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따위 신봉하지 않지만
다시 백운대에 서서
오랜만에 북한산 백운대에 올랐다. 내가 다시 산을 찾기 시작한 2000년 이후 자주 올랐던 곳이었다. 처음 몇 해 동안은 거의 북한산만 찾았다. 백운대가 아니더라도 좋은 코스가 많아 자주 찾아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러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이름난 산들을 찾다가 안내산악회 따라 전국 명산을 오르면서 횟수가 줄어들었다. 특히 백운대는 2019년 12월 100대 명산 완등을 위해 오른 이후 이번이 처음이었다.
1983년 4월 15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북한산 정상이기도 한 백운대(836m)는 서울 소재 산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북한산의 다른 이름인 삼각산의 나머지 두 봉우리인 인수봉(810m)과 국망봉(만경대, 800m)처럼 특별한 장비와 기술 없이는 산행이 어려운 화강암 덩어리지만 1927년 일제에 의해 철제 난간이 설치되면서 일반 등산객도 쉽게 정상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서울시 북부와 경기도에 걸쳐있는 북한산국립공원은 우이령을 중심으로 남쪽의 북한산 지역과 북쪽의 도봉산 지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도심 속 자연공원이다. 접근성이 좋아 연평균 탐방객이 2009년 기준 865만 명을 기록하기도 했다. 코로나19 시절에도 800만 명 넘게 찾은 산으로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북한산 중에서도 백운대는 서울시민들은 물론 전국의 등산애호가들로부터 최고로 사랑받는 봉우리다. 그런 만큼 사시사철 등산객들로 붐빈다. 모처럼 백운대를 찾았던 날도 위문에서 백운대를 오르는 등산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러나 예전에 비하면 이 정도는 양반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정체가 심했던 구간에 교차 통행이 가능하도록 계단을 설치하면서 시간이 크게 단축되었다. 심한 경우 한 시간 이상 걸리던 것이 10여 분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정상 올라서니 시원한 바람과 함께 장쾌한 조망이 반겨주었다. 아 이 맛이야, 땀 흘리고 올라온 보람이 있네, 그래 바로 이 기분에 산을 타는 거지. 우리 일행뿐 아니라 펄럭거리는 태극기가 인상적인 백운대 정상에 서서 사진을 찍는 이들, 그 아래 너른 테라스에 앉아 쉬고 있는 등산객들 모두가 비슷한 표정이었다. 뭔가 이뤘다는 성취감과 그에 따른 행복한 느낌으로 충만한, 환한 얼굴들.
백운대 정상에서의 조망은 참으로 멋지다. 남쪽으로는 만경대 능선과 오른쪽의 노적봉, 그리고 그 너머 의상봉 능선이 산수화를 연상시키고 서북쪽으로는 염초봉과 원효봉이 짜릿한 암릉미를 선사한다. 날씨가 좋은 날엔 한강이 코앞인 듯 다가서고 김포, 강화도가 손에 닿을 듯하다. 원주 치악산과 설악산 대청봉과 점봉산도 조망된다고 하는데, 시력이 약한 나는 안타깝게도 보지 못했다.
백운대 조망 중에서 유독 내 시선을 사로잡는 건 손을 내밀면 잡힐 듯 다가서는 인수봉이다. 대학 신입생 시절 동아리 친구를 따라 멋모르고 올랐었는데,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이후 도봉산 선인봉을 오르다 다시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아예 산을 멀리하게 되었다. 2000년 이후 다시 북한산을 찾았으나 인수봉이나 선인봉 등반은 꿈도 꾸지 않았다. 무모한 도전을 시도하기엔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할까? 나보다 늦은 나이에 암벽등반을 시작하는 이들도 적지 않으니 꼭 그런 것도 아니지만.
동문 등반대회의 치욕
그렇게 멀어졌던 북한산을 다시 찾은 것은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 2000년 봄 우이동에서 열린 고등학교 동문 등반대회에 참가한 것이 계기였다. 우리 나이로 네 살이 된 늦둥이 딸과 함께 참가한 등반대회는 야유회 성격이 짙었다. 동문과 가족의 많은 참가를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주말 오전 10시쯤 모여 산행은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흉내만 내고 12시를 전후하여 호텔 내 행사장에 다시 집결, 식사와 함께 음주와 가무를 즐기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예 오전 산행엔 참가하지 않고 점심시간에 맞춰 행사장으로 직접 오는 동문도 적지 않았다.
내가 늦둥이 딸을 동반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동문회에서 보내온 서신에 첨부된 등산 안내도를 보니 행사장이 있는 그린파크 호텔과 우이암을 왕복하는 산행코스는 거리도 짧고 쉬워 보였다. 슬렁슬렁 걸어도 두 시간이면 충분해 보였다. 산행 도중 딸이 힘들어하면 등에 업고 내려와도 무방해 보일 정도였다.
아니었다. 막상 등산을 시작하자 얘기가 달라졌다. 평소 자주 만나왔던 동기들, 몇 차례 참여했던 동문 행사에서 얼굴을 익힌 선후배들과 함께 산행 들머리인 우이암 매표소를 통과할 때만 해도 걸을 만했다. 그러나 매표소를 지나 오르막이 시작되자마자 내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다지 가파르지도 않고 평지 같은 오르막이었는데. 내가 이 정도 저질 체력이었단 말인가?
그랬다. 거의 아장아장 걷는 수준이었지만 늦둥이 딸아이도 올라가는 길이 인수봉 올라가는 암벽처럼 느껴질 만큼, 저질 중 저질 체력이었다. 가파른 바위 계단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는 딸아이를 따라 오르막을 지나고 마침내 평탄한 능선에 접어든 순간, 핑하고 현기증이 왔다. 동시에 100kg 가까운 내 몸이 철퍼덕 길 위에 나자빠지는 느낌이 온몸을 강타했다. 그리고 보았다. 놀라서가 아니라 신기해서 그런다는 듯 말갛게 쳐다보는 딸아이의 동그란 눈동자.
카노사의 굴욕, 아니 우이암 능선에서의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순간 들었던 생각들. 진작 살을 뺐어야 했는데, 진짜 이러다 딸아이 결혼식에서 손도 잡아주지 못하는 거 아닌가, 고작 마흔 살에 이런 치욕을 맛보는 게 정상인가, 나만 그런가 다른 친구들은? 모두 멀쩡한 건 아니었겠으나 나처럼 퍼진 동문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의 수치심과 절망감이라니.
결국 코스를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행사장에 돌아와 거나하게 뒤풀이까지 마친 후 집에 돌아왔지만, 귀가 후에도 산행에서의 충격은 가셔지질 않았다. 정말이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런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망가졌단 말인가. 몸을 씻으며 새삼 몸매를 살피니 체형 자체가 가관이었다. 40인치가 넘는 허리, 인수봉처럼 솟구친 배, 서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가는 다리.
그래서 다짐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남들만큼은 아니더라도 내 수준에 맞는 운동을 시작해 체력을 다져야겠다. ‘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따위를 신봉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선 울컥대는 자괴감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보였다.
마침 이사 간 집 근처에 고등학교 운동장이 있는데, 주민을 위해 새벽에는 개방해주었다. 매일 나가 뛰었다. 아니 걸었다. 한 바퀴만 돌아도 숨이 턱에 차 달리기 어려웠다. 그래도 매일 나갔다. 달리지 못해도 나갔다. 나가기만 하면 체력이 저절로 돌아올 것처럼. 그러다 잘 뛰는 친구에게 물었다. 뛰다 힘들면 어떻게 해야 하냐? 그냥 쉬었다가 다시 뛰어. 그렇게 했다. 점차 뛰는 거리가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