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리런 Mar 01. 2021

책을 읽고 금방 잊어버릴 땐

독서 노트 어때요?


낡은 외투는 그냥 입고 새 책을 사라.
-오스틴 펠프스


출근복이 모자라다고 매달 옷 한 벌은 꼭 챙겨 사면서도 어쩌다 한 두 권 사는 책값은 아깝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끝없이 쏟아지는 일을 치워가는 삶이 벅차게 느껴지던 어느 날 다시 책 읽는 재미를 알게 됐다.


일 하나만으로도 힘에 겨워 허덕이던 때를 지나 살림과 육아를 더하며 기존에 해오던 삶의 방식으로는 시간과 체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전체 일의 양이 늘어난 것에 비해 그것을 감당해야 할 내 능력과 체력은 그대로였기에 중요하지 않은 일은 포기하며 일의 양을 덜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 쌓아온 기대치 때문일까 어느 것 하나 내려놓기가 쉽지 않았다. 모두 부둥켜안고 가느라 삶이 어두워지고 있을 때 우연히 접한 책에서 답을 일부 얻을 수 있었다.

충분한 답을 책 몇 권에서 얻어냈다면 독서는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책마다 고유한 울림으로 작은 빛 조각을 보여줄 뿐 내게 필요한 전체를 내주는 일은 없었다.

그 조각들을 모아 내 안을 밝게 만들어 가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독서는 업무와 육아, 살림, 마음가짐 등 삶의 전반에 조금씩 영향을 주며 삶에 여유를 만들어 주기 시작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둘러싼 환경이 크게 변한 건 없다. 그렇지만 그에 임하는 내 생각이 바뀐 건 모두 책 읽기 덕분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던 내 삶에 나를 위한 여유를 선물한 것 역시 바로 책이었다.

책을 읽는 순간은 다른 누군가를 돌보는 역할이 아닌 오로지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내가 지켜내지 않으면 '나'로 존재하는 삶의 여유는 방심한 순간 현실에 매몰된다.

어렵게 찾아낸 빛 조각도 책을 덮고 나면 바쁜 일상에 밀려 어느새 빛을 잃고 기억의 수면 아래 가라앉아 버리는 일이 잦았다.

기대와 실망을 여러 번 반복한 후에야 책의 중요한 내용을 적어두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잊고 싶지 않고 계속 되새기며 삶에 적용하고 싶은 것을 따로 모아 두고 보면 좋을 것 같았다.

이런저런 책을 여럿 읽었는데 기억에 남는 문장 하나 없었던 때, 심지어 어떤 책을 눈여겨보다가 과거에 이미 주문해 읽었던 책이란 걸 발견할 때면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책읽기의 완성은 글쓰기이고 그 사이에 독서 노트가 있다.


그래서 마흔을 코앞에 두고 집에 굴러다니던 노트를 하나 골라 읽은 책 내용을 적기 시작했다.

책에서 만난 마음을 울리는 한 문장을 필사하자고 시작한 거였는데 그동안 소홀했던 만큼 기억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다.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에 정리하는 내용의 양이 점점 많아졌다.

어떤 때는 책을 다 읽고 독서 노트에 쓸 일이 귀찮아 끝까지 읽지 않고 방치하는 일도 있었다.

또 언젠가는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산만한 성격 탓에 노트 하나로는 부족한 나머지 노트 하나를 더 사와 두 권의 책에 두 권의 노트를 각각 끼고 동시에 적기도 했다.


일부 벽돌 책은 어마어마한 양에 질려 깨끗이 정리를 포기하고 소장을 하기로 결정했다. 누가 강제로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닌 나 스스로 하는 일이니 타협이 쉬웠다.

나머지는 독서 노트에 중요한 걸 옮겨 적고 나면 책장을 채우지 않고 되팔거나 기증했다.

어떤 책은 다 읽자마자 그 책이 격려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때마침 옆에 있어 선물하기도 했다.

어느 때든 찾아낸 빛의 조각을 내 독서 노트에 잘 새겨 두었기 때문에 미련 없이 책을 비워낼 수 있었다.

현실에 매몰되다가도 독서 노트를 펼쳐 읽어가면 회상에 잠기고 잊혀 가던 감정을 살려낼 수 있었다. 비유하자면 삶의 어둠을 밝힐 수 있는 내 전용 빛 조각 모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첫 번째 독서 노트를 완성한 날은 잊을 수 없다.

사실 완성이란 말도 거창하지만 어릴 때 강제로 필기를 하던 노트 말고 스스로 노트의 끝까지 채워본 적이 없었기에 다른 단어를 찾을 수 없다.

내가 하는 일 없이 해가 바뀌면 자연히 돌아오는 생일이나 남이 만든 시험이란 틀에 맞춰 통과하는 것보다 내가 만든 자신과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고 한 권을 끝까지 쓴 것이 기뻐서 그 기념으로 치즈 케이크를 샀었다. 차를 곁들인 치즈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담고 독서 노트를 읽으니 책을 읽었던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다. 마치 예전에 만났던 수많은 저자들로부터 격려받는 느낌이 들어 그때 다짐했던 각오에 지금의 의지를 다시 한번 붙들어 맬 수 있었다.


펼쳐보면 분야가 제 각각에 잡다한 책의 내용이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으로 골라 쓰인 독서 초보가 적어 놓은 단순 요약본이다. 그래도 다시 읽다 보면 책을 막 읽었을 때보다 조금은 성장한 머리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곤 한다.

그리고 수 십 권의 책이 압축되어 있어 그동안 어딘가 책을 많이 가져갈 수 없는 곳에 갈 때 독서 노트를 대신 가져가면 그 몫을 톡톡히 했다. 읽은 지 오래되어 적당히 기억이 희미한 데다가 내 생각에 공감되는 글들만 간추려 옮겨 놓았기에 한 줄 한 줄 고개를 끄덕이면서 보게 되고 이런 말이 있었지 하며 재발견의 기쁨과 재미를 누릴 수 있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 몸이라면 우리가 읽는 것이  우리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소화능력이 다른 것처럼 같은 책이라도 배경지식과 경험이 다른 사람에게 내주는 빛의 조각은 다른 모양이다. 그래서 아쉽게도 다른 사람이 캐낸 빛의 조각은 내가 캐낸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없다.

불편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직접 캐내고 모아야 자기 것이 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책값이 다른 물건에 비해 그리고 그 내재된 가치에 비해 부담스럽지 않은 정도라는 것이다. 외투 하나 값으로 책을 열에서 스무 권은 족히 살 수 있다. 도서관을 이용하면 더 한정 없이 읽을 수 있다.


어차피 금방 잊어버리는  읽어봤자라고 생각하는 분께는 조심히 독서 노트를 추천한다.

쓰기가 조금 고생스러워도 기억을 도와주고 더 높은 수준의 독서를 할 수 있게 도와준다.

과거에 어떤 책에서 관심 있게 읽었던 주제를 또 다른 책에서 발견하면 독서 노트에 써놓은 것을 찾아 비교하며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퍼즐 맞추기를 하는 듯한 즐거움도 얻을 수 있다.


또 직접 쓰는 고생이라는 것도 자기의 기준에 맞춰 적당히 타협하며 해결하는 방법도 있다.

힘들고 안 읽히는 책은 다음 기회에 다시 만나길 바라며 한두 줄 쓰고 덮어버리거나 옮겨 적을 내용이 너무 많은 책은 정리하지 않고 그냥 소장하는 것이다. 보고 싶을 때 책을 직접 펼쳐 읽는 것으로 타협을 해도 내 맘이니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고 하더라도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책 읽기를 핑계로 예쁜 노트를 쇼핑할 기회도 얻을 수 있다.  

한때 굿즈 때문에 책을 샀는데 이제는 독서 노트를 쓰려고 책을 읽는 것 같다. 비록 주객이 전도된 감이 있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책을 읽고 삶을 가치 있게 살아내면 되지 않을까 위로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퇴근길과 출근길 온도차를 줄이는 7가지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