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노트 어때요?
낡은 외투는 그냥 입고 새 책을 사라.
-오스틴 펠프스
출근복이 모자라다고 매달 옷 한 벌은 꼭 챙겨 사면서도 어쩌다 한 두 권 사는 책값은 아깝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끝없이 쏟아지는 일을 치워가는 삶이 벅차게 느껴지던 어느 날 다시 책 읽는 재미를 알게 됐다.
일 하나만으로도 힘에 겨워 허덕이던 때를 지나 살림과 육아를 더하며 기존에 해오던 삶의 방식으로는 시간과 체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전체 일의 양이 늘어난 것에 비해 그것을 감당해야 할 내 능력과 체력은 그대로였기에 중요하지 않은 일은 포기하며 일의 양을 덜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 쌓아온 기대치 때문일까 어느 것 하나 내려놓기가 쉽지 않았다. 모두 부둥켜안고 가느라 삶이 어두워지고 있을 때 우연히 접한 책에서 답을 일부 얻을 수 있었다.
충분한 답을 책 몇 권에서 얻어냈다면 독서는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책마다 고유한 울림으로 작은 빛 조각을 보여줄 뿐 내게 필요한 전체를 내주는 일은 없었다.
그 조각들을 모아 내 안을 밝게 만들어 가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독서는 업무와 육아, 살림, 마음가짐 등 삶의 전반에 조금씩 영향을 주며 삶에 여유를 만들어 주기 시작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둘러싼 환경이 크게 변한 건 없다. 그렇지만 그에 임하는 내 생각이 바뀐 건 모두 책 읽기 덕분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던 내 삶에 나를 위한 여유를 선물한 것 역시 바로 책이었다.
책을 읽는 순간은 다른 누군가를 돌보는 역할이 아닌 오로지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내가 지켜내지 않으면 '나'로 존재하는 삶의 여유는 방심한 순간 현실에 매몰된다.
어렵게 찾아낸 빛 조각도 책을 덮고 나면 바쁜 일상에 밀려 어느새 빛을 잃고 기억의 수면 아래 가라앉아 버리는 일이 잦았다.
기대와 실망을 여러 번 반복한 후에야 책의 중요한 내용을 적어두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잊고 싶지 않고 계속 되새기며 삶에 적용하고 싶은 것을 따로 모아 두고 보면 좋을 것 같았다.
이런저런 책을 여럿 읽었는데 기억에 남는 문장 하나 없었던 때, 심지어 어떤 책을 눈여겨보다가 과거에 이미 주문해 읽었던 책이란 걸 발견할 때면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흔을 코앞에 두고 집에 굴러다니던 노트를 하나 골라 읽은 책 내용을 적기 시작했다.
책에서 만난 마음을 울리는 한 문장을 필사하자고 시작한 거였는데 그동안 소홀했던 만큼 기억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다.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에 정리하는 내용의 양이 점점 많아졌다.
어떤 때는 책을 다 읽고 독서 노트에 쓸 일이 귀찮아 끝까지 읽지 않고 방치하는 일도 있었다.
또 언젠가는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산만한 성격 탓에 노트 하나로는 부족한 나머지 노트 하나를 더 사와 두 권의 책에 두 권의 노트를 각각 끼고 동시에 적기도 했다.
일부 벽돌 책은 어마어마한 양에 질려 깨끗이 정리를 포기하고 소장을 하기로 결정했다. 누가 강제로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닌 나 스스로 하는 일이니 타협이 쉬웠다.
나머지는 독서 노트에 중요한 걸 옮겨 적고 나면 책장을 채우지 않고 되팔거나 기증했다.
어떤 책은 다 읽자마자 그 책이 격려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때마침 옆에 있어 선물하기도 했다.
어느 때든 찾아낸 빛의 조각을 내 독서 노트에 잘 새겨 두었기 때문에 미련 없이 책을 비워낼 수 있었다.
현실에 매몰되다가도 독서 노트를 펼쳐 읽어가면 회상에 잠기고 잊혀 가던 감정을 살려낼 수 있었다. 비유하자면 삶의 어둠을 밝힐 수 있는 내 전용 빛 조각 모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첫 번째 독서 노트를 완성한 날은 잊을 수 없다.
사실 완성이란 말도 거창하지만 어릴 때 강제로 필기를 하던 노트 말고 스스로 노트의 끝까지 채워본 적이 없었기에 다른 단어를 찾을 수 없다.
내가 하는 일 없이 해가 바뀌면 자연히 돌아오는 생일이나 남이 만든 시험이란 틀에 맞춰 통과하는 것보다 내가 만든 자신과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고 한 권을 끝까지 쓴 것이 기뻐서 그 기념으로 치즈 케이크를 샀었다. 차를 곁들인 치즈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담고 독서 노트를 읽으니 책을 읽었던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다. 마치 예전에 만났던 수많은 저자들로부터 격려받는 느낌이 들어 그때 다짐했던 각오에 지금의 의지를 다시 한번 붙들어 맬 수 있었다.
펼쳐보면 분야가 제 각각에 잡다한 책의 내용이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으로 골라 쓰인 독서 초보가 적어 놓은 단순 요약본이다. 그래도 다시 읽다 보면 책을 막 읽었을 때보다 조금은 성장한 머리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곤 한다.
그리고 수 십 권의 책이 압축되어 있어 그동안 어딘가 책을 많이 가져갈 수 없는 곳에 갈 때 독서 노트를 대신 가져가면 그 몫을 톡톡히 했다. 읽은 지 오래되어 적당히 기억이 희미한 데다가 내 생각에 공감되는 글들만 간추려 옮겨 놓았기에 한 줄 한 줄 고개를 끄덕이면서 보게 되고 이런 말이 있었지 하며 재발견의 기쁨과 재미를 누릴 수 있다.
우리가 먹는 것이 곧 우리 몸이라면 우리가 읽는 것이 곧 우리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소화능력이 다른 것처럼 같은 책이라도 배경지식과 경험이 다른 사람에게 내주는 빛의 조각은 다른 모양이다. 그래서 아쉽게도 다른 사람이 캐낸 빛의 조각은 내가 캐낸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없다.
불편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직접 캐내고 모아야 자기 것이 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책값이 다른 물건에 비해 그리고 그 내재된 가치에 비해 부담스럽지 않은 정도라는 것이다. 외투 하나 값으로 책을 열에서 스무 권은 족히 살 수 있다. 도서관을 이용하면 더 한정 없이 읽을 수 있다.
어차피 금방 잊어버리는 책 읽어봤자라고 생각하는 분께는 조심히 독서 노트를 추천한다.
쓰기가 조금 고생스러워도 기억을 도와주고 더 높은 수준의 독서를 할 수 있게 도와준다.
과거에 어떤 책에서 관심 있게 읽었던 주제를 또 다른 책에서 발견하면 독서 노트에 써놓은 것을 찾아 비교하며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퍼즐 맞추기를 하는 듯한 즐거움도 얻을 수 있다.
또 직접 쓰는 고생이라는 것도 자기의 기준에 맞춰 적당히 타협하며 해결하는 방법도 있다.
힘들고 안 읽히는 책은 다음 기회에 다시 만나길 바라며 한두 줄 쓰고 덮어버리거나 옮겨 적을 내용이 너무 많은 책은 정리하지 않고 그냥 소장하는 것이다. 보고 싶을 때 책을 직접 펼쳐 읽는 것으로 타협을 해도 내 맘이니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고 하더라도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책 읽기를 핑계로 예쁜 노트를 쇼핑할 기회도 얻을 수 있다.
한때 굿즈 때문에 책을 샀는데 이제는 독서 노트를 쓰려고 책을 읽는 것 같다. 비록 주객이 전도된 감이 있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책을 읽고 삶을 가치 있게 살아내면 되지 않을까 위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