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9
하루 차이지만 어제 날씨와는 정말 다르다. 아침부터 흐리더니 비도 조금씩 내렸다. 앞으로 일주일간은 비슷한 날씨가 계속될 거라고 한다. 여름이 오려면 아직 시간이 있으니 봄을 충분히 잘 즐기라는 소리로 들린다. 건조한 남부와는 달리 내가 사는 북부 스페인은 비가 자주 온다. 특히 봄이 그렇다. 그래서 나무도 많고 푸르다. 십 년도 더 전에 첫 스페인 여행을 했다. 영국에서 어학연수를 하면서 어학원 휴가 때 그동안 못 가본 스페인을 열흘 정도 여행했었다. 마드리드에서 남쪽 안달루시아 지방을 가는데 기차는 비싸서 저렴한 버스를 타기로 했다. 버스 창문 밖으로 펼쳐진 붉은 들판이 너무나도 생소했다. 올리브 나무만 가끔 보인다. 마드리드에서 세비야로, 코르도바로 말라가까지. 봄인데도 눈이 부셨고 너무 해가 뜨거워서 한낮에는 돌아다니가 힘들었다. 여행 관련 영상이나 책에 자주 등장하는 스페인은 태양의 나라, 바로 그 이미지다. 하지만 지금 나와 인연이 된 스페인은 전혀 다르다. 한국에 비해서 햇살이 좀 강한 편이긴 하지만 비도 자주 오고 눈도 무엇보다 계절마다 다양한 초록을 볼 수 있다. 익숙한 풍경이다. 바스크 지역을 차로 이동하다 보면 강원도 어느 지역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사는 비토리아 가스테이즈에는 그린시티라는 별명답게 공원이 많다. 정원이 없는 공동 주택에 살지만 걸어서 5분 거리에 매우 넓은 공원이 있다. 특별한 건 없어도 우리 집을 좋아하는데 공원에 나가면 공원 때문에 우리 집이 더 좋아진다. 주변에 높은 건물이라고 해봤자 10층 정도 되는 아파트 건물이 전부고 공원 자체가 정말 넓다. 게다가 수많은 커다란 나무와 넓은 풀밭이 곳곳에 있다. 분수대도 있고 놀이터도 있고 피크닉을 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봄이라 꽃나무에는 꽃들이 만발하고 풀밭에도 누가 팝콘이라도 뿌려 놓은 듯 하얀 들꽃이 한가득이다. 집 앞 공원에만 나가도 묵직한 초록 한 다발을 선물 받는 기분이다. 내가 사는 스페인은 그렇다.
공원은 사람뿐만 아니라 개에게도 소중한 휴식처이자 놀이터가 된다. 봄날 산책을 나온 사람과 개가 역시나 많았다. 풀숲이 이상하게 흔들리기에 가만히 쳐다보니 유독 다리가 짧은 갈색 개 한 마리가 온몸으로 뒹굴며 놀고 있다. 나는 개를 무서워하는 편이라 커다란 개들이 산책을 나오면 긴장부터 한다. 그래도 좀 거리를 두고 개가 노는 장면을 보니 내가 다 마음이 즐겁다. 저리 좋을까? 목줄이 보인다. 길게 늘어진 목줄은 야구모자를 쓰고 파란 스웨터를 입은 아저씨 손에 주어져 있다. 흥겨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장난치는 개와는 달리 아저씨는 미동하나 없다. 가만히 자신의 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놀고 싶은 만큼 실컷 놀아. 네가 하고 싶은 건 다 하라고 얼마든지 기다려주겠다는 담담한 배려. 우리는 그 곁을 스쳐 지나가지만, 나는 시선을 빼앗겼다. 기록하고 싶은 장면이다. 핸드폰을 꺼내서 급하게 메모를 했다.
잔디밭에 다리가 짧은 개 한 마리.
목줄을 충분히 길게 잡고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파란 스웨터를 입은 아저씨.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핸드폰에 저장해둔 메모를 읽고 내가 본 장면을 기억하면서 드로잉북에 간단하게 그렸다. 내 기억에는 한참 못 미치는 그림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래도 괜찮다. 요즘 글 쓰는 연습을 하느라 드로잉북을 좀 등한시했다. 내 그림을 보니 사진으로 찍어놓고 보고 그렸으면 더 좋았을 텐데 생각해본다. 하지만 사진을 찍기에는 그들과 나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방해하고 싶지는 않다. 기억하고 싶은 모든 것을 사진으로 남기려면 용기도 좀 필요하다. 쑥스러움이 많은 나는 부족하지만 짧은 글과 부족한 그림으로 그 장면을 기억한다. 오늘처럼.
더드로잉핸드 The Drawing Hand
그림 그리는 삶.
현재 스페인에서 새로운 일상을 만드는 중.
인스타그램 : http://instagram.com/thedrawinghand.viva
유튜브 : http://youtube.com/thedrawingh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