는 차량이 드물어 속도감을 즐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여정은 고난의 시작이었다. 나야풀에서 지프로 갈아타고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되는 지누단다까지 가는 길은 내내 비명과 함께해야 했다. 

  10월에 시작하는 건기로 접어들기 전 내린 폭우로 좁은 비포장도로는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일이나 사물이 헝클어져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결딴이 나거나 어수선한 상태를 의미하는 ‘엉망’에 물이 많아서 질퍽질퍽하게 된 땅 ‘진창’이 합쳐진 곳, 바로 여기였다. 

  그런데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치는 지프 안에는 안전띠도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는 흙길 바로 옆은 천 길 낭떠러지. 여수 금오도에 가면 걷기 좋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비렁길이 있다. 비렁은 벼랑의 여수 사투리로,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에 조성된 길이라는 의미다. 지누단다 가는 길에 비하면 아파트 2층 테라스 정도다.

  혹시라도 지프에서 튕겨 나가지 않을까, 엉덩이며 팔다리에 저절로 힘이 더해졌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지프에서 내릴 때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올 정도였다. 반면 아슬아슬한 코스를 지나온 지프 운전기사들 표정은 여유만만이다. 이들이야말로 극한 직업을 미소로 받아넘기는 베테랑 중에서도 최고의 베테랑이었다.


산사태로 길이 막혀 지프에서 내려 한 시간여를 걸어야 했다 


  그런데 한창 곡예 운전을 즐기는 듯하던 운전기사가 갑자기 지프를 멈추었다. 얼핏 보아도 목적지를 한참 남겨둔 지점 같은데. 가이드가 다가와 산사태로 길이 없어져 도보로 가야 한단다. 차라리 다행이지 싶었다. 재빨리 하차해 배낭을 메고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여를 걸어 오늘의 최종 목적지 촘롱으로 건너가는 출렁다리 앞에 섰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기념사진을 남기자고 했다. 조금 전 점심 먹을 때 낯을 익힌 여성 회원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냉큼 낮은 언덕 위로 올라갔다. 이어 일행을 일렬횡대로 세우고 김치, 사인은 브이, 파이팅을 연실 외치며 셔터를 눌러댔다. 그리고 가이드에게 카메라를 맡긴 후 재빨리 일행 가운데 들어가 열심히 포즈를 취했다. 출렁다리를 배경으로 활짝 웃는 모습이 담긴 정겨운 영상은 귀국 후 여행사를 통해 일행 모두에게 전송해 주었다.     


한 시간여 걸어와 도착한 출렁다리 앞에서의 기념촬영


생사는 몰라도 여정은 함께

  정겨운 모습이 담긴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지누단다 오는 길에 들른 비레탄티에서 가진 점심 식사 덕분이었다. 식사 전에 이번 여정에 동참한 일행들의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다. 최고령자는 올해 희수(77세)를 맞았다는 분과 그분의 동창생, 사이버 수사대를 끝으로 경찰직에서 은퇴했다는 조카까지 셋이 한 팀이었다. 그리고 가칭 ABC 원정대 6명, 우리 또래 남성 두 분과 50대 부부 한 쌍, 그리고 막내 격인, 내 아들과 동갑내기 청년까지. 남자 10명, 여성 4명, 총 14명. 

  하나같이 밝은 표정이고 기대에 찬 모습들이었다. 왜 안 그럴까. 모처럼 기회를 만들어 먼 길 떠나온 여행객들 아닌가. 그리고 이제 진짜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이니 얼마나 설레고 들뜨고 조금은 두렵고 그렇지 않을까. 내가 그런 것처럼. 

  여유롭고 선해 보이는 표정에 금세 친근감이 들었다.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라는 말대로, 산이 좋아 먼 이국땅까지 찾은 이들이니 오죽 인자하고 심성이 착한 분들이겠는가. 아니면 또 어떤가. 이미 한 배에 올라탔음을. 생사까지는 몰라도 산에서만 5박 6일 이어지는 힘든 여정을 죽으나 사나 함께 지지고 볶으며 올라갔다가 고스란히 내려와야 하는 것을. 그러니 금세 친해질밖에.

  여유롭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점심이 차려졌다. 미리 도착한 여행사 주방 팀이 준비한 메뉴는 비빔밥이었다. 아무래도 맛이 한국만 할까 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여간한 국내 맛집에 버금가는 수준, 진짜 한식이었다. 트레킹이 끝날 때까지 동행하면서 일행의 식사를 책임질 것이라는 주방 팀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셰프를 동반한 트레킹이라, 벌써 배가 부르고 가슴이 든든해지는 듯했다.

  그렇게 짧은 점심시간을 통해 급격히 친해진 일행들은 멀리 내려다보이는 출렁다리 앞에서 정겨운 모습으로 기념 촬영을 마친 후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섰다. 가장 먼저 다가선 장애물은 역시 300m에 달하는, 실제로는 287m인 출렁다리였다. 


겁 없이 웃는 표정의 씩씩한 아내 모습


  출렁다리는 쇠로 만든 튼튼한 구조물이었으나 수십 미터 협곡 위에 걸쳐진 모습이 한편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카메라를 향해 용감하게 포즈를 위하는 일행도 있었지만,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총총걸음으로 내빼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아예 밑을 내려다보지 못하고 앞사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바들바들 떨면서 건너는 이도 보였다.

  두려움 속에, 더러 즐거운 가운데 다리를 건넌 일행을 기다리는 건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이었다. 1,780m에서 2,170m까지 고도 400m를 단박에 높이는 공포의 계단 지옥 코스, 두 번째 장애물이었다. 오늘 일행이 묵을 첫 번째 로지(Kalpana Guest House)가 계단을 넘어선 곳에 있는데, 내일은 오늘 올라간 만큼 계단을 내려선 후 시누와(2,360m)까지 다시 계단 코스를 올라가야 한단다. 

  이후에도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 깎아지른 절벽 사이 계곡 길이 쉼 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기나긴 여정 끝에 마침내 해발 4,130m에 자리 잡은 ABC에 도착할 것이다. 힘들고 고된 여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행복한 여정이기도 할 것이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온 것이니까. 얼마나 힘들까, 그렇게 힘든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길을 찾을까 아니면 잃을까, 그런 걸 확인하려고.      


계단 지옥을 걷다 잠시 로지에 앉아 쉬는 일행


계단 지옥을 오르며

  인간은 참 묘한 동물이다. 도구 사용, 언어와 문자 소통 등등 여러 가지로 동물과 구분이 되지만 꼭 필요하지 않은 일에 몰두하는 특징도 동물과 사뭇 다르다. 맹수는 배가 고프지 않은 한 사냥에 나서지 않는다. 때가 아니면 교미도 하지 않는다. 인간은 다르다. 굳이 필요하지도 않고 하지 않아도 될 일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 등산이라든지 안나푸르나 트레킹 같은 것들.

  오르고 올라도 끝날 것 같지 않은 계단 지옥을 두 시간 넘게 오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도대체 지금 뭐 하는 거지? 이러려고 여기까지 왔나? 차라리 오색 분소에서 대청봉 오르는 남설악 코스를 걷지, 큰돈 들여 먼 데까지 와서 별 볼거리도 없는 계단 지옥을 줄곧 오르고 있다니. 그러다가 짐이요, 하는 소리에 한쪽으로 비켜서며 이런 생각도 했다. 하긴 우리 대신 무거운 짐을 날라다 주는 포터도 있는데, 불평만 쏟아내선 안 되지. 

  그랬다. 작은 체구에 비쩍 마른 포터가 자기 몸의 두 배 가까이 되는 짐을 지고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보면 불평조차 사치였다. 주방 팀은 또 어떤가, 셰프 포함 스태프 모두 무거운 식기류와 식량 따위를 짊어지고 먼저 로지에 도착, 식사 준비를 마쳐놓고 일행을 기다리지 않는가. 불평 대신 그들에 대한 찬사와 감사를 쏟아내야 했다.


여행객 두 사람 몫의 짐을 져 나르는 포터들


  한편 이렇게 가이드, 포터, 주방 팀까지 대동한 채 단체로 산을 오르는 트레킹 방식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조선 시대 양반들이 노비를 앞세우고 금강산을 유람하던 모습과 무엇이 다르냐는 식이다. 가이드와 함께 단출하게 트레킹에 나서는 유럽인 중에 특히 그런 시선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다른 시각도 있다. 변변한 산업시설이 없는 네팔에서 적지 않은 일자리를 창출, 네팔 경제에 기여하고 있다는 측면을 강조하는 시각이다. 매년 네팔을 찾는 3만여 명 가까운 한국 관광객 중 대다수가 찾는다는 ABC 트레킹 덕분에 의식주를 해결하는 네팔인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반대로 험난한 여정을 함께하는 가이드나 포터가 없으면 ABC를 찾는 이들도 많지 않을 것이다. 결국 필요가 수요를 낳고, 수요에 부응해 공급이 이어지면서 경제가 돌아가고 삶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 상념에 잠겨 거의 무의식적으로 계단을 오르는데 뒤에서 갑자기 고함치듯 외쳤다. 벽 쪽으로 벽 쪽으로. 이어 딸랑대는 방울 소리와 함께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당나귀인지 노샌지 십수 마리가 떼 지어 올라왔다. 절벽 쪽에 서 있다 저들과 부딪치기라도 하면 영락없이 황천길이었다. 그래서 목청껏 외친 것이었다. 벽 쪽으로 벽 쪽으로.

  그러고 보니 이 길은 여행객들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 먼저 마을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드나드는 생활 도로, 그들에게 생필품을 전달하는 말이나 당나귀, 그리고 여행객 대신 짐을 져 나르는 포터들의 운송로였다. 그러니 그들이 우선이었다. 마을 주민, 포터, 당나귀나 노새 등등. 

  그들이 나타나면 여행객들은 재빨리 길을 비켜줘야 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도 빠르게 걸으니까. 힘든 이들에게 우선권을 주어야 하니까. 그게 규칙이며 예의니까. 

  아울러 내려서는 사람보다 올라가는 이들에게 우선권을 줘야 하는 것도 상식이었다. 무거운 짐 진 자가 올라오고 있다면 아무리 갈 길이 바빠도 잠시 멈춰서 양보해야 한다. 오르는 게 내려서는 것보다 훨씬 힘든 법이니까.

  안개 사이로 어둠이 저며들 무렵 마침내 오늘의 종착지에 도착했다. 아직 트레킹 시작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몸이 녹초였다. 이래서야 트레킹 완주가 가능할까?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우리 중 가장 체력이 좋은, 이미 EBC를 체험했던 친구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만큼 첫날 여정부터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우리와 비슷한 시간에 출발했음에도 한참 전에 도착해 식사 준비로 분주한 주방 스태프들을 보자 우리 엄살이 새삼 부끄러워졌다.     


촘롱의 로지에서 바라다본 마차푸차레 정상


가슴에 스며드는 풍광

  ABC 트레킹이 힘든 것은 가파른 오르막길과 먼 거리에 대한 두려움, 해발고도에 따른 산소 부족과 고산증세 같은 게 첫 번째 이유지만 열악한 환경도 한몫 단단히 한다. 

  얇은 판자로 만든 벽으로 인해 코 고는 소리는 물론 가만가만 속삭이는 소리까지 빠뜨리지 않고 전해지는 숙소, 수세식이라지만 결코 깨끗하다고 할 수 없는 화장실, 낡고 추레한 침대와 축축한 매트리스. 주변 환경에 예민한 이들이나 특히 여성 트레커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환경이나마 둘째 날까지는 2인실이라 나은 편이었다. 셋째 날부터는 방이 모자라 여러 명이 한 방에 묵는 불평하기 이를 데 없는 다인실을 사용해야 했다.

  다행인 건 아주 무딘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몹시 예민하지도 않은, 여간해서는 열악한 주변 환경으로 인해 잠을 설치거나 힘들어하지 않는 체질이었다. 이는 매일 빠뜨리지 않고 즐기는 반주 덕분이기도 했다. 낮술은 자제하는 편이지만 저녁을 곁들인 반주는 하루도 건너지 않고 즐기는데, 이게 단잠을 자는 비결이었다. 

  ABC 트레킹에서도 그랬다. 출발하기 전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팩 소주 4박스를 구매했으며 별도로 3홉짜리 소주도 여러 병 준비해 갔다. 그나마 벗들과 나눠 마시다 보니 술이 부족해 로지에서 럼주와 맥주, 네팔 전통주 락시까지 구매해 마셨다. 음주와 흡연이 고산증세를 불러온다며 말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트레킹이 끝날 때까지 나는 고산증세를 느끼지 못했다. 고도가 생각보다 낮아서 그랬을까?

  힘든 건 좌변기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오랜 습관으로 좌변기가 아니면 볼일 보기가 어려운 내게 로지 화장실은 최악이었다. 그나마 한두 개의 좌변기가 있어 다행이지만 묵는 이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변기 사용을 위해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게 고역이긴 했다. 대신 장점도 있었다. 일찍 일어난 덕분에 세상에서 처음 보는, 가슴으로 스며드는 풍광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었음이다.

  첫날 로지에서 마주친 마차푸차레가 그랬다. 전날 안개와 일찍 다가선 어둠으로 인해 눈치조차 채지 못했던 놀라운 풍광이 새벽에 방문을 열고 나온 나를 덮쳤다. 정말로 물고기 꼬리를 빼닮은 마차푸차레 정상이 검은 산등성이 뒤로 빼꼼히 고개를 쳐든 풍광은 반대편에 이어진 안나푸르나 남봉의 어깨선과 더불어 나를 황홀경에 빠지게 했다. 화장실을 찾는 것도 잠시 잊고 아직 잠들어 있는 아내를 흔들어 깨웠다. 여보 빨리 나와 봐, 천국이 여기였어.


여보 빨리 나와봐 천국이 여기였어를 외치게 한 기막힌 풍광 앞에서


  천국은 거기까지였다. 아침 식사 전에 짐을 꾸려놓고 식당에 가서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간단한 준비운동을 마친 후 이어지는 여정은 다시 지옥이었다. 이번에는 내리막 계단 지옥, 그나마 오르막보다 수월하지만 반갑지만은 않았다. 내려선 만큼, 아니 그 이상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촘롱(2,170m)에서 지누단다(1,780m)와 비슷한 높이까지 내려선 후 다시 시누와(2,360m)를 거쳐 도반(2,600m)까지 이어지는 길, 그나마 가슴에 스며드는 아름다운 풍광이 아니었다면 도중에 지쳐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아름다운 풍경 이전에 짚고 넘어갈 게 있다. 하긴 그것도 풍광의 하나라면 하나겠지만 걷는 내내 시선과 코를 자극하는 말이나 당나귀 배설물, 똥이었다. 먼저 다녀온 이들이 하나 같이 말하던, 동물의 배설물을 밟지 않고 ABC를 다녀온 이들은 없다던, 그 얘기. 사실이었다. 오래되어 푸석푸석한 지푸라기 같은 것부터 방금 싸질러놓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까지. 사방이 똥 천지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처음엔 보기만 해도 역하고 냄새까지 고약하더니 하루 이틀 지나니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차마 못 볼 걸 보았다는 듯 비명을 지르던 여성 트래커들도 금세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보고도 그러려니 한다. 본래 그곳에 있었던 것이려니, 하나의 자연 풍광이려니, 사는 게 다 그런 게 아니려니, 그것도 추억이려니, 여기까지 왔으니 보지 언제 또 보려니.     


돌리는 것만으로 불경을 읽은 것으로 쳐준다는 마니차 뒤로 설산이 보인다


날씨 요정의 실체

  ABC 트레킹에 나서면서 가장 우려한 것은 날씨였다. 앞서 ABC를 다녀온 지인이 9월까지 이어진 우기가 10월에도 이어질지 모른다면서 단단히 채비하라는 당부와 함께 자신이 겪었던 경험담을 털어놓았는데, 그중 가장 끔찍한 건 거머리에 대한 것이었다. 물려도 가렵지 않아 피를 한 동이나 흘려야 자각한다는 말에 아내와 여성 대원 모두 몸서리를 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나섰다. 내가 누군가. 날씨 요정 아닌가. 비는 오지 않을 것이다. 오더라도 우리가 점심을 먹거나 숙소에 도착해 짐을 푼 이후에 잠깐 씩 내릴 것이다. 그러니 절대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이미 아버지께 연락해 놓았다. 하면서 하늘을 가리키는 나를 온전히 믿는 일행은 물론 없었다. 그저 밑져야 본전이니까 하는 표정 정도.

  물론 나 역시 스스로 믿고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내가 무속인도 아니고 사이비 교주도 아니고, 내게 그런 신통력이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위안 삼아 한 소리였다. 그리고 그걸 모를 일행도 아니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날씨가 내 말대로, 딱 내가 말한 대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밤부에 도착, 점심을 들 때였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식사할 때만 비가 내릴 것이다. 여기까지는 내 말이 맞는 듯했다. 그러나 식사 시간이 끝나 출발해야 할 시간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삽시간에 나의 날씨 요정 주장이 무색해졌다.

  일행은 모두 우비를 챙겨 입는 둥, 배낭 커버를 씌우는 둥 요란하게 출발 준비를 했다. 나는 곧 비가 그칠 것이라면서 굳이 우비를 챙겨 입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스스로 믿어서가 아니라 밀려드는 민망함을 모면하기 위해 억지를 부린 셈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는 게 아닌가. 밤부를 출발한 지 100m도 안 된 지점에서. 다시 큰소리가 나왔다.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누굽니까? 날씨 요정 아닙니까? 비 금방 그친다니까 말을 안 듣고 유난을 떨다니요. 

  그날 이후 일행들은 하늘을 올려다보기 전에 내게 날씨를 물어보곤 했다. 요정님 날씨가 어떨 것 같습니까? 비가 내리지는 않겠죠? 나는 내키는 대로, 아니 내가 바라는 대로 답해주곤 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말은 현실이 되곤 했다.


밤부에서 도반으로 오르는 길, 날씨가 맑게 개었다


  기적도 아니고 날씨 요정도 아니었다. 본래 이맘때면 그런 날씨인 듯했다. 오전에는 대체로 맑고 오후에 접어들 무렵 한 차례 스콜처럼 비가 지나가고 저녁에는 대체로 흐리고. 물론 이러한 규칙도 기계적인 건 아니라서 편차는 있기 마련인데, 용케 나의 예언(?)이 오차 범위에 들면서 졸지에 날씨 요정이 되고 만 것이었다. 우연도 한두 번 거듭되면 필연이라 믿는 세태 덕분이랄까? 하여튼 결코 내 덕은 아니었으나 우연이 거듭되면서 좋은 날씨가 이어진 것은 다행 중 다행이었다.

  밤부를 지나 도반에 이르는 길은 숲길이었다. 비 내리는 날이면 거머리가 출몰한다는 그 길. 덕분에 비가 그쳤음에도 아내를 비롯해 여자 회원들은 우비를 벗지 않았다. 조금 전 내린 비가 거머리를 불러들였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건기에 접어든 마당에 거머리가 어디 있겠냐며 날씨 요정이 책임진다고 큰소리를 쳐도 우비를 벗지 않았다. 눈앞의 신뢰할 수 없는 날씨 요정의 말을 믿느니 뵈지 않는 거머리를 조심하는 게 우선이지 싶은 모양이었다. 마침내 광활한 평지가 나와서야 우비를 벗어 들었다. 거머리처럼 굵은 땀방울이 그네들의 몸을 흠뻑 적신 후였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의 최종 목적지 도반에 도착했다. 오후 4시경이었다.      


내내 화창했던 날씨가 이번 트레킹의 주인공이었다


그렇게 3,000m를 넘어

  도반 숙소(Annapurna Approach)는 쾌적했다. 튼튼한 콘크리트 벽이 옆방 소음을 완벽히 차단해 주었고, 2인실임에도 침상이 3개라 짐을 풀고 싸기 편했다. 와이파이며 충전기 이용 비용이 촘롱보다 100루피씩 비싸진 건 높아진 고도 때문이라고 했다. 전력은 태양광을 이용해 생산하는데 고도가 높아질수록 생산할 수 있는 전력량이 적어져 비싸진다는 설명이었다. 데우랄리, MBC, ABC로 고도가 높아질수록 비용도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술값도 비슷한 비율로 높아졌다.

  그래도 저렴한 편이었다. 운송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말이나 당나귀도 밤부까지만 오를 수 있다니, 그 무거운 짐을 오로지 사람이 져 나른 걸 생각하면 맥주 한 병에 몇만 원을 받아도 저렴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맥주 한 병에 5,000~8,000원 사이니까 네팔 물가를 생각하면 비싸 보이지만 고도를 생각하면 결코 비싼 게 아니었다. 덕분에 양껏 마시진 못해도 적당히 취할 만큼은 마실 수 있었다.

  트레킹 도중 만난 로지 중 시설이 가장 좋았던 도반에서 하룻밤 푹 쉰 후 데우랄리로 향했다. 데우랄리는 해발 3,200m로 ABC 트레킹에서 처음 3,000 고지를 밟는 곳이었다. 그러나 도반에서 데우랄리까지는 거리가 5km밖에 안 돼 반나절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튿날 MBC를 거쳐 ABC에 이르는 길이 길고 험해 하루 쉬어가는 코스와 같다고 가이드가 덧붙였다. 


산정에서 여러 갈래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절벽폭포


  실제로 데우랄리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조금 넘는 시간이었다. 도반에서 8시에 출발했으니 4시간여 만에 도착한 것이었다. 쉬어 가는 코스답게 쉬엄쉬엄 올라왔는데도 그랬다. 까마득한 절벽 위에서 수십 갈래로 갈라져 흘러내리는 절벽폭포의 매력에 빠져 수 없이 셔터를 눌러대다가, 맛이 일품이라 반드시 마셔야 한다는 히말라야 카페 카푸치노도 마시고, 숲을 지나며 야생 원숭이를 찾으려고 연실 두리번거렸음에도, 그랬음에도 시간이 남았다. 


뛰어난 커피 맛으로 유명한 히말라야 카페겸 로지


  데우랄리 로지에 도착하기 바로 전, 로지가 빤히 올려다보이는 곳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붙은, 추모 패 앞에서 잠시 묵념을 올렸다. 지난 2020년 1월 17일 오전 충남지역 교사들로 꾸려진 네팔 해외 교육봉사단원 중 9명이 가이드와 함께 ABC 트레킹에 나섰다 하산하던 길에 눈사태를 만나 실종된 4명을 기리는 추모 패였다. 초등학생들도 다닐 정도로 편한 길에서 갑작스러운 기상악화로 끝내 돌아오지 못하게 된 분들을 기리며 아무리 쉬운 길이라 해도 조심 또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네팔 교육봉사 중 트레킹에 나섰다가 기상악화로 영면에 든 이들을 기리는 추모 패


  너무 일찍 도착한 터라 점심을 먹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사방이 산이라 산책하기도 그렇고 주변에 볼거리도 없었다. 이럴 것이면 서너 시간 더 걸어 MBC 로지에서 묵는 것도 좋았으련만, 이미 짜놓은 계획이 있으니 그것대로 움직일밖에. 하릴없이 식당에 앉아 벗들과 수다를 떨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주방 쪽에서 유창하지만 어딘지 억양이 어색한 한국말이 들여왔다. 중저음 멋진 목소리 주인공은 데우랄리 로지 사장이었다. 알고 보니 한국에서 10여 년 동안 일해서 번 돈으로 네팔에 돌아와 이곳에 로지를 차렸다고 한다. 그가 바로 말로만 듣던 코리안 드림의 주인공이었다.

  해발이 높은 곳이라 어둠이 금세 찾아왔다.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 8인실이 배정되었다. 도반을 끝으로 2인실 사용은 불가능할 것이라더니, 가이드 말대로였다. 여성 4명도 한방에서 묵어야 했다. 하나 남은 2인실은 타인과 함께 묵는 게 불편하다며 카트만두 호텔에서도 비용을 더 지불하고 1인실을 사용했던 분과 나머지 한 명이 배정받았다.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되기 전 비레탄티에서 점심을 먹으며 자기소개를 통해 낯을 익혔다지만 다인실 사용은 모두를 불편하게 했다. 그렇다고 피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불편하더라도 참아야 했으며, 가능하면 타인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게 상식이고 삽시간에 왕따가 되지 않으려면 조심하는 게 상책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코골이였다. 다른 사람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평소 심한 편은 아니지만, 몹시 피곤한 날이면 수면을 방해할 정도라는 나의 코골이 얘기다. 계단 지옥을 오른 첫날 아내는 내 코골이 때문에 잠을 설쳤다고 다음 날 아침 불평을 털어놓았다. 말이 없어서 그렇지, 아마 옆방에서도 내 코골이 때문에 불편했던 이가 있었을지 모른다. 

  다행히 도반 로지에서는 내가 코를 골지 않아 모처럼 숙면에 들었다고 아내가 그랬다. 도반에서 데우랄리에 이르는 코스는 거리도 짧고 오르막도 가파르지 않았으나 코를 골지 않을 수도 있다는 기대를 품고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참말 다행인 건 내가 코를 골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며칠간 이어진 피로 때문인지 아침에 일어나니 모두 잘 잤다고 한다. 그렇게 3,000m에서의 내 생애 첫 밤이 지나갔다. 그리고 오늘 밤은 해발 4,000m 고지에서 잠들 것이었다.     


데우랄리 로지 벽면에 그려진 ABC 트레킹 개념지도



그대로 산이 된들

  새벽에 일어나니 일행 중 하나가 제안했다. 식전에 컨디션 조절 차원에서 한 시간만 걷자는 것이었다. 잠시 후 걸어갈 길이 어떤지 살펴볼 겸 뒤를 따랐다. 금세 후회했다. 높아진 고도 탓인지 얼마 걷지도 않아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실감 났다. 고도가 높으면 산소가 부족해진다더니 정말 그렇구나 싶었다. 결국 10여 분 만에 발길을 돌리자고 했다.

  데우랄리에서 ABC까지는 3,200m에서 4,130m로 900m 이상 고도를 높여야 하고 거리도 제법 되는 코스로 가장 힘든 코스 중 하나였다. 새벽에 걸어보고 잔뜩 겁을 먹은 채 길을 나섰는데, 막상 걸어보니 크게 힘이 들지는 않았다. 새벽에는 그냥 컨디션이 안 좋아 힘들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었고 오르막은 완만했다.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를 배경으로 한 컷

  

  그래서였을까? 거대한 마차푸차레가 코앞인 듯 다가서는 MBC에 도착했을 때는 10시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코스가 짧다 하여 오는 도중 염소들을 방목하는 곳에서는 한참을 머물며 기념사진도 여러 컷 찍었는데도, 그렇게 쉬엄쉬엄 올라왔는데도 그랬다. 

  이른 시간이지만 벌써 점심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직 아침 먹은 것도 소화되기 전이지만 계획된 일정이라니 따를밖에. 다행히 파스타와 카레를 곁들인 식사는 맛있었다. 

  그렇게 든든히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날씨는 화창하고 주변 풍경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가까운 마차푸차레는 물론 저 멀리 북쪽으로 안나푸르나 산군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오는 듯했다. 트레킹에 특화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 하나라는 길을 걷는 동안 모든 게 완벽해 보였다. 멀리 ABC가 얼핏 보였다 사라진 낮은 언덕에 올라서기까지는.

  이후 상황은 이미 앞에서 기술한 그대로였다. 갑자기 찾아든 안개가 풍경을 향해 열려있던 문을 닫아걸더니 세상을 지워버렸다. 덕분에 일행들 기분도 끝없이 침잠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우울감에 가위라도 눌릴 지경. 그러다 문득 세상이 열리고 압도하는 풍광, 가슴이 터질 듯한 벅찬 감동. 그렇게 연인 사이라도 되는 양 서로를 밀고 당기는 사이 어느새 정이 들고 말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ABC에 푹 빠져버린 일행 모두 그랬다. 

  가왕 조용필의 노래 한 구절,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곳 킬리만자로 오늘도 나는 가리 배낭을 메고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아 내려가기 싫다. 여기서 살아도 되겠다. 여기서 살다가 그렇게 산이 되어도 좋겠다.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목전에 둔 일행의 환호하는 모습


  하지만 마음뿐이지, 산이 아무리 좋아도, 안나푸르나 트레킹이 인생 최고의 버킷리스트라 해도 진짜로 산이 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러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진짜 멋진 여행은 집으로 돌아가서 완성되는 법이니까. 역시 모두가 그랬다. 이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하는 마음과 이제는 서둘러 내려가야지 하는 마음, 안나푸르나의 일출을 감상하는 동안에도 이미 마음은 하산을 서두르고 있다.

  만만한 길이 아니었다. 당장 ABC를 출발해 MBC를 거쳐 데우랄리, 도반을 거쳐 밤부까지 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장장 14km, 거의 이틀에 걸쳐 올라온 길을 한나절 만에 내려서야 한다. 

  다음 날은 10km로 다소 짧은 거리이지만 보다 험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밤부에서 시누와, 촘롱을 거쳐 지프에 탑승하는 지누단다까지 끝없이 오르고 내리는 공포의 계단 지옥 코스. 일행 중 일부는 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헬기를 부르네, 밤부에서 말을 타고 내려가네, 의견이 분분하다. 이들 모두와 본격적인 안나푸르나 트레킹 시점이었던 지누단다를 거쳐 나야풀, 그리고 포카라에 무사히 도착해야 마침내 여정의 끝이 보이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 하나라는 ABC 가는 길


집으로 가는 길

  하산길은 편안했다. 마음도 편안하고 길도 편안하고 날씨조차 화창하다. 그런데 가이드 아카쉬의 표정이 어둡다. 어디 아프냐고 물어봐도 그저 얼버무릴 뿐이다. 데우랄리에서 점심을 먹고 히말라야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 후 오늘 묵을 밤부 로지에 도착해서도 그랬다. 저녁을 먹으면서 잠시 가진, 감사의 마음을 모은 팁을 전달하는 동안에도 아카쉬의 표정은 내내 어두웠다. 얼굴은 웃고 있으나 눈은 울고 있는 듯 보였다.

  다음 날 아내의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아카쉬 여동생의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사흘 전인 도반에서 묵던 날 밤에 소식을 전해 들었으나 트레킹을 이어나가기 위해 비밀로 했다가 간밤에 홀로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후배 가이드에게 물어 알았다고 했다.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전에 또 다른 해프닝이 발생했다.

  트레킹 이틀째, 밤부에서 점심을 먹을 때 일행 중 일부가 하산할 때 말을 타고 싶다고 했었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실제였다. 일행 중 4명이 밤부와 지누단다를 오가며 다친 사람이나 힘들어하는 여행객을 태워주는, 말을 활용한 운송 시스템을 실제로 이용한 것이었다. 새벽 4시에 이른 조식을 하고 5시에 하산을 시작한 일행을 배웅하던 4명은 7시쯤 출발할 것이라 했다. 그래도 걷는 것보다 두 시간 먼저 하산할 것이라 가이드가 덧붙였다. 


그대로 산이 된들 어떠랴 싶은 ABC 트레킹이었다


  시누와를 거치고 작은 줄사다리를 지나 촘롱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동안에도 말을 탄 일행은 우릴 앞서 가지 않았다. 촘롱을 지나 하산하는 도중에도, 마을 아래 나마스테 로지에서 비빔국수로 배를 채울 때도 말은커녕 당나귀 한 마리 못 보았다. 식사 후에야 들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과 때맞춰 겹친 감기로 힘들어하는 아카쉬로부터 말을 탄 일행이 아직 시누와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이 문제였다. 아니 마부가 문제였다. 4명을 태운 4마리의 말을 부자지간인 2명의 마부가 부리는데, 말이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했다.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길에서 벗어나 풀을 뜯거나 딴청을 피운다는 것이었다. 참다못해 일행 중 한 사람은 말에서 내려 걸어오고 있다고도 했다. 말이 말을 안 들어 말썽을 일으킨 것이었다. 덕분에 걸어서 내려온 10명의 일행은 기약 없이 기다리게 되었다. 아울러 포카라 관광지 방문 계획도 사라지게 되었다.

  내가 제안했다. 4명은 나중에 천천히 오시라고 하고 이미 내려선 일행 먼저 지프를 타고 나야풀에 가서 기다리자고. 하긴 나야풀에 간다고 뭐 볼거리가 있는 건 아니지만 먼저 가서 맥주나 한잔 기울이면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일행 모두 찬성이었다. 가이드도 좋다고 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이 시작되는 나야풀 전경


  오후 5시가 다 되어서야 말을 이용했던 일행이 나야풀에 도착했다. 멋쩍은 표정으로 미안함을 대신하는 일행을 보고 낯을 찌푸리는 사람은 없었다. 포카라 시내 관광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쉽기는 했으나 그들도 원해서 그런 게 아니었으니 인상 쓸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미안하다 한마디 했으면 좋았을 텐데, 끝내 사과의 말은 없었다. 덕분에 그동안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어색한 침묵으로 이어졌음에도.

  어쨌든 7박 9일간의 ABC 트레킹을 무사히 마치고 건강하게 귀가하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오랜만에 포카라 5성급 Fish Tail Lodge에서 멋진 저녁 식사를 즐기고 편안한 밤을 보내게 된 것도 행복이었다. 그 행복을 생각하니 가족을 잃은 가이드 아카쉬의 슬픔이 더욱 커 보였다. 원정대 친구들에게 작은 성의라도 표하는 게 어떠냐 물었다. 모두 흔쾌히 동의하더니 지갑을 열었다. 아주 작지만 그래도 나눌 수 있어 더욱 행복한 밤이었고 아름다운 여행이었다. 여행의 최종 목적지였으나 집으로 가는 길의 첫 출발지였던 안나푸르나, 그렇게 끝에서 다시 시작이 되는 안나푸르나 트레킹이 마무리되었다.       


끝이 다시 시작이 되는 안나푸르나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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