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쌓인 아침에 생긴 일
진정한 봄이었다. 분명 일주일 전만 해도 그랬다. 날씨가 정말 좋아서 평생 생각도 않던 등산도 다녀왔고 그 분위기에 취해 공원에 가서 그림까지 그렸다. 봄이 코 앞까지 왔는데도 더 이상 게으를 수 없다며 새해 다짐을 할 때보다도 강하게 선언했다. 하지만 그 뒤로 일주일 동안 어제보다 조금씩 매일 추워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일기예보에서는 주말에 눈이 올 거라고 했다. 이렇게 화사한 봄에 눈이라니 예보를 믿기는 어려웠다.
4월 1일 금요일 아침, 거짓말처럼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설마 금방 그치겠지."
잠시 뒤 아침 해가 빛나길래 내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30분쯤 지났을까, 이번에는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어라, 또 내리네?"
눈발이 제법 굵직하다. 건너편 지붕에 눈이 쌓이기 제법 쌓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나는 아침 내내 창 밖에 시선을 뺏겼다. 눈이 한참 내리더니 또다시 햇살이 강해지고 눈구름이 멀리 사라지는 것 같았다. 빛이 구름을 가르고 파란 하늘을 보여주길래 봄에 내리는 '눈'은 그렇게 끝이라고 믿었다. 잠시 '겨울'과 '봄'의 교대식을 요란하게 일어난 것뿐이지. 점심을 먹을 때도 새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눈부셨다. 주말 먹거리를 사기 위해서 남편과 마켓에 다녀오는 길에도 춥기는 했지만 눈은 내리지 않았다. 저녁에는 집 앞 공원에 열리는 마켓에 갔다. 봄이 시작되었으니 이런저런 물건을 파는 셀러들이 여기저기 지역을 돌면서 '중세 테마'의 주말 마켓을 여는 듯했다. 마켓에서 그림을 팔던 나는 '마켓'에 대한 예의로 웬만하면 꼭 들린다. 우리는 오랜만에 '길거리 음식'을 먹기로 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고기를 바라보며 케밥 두 개를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그 사이 다시 눈이 펑펑 내린다. 갑자기 봄을 기념하는 중세 테마의 마켓이 '크리스마스 마켓'이 되어버렸다. '길거리 음식'을 '길거리'에서 먹기란 도무지 힘들 것 같아서 집으로 급하게 돌아왔다. 겨우 5분 거리에 있는 공원이라 케밥은 여전히 따뜻했다.
4월 2일 토요일 아침, 손목에서 6시 알람 진동이 울렸다. 그렇지만 주말이니까, 7시까지 침대에 누워있었다. 더 누워있어도 되지만 지난 열흘 간 열심히 만들고 있는 아침 습관을 주말에도 지키려고 침실을 빠져나왔다. 식탁에서 물 한잔을 마시려는데 이상하게 밝은 빛이 창가를 기웃거린다.
작업실 창문으로 보이는 커다란 나무마다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다. 밤새 이렇게나 많은 눈이 내렸다니. 점점 날이 밝고 마음이 급해졌다. 눈이 녹기 전에 서둘러 나가고 싶었다. 남편이 맞춰둔 8시 알람이 울릴 때까지 아침 독서, 모닝 페이지를 쓰면서 기다렸다. 그리고 8시 알람이 울리자마자 침실로 가서 남편을 재촉했다.
"지금 바로 나가야겠어."
눈을 뜨자마자 남편은 영문도 모른 채 주섬 주섬 옷을 입기 시작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더 이상 입을 일이 없을 것 같았던 두터운 겨울 스웨터를 입고 이번 겨울에 몇 번 쓰지도 못했던 털모자까지 챙겼다. 목도리에 장갑까지 준비 완료. 어제 케밥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걸었던 그 공원으로 갔다. 횡당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면서 공원을 보니 들판도 나무도 온통 눈으로 덮여 있다. 겨울에도 못 만난 풍경, 눈 쌓인 공원이다.
"봄을 기다렸는데 갑자기 다시 겨울인가?"
매일 걷던 공원에 흰색이 더해졌을 뿐인데 모든 게 낯설고 아름답다. 추운 날씨에 눈까지 내린 이른 시간이라 공원에는 인적이 드물다. 눈이 또 내리기 시작한다. 정말 이상한 날씨라고 말하면서도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에 정신이 팔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펑펑 내리던 눈이 그치더니 파랗게 개인 하늘이 눈부시고 덩달아 햇살을 받은 눈도 반짝인다. 가만 보니 이 공원에 겨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 밭을 총총 뛰어노는 까치가 있다. 울창한 나무 덕분에 운이 좋게 눈 세례를 피한 봄꽃들이 함박눈 사이에서도 봄은 봄이라며 푸르고 노랗고 하얗게 말한다.
한참 그 소리를 듣고 있는데 또다시 펑펑. 챙겨 나온 우산 하나를 남편과 나눠 쓰고 종종걸음으로 근처 빵집으로 갔다. 때아닌 함박눈은 평범한 동네 빵집에도 작은 영향을 미쳤다. 빵집에 들어서는 모든 사람에게 점원이 바로 빵을 사러 왔는지 커피를 마실 건지 묻는다. 평소라면 아침 식사용 빵을 사러 온 사람들만 있을 시간에 눈 쌓인 봄을 감상하며 따뜻함을 마시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우리도 운이 좋게 겨우 마지막 남은 구석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카페 콘 레체 두 잔과 초코빵 나폴리타나 하나를 주문했다. 빵을 자를 '나이프'마저 동나버린 동네 빵집에서 손가락에 잔뜩 초콜릿을 묻혀가면서 빵을 나눠 먹었다. 빵 조각을 뜨거운 우유 거품에 찍어서 먹는다. 오늘따라 유독 달콤한 나폴리타나와 고소한 커피의 조합이다.
토요일 아침 게으름만 살짝 덜어내고 눈 구경을 나왔는데 넷플릭스보다도 볼거리가 많은 공원을 만났고 달콤한 아침을 먹었고 그림 그릴 생각 하나를 얻었다.
봄에 그것도 4월에 함박눈이 내리다니,
이상한 4월의 시작이다.
이 오묘한 조합을 시작으로 우리는 봄에 들어가고 있다. 단지 계절의 변화를 조금 더 가까이 보고 싶었을 뿐인데 많은 생각이 오간다. 녹으면 금방 사라지는 하얗고 차가운 눈 덕분에 매우 인상적이고 자극적인 하루를 보냈다. 이렇게 머물었던 생각과 느낌을 동글동글 잘 뭉쳐낸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오늘 그린 그림은 그 시작일 뿐이다. 이 글도 기록의 시작일 뿐이다.
길어지는 이야기 : 봄에 함박눈이 내린 날의 일기를 쓰고 싶었고 사진까지 일부러 추가했으니 기록의 의미는 다 이뤘다. 그런데 4월 3일 아침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찾은 옛날 그림 사진을 봤는데 어제 그린 그림과 매우 비슷하게 닮아서 정말 깜짝 놀랐다. 그동안 그린 그림 중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닮은 그림이 참 많을지도 모르겠다. 2011년 봄에 런던에서 그림과 2022년 봄에 스페인에서 그린 그림이 정말 많이 닮았다. 커다란 나무 위에 커다란 새가 앉아 있는 것도 배경에 봄꽃이 피어있는 것까지도 많이 닮았다. 물론 차이도 있다. 나무 옆에 있는 사람이 한 사람에서 두 사람으로 변했다. 두 그림을 그린 사람은 '나'지만 2011년의 나는 그림을 단순히 취미 혹은 기록으로만 여겼던 사람이었고 2022년, 지금의 나는 '그림'을 평생 그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다. 이 둘은 시작은 같지만 다른 길을 걷는다. 2011년에 그린 저 그림은 낙서 한 장 남긴 것으로 충분했겠지만, 2022년 어제 그린 '눈 쌓인 봄의 정원을 걷다'는 한 장을 그린 것으로는 전혀 충분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글로 기억하려고 애쓴다. 2011년에는 시작하는 방법을 몰랐고 2022년에는 시작하는 방법은 알지만 완성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2033년이 되면 시작하는 방법과 완성하는 법까지 알 수 있기를. 그보다 더 빨리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더드로잉핸드 The Drawing Hand
그림 그리는 삶.
현재 스페인에서 새로운 일상을 만드는 중.
인스타그램 : http://instagram.com/thedrawinghand.vi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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