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올해 첫 아이스커피를 마시다
남편은 요즘 출근할 때와 퇴근할 때 옷차림이 다르다. 아침에는 재킷을 챙겨 입고 나가지만 오후 3시에 퇴근할 때면 재킷이 손이 들려 있다. 금요일 퇴근길에도 변함없이 재킷이 손에 들려 있었다. 현관과 가까운 욕실로 가서 손을 먼저 씻고 마스크를 벗는데 얼굴이 약간 빨갛다.
"오늘 정말 덥네. 내일 토요일에는 더 덥다던데."
토요일 아침, 나를 맞는 거실 공기가 평소와 사뭇 다르다. 보통 아침에 일어나면 난방기 온도를 20도까지 올리고 난방을 시작한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다. 일기예보에서 오늘 한낮의 기온이 28도까지 오른다더니 아침부터 실감 난다. 평소에 비하면 10도 가까이 올라간 셈이다. 안 그래도 여름 티셔츠를 좀 사야 할 것 같았는데 날씨까지 쇼핑을 부추긴다. 집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쇼핑몰에 갔다. 마스크를 쓰고 쇼핑몰을 돌아다니는 건 일 년이 넘어도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다. 빠른 속도로 쇼핑을 하고 마지막으로 버거킹에 들렸다. 며칠 전부터 햄버거가 먹고 싶었다. 나에게는 여름옷보다 햄버거가 더 중요한 오늘의 쇼핑이다. 햄버거와 감자튀김, 치즈 바이트까지 포장해 와서 Ama와 함께 셋이서 조금 이른 점심을 먹었다. 오랜만에 빅맥 큰 사이즈 하나를 다 먹으니 기분 좋은 것도 잠시고 배가 너무 부르다. 엊그제 Ama가 사 오신 아몬드 케이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점심 커피는 공원 산책을 하고 카페에서 마시기로 했다. 집 근처에 커다란 공원이 있다. 우리 집이 점점 더 좋아지는 이유다. 밖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은 날에 걷는 우리 나름의 산책 루트가 있다. 공원을 가로질러서 트램 라인이 나올 때까지 걷다가 다시 레일을 따라서 한 카페가 나올 때까지 걷는다. 카페 이름은 월 스트릿(Wall street). 내가 아는 월 스트릿과 무슨 연관이 있나 생각해보지만 전혀 모르겠다. 어쨌든 이 카페는 우리 산책의 전환점이자 휴식처다. 차도에 인접하고 있지만 오가는 차는 많지 않고 야외 테이블 가격도 넓어서 좋다.
"뭘 마실 거야?"
2~3년 전만 해도 스페인에서 마시는 커피는 무조건 카페 콘 레체였다. 스페인에서 살기 시작한 뒤로는 얼마나 배가 부르냐에 따라 다르다. 물론 단순히 그 날 기분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보통 카페 콘 레체, 코르타도, 에스프레소 중에서 고른다. 오늘은 남편도 나도 둘 다 코르타도를 선택했다. 그리고 물 한 병과 얼음도 주문했다. Ama는 초코 라테를 드시고 싶어 하셨는데 여긴 없다고 한다. 결국 평소대로 루이보스를 주문하셨다. 얼음 하나를 Ama의 찻 잔에 넣어 드렸다. 그리고 내 커피 잔에 설탕 한 봉지를 다 넣고 티스푼으로 휘휘 저었다. 어느 정도 설탕이 녹은 것 같다. 이젠 코르타도를 얼음이 든 컵에 부었다. 얼음 잔을 주문한 이유가 다 있었지. 공원을 걸으면서 이 순간을 기다렸다. 한 모금 마시니 내가 더 기특해진다. 설탕이 봉지째 들어간 달고 단 아이스 라테다. 이런 맛을 나만 알 수 없지. 남편에게도 한 모금 권한다. 한사코 거절하더니 못 이기는 척 한 모금 마신 다큰 눈이 더 커진다.
"맛있지?"
올해 첫 아이스커피다. 야외에서 아이스커피를 마시니 정말 봄과 여름 사이에 있는 기분이다. 한 여름에는 너무 더우니까 아이스커피를 주문해도 순식간에 마셔버리게 되는데 지금은 차가운 커피 잔, 시원한 바람, 적당한 햇살을 천천히 느끼면서 마신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 사이에 참 많은 것이 달라졌다. 지난주 일요일에도 이 카페에 와서 커피를 마셨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포켓 드로잉북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바람도 많이 불고 추워져 일찍 일어나야 했다. 오늘 우리가 앉은 테이블은 지난주 테이블은 아니지만 내가 앉는 방향은 비슷하다. 드로잉북을 가방에서 꺼내 지난주에 그리다 만 그림을 이어서 다시 그린다. 검은색 펜 하나로 그리는 그림이지만 내 눈에는 파란 하늘이 들어오고 낡은 교회의 하얀 벽은 햇살로 빛난다. 테이블 옆 커다란 나무와 건너편에 나무들, 다양한 초록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린다. 손에 든 건 검은색 펜 한 자루지만, 그림 그리면서 하는 관찰은 수채 물감 팔레트를 가졌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를 에워싼 주변을 관찰하고 각기 지닌 모양과 색을 바라본다. 색상은 표현할 수 없지만 라인을 따라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밝고 어두움만이라도 표현해 본다. 이렇게 관찰하면서 그림으로 기록한다. 이렇게 남은 일상의 흔적은 미처 내가 그릴 지 못하는 많은 이야기를 포함한다. 그래서 미완성으로 남거나 망친 듯한 이상한 드로잉이라도 우리의 시간을 좀 더 뚜렷하게 기억할 수 있게 해 준다. 어제는 첫 아이스커피를 마신, 정말 초여름 같은 날씨의 토요일이었다.
"앞으로 이런 좋은 날씨가 계속될까?"
"아니, 내일 오후에 비 온데. 그 뒤로 일주일은 계속 비 온다지?"
속을 뻔했다. 여름 예고편 같은 토요일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